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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교사를 꿈꾸던 조선 여성… 원조 한류스타가 되다

⑬최승희(崔承喜, 1911 ~1969)

융합의 가치 체현하며 예술의 국가‧장르 경계 넘나들어
‘패왕별희’ 창작하고 중국무용의 현대화, 동양무용 창출
헤밍웨이, 채플린, 피카소 등 유명 인사들도 공연 관람

 

 

[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대중문화를 포함한 한국과 관련된 것들이 대한민국 이외의 나라에서 인기를 얻는 현상,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한류’다. 싸이의 노래와 춤이 에펠탑 광장을 뒤흔들고 한국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프랑스 바닷가 작은 학교 라로셸대학의 한국어 전공에는 정원의 10배가 넘는 지원자가 몰린다.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는 한국어를 필수로 하고 한국식으로 교육하는 학교가 세워져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한류는 갑자기 시작된 것인가? 욘사마, 이영애, 싸이, BTS 이전에 누군가 있었을까? 이미 식민지 시대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 바로 무용가 최승희다. 그녀는 지금의 한류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외국에 전파한, 그래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우리에게는 그저 ‘서구식 현대적 기법의 춤을 창작하고 공연한 최초의 한국인’, ‘해방 이전의 조선무용계를 주도했던 인물’, ‘해방 이후 북한에서 살다가 숙청을 당한 불운의 예술인’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지금 최승희를 다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녀가 보여준 삶과 예술 활동이 미래 교육에 주는 교훈 때문이다. 그녀는 미래 사회의 핵심 역량인 융합의 가치를 일찍이 체현한 인물이었다. 예술에서 국가적·지리적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주는 가치를 알고 실천했다. 서양 무용에서 얻은 지혜와 기술로 한국전통무용을 되살렸고 서양무용과 한국무용에서 얻은 영감으로 중국무용의 현대화, 나아가 동양무용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창출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1993년 장국영과 공리 주연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영화 ‘패왕별희’. 중국의 고전문학 ‘패왕별희’를 경극의 검무와 융합시켜 새로운 창작물 ‘패왕별희’로 만든 것이 최승희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승희에 의해 현대화된 ‘패왕별희’가 없었으면 장국영의 ‘패왕별희’ 또한 없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그는 문화의 지리적 경계와 장르적 경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으로 많은 창작예술품을 생산한 인물이다. 그래서 최승희는 과거이면서 현재이며 우리의 미래이기도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를 통해 일제강점기 이 땅의 여성들이 사회의 일원임을 자각하게 됐고, 여성도 남성 못지않게 역사에 기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 역사 속 최초의 페미니스트 중 한 명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념적 굴레로 가려져 있는 그를 다시 음미해야 할 이유는 이렇게 많다.
 

최승희는 정승판서를 지낸 해주 최씨 명문가의 딸로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풍류시인이었던 아버지에게서는 문학적 재질을, 활달한 성품의 어머니에게서는 적극적인 성격을 이어받았다. 첩이었던 작은 어머니의 존재는 조선의 여성 문제에 관심 갖게 만들었다. 교편을 잡고 있던 작은 오빠 승오와 카프계열 소설가였던 큰 오빠 승일의 영향은 그녀의 인생에서 절대적이었다. 
 

그는 숙명여학교에 입학해 월반을 반복한 후 2년 조기 졸업했다. 졸업 즈음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고 수송동의 작은 초가집에서 어렵게 생활 했다. 집안 경제에 도움을 주고자 작은 오빠의 뒤를 이어 교사가 되기 위해 경성사범학교에 지원해 7등으로 합격했지만 만16세가 되지 않았던 터라 연령 미달로 등록을 못하고 교사의 꿈을 접어야 했다. 
 

 

좌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1926년 3월 최승희는 오빠 승일의 권유로 일본 출신 세계적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경성 무용발표를 관람하게 됐다. 오빠의 주선으로 이시이 바쿠 무용단과 일본으로 건너가 그의 문하에서 3년 간 무용을 배웠다. 1927년에는 일시 귀국해 ‘세레나데’라는 작품으로 고국에서의 첫 공연을 해 찬사를 받았다. 1929년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1930년 2월에 한국인 최초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가졌는데 이는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현대 무용 공연이었다. 
 

1931년 오빠 승일의 친구였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 안막과 결혼한 최승희는 이후 작품 세계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의 문화와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작품에 반영된 것이다. 갓 태어난 딸 승자와 함께 1933년 다시 일본으로 간 그는 바쿠의 문하에서 제2의 학습 기회를 얻는다. 바쿠의 권유로 한성준에게서 조선 춤을 사사 받은 후 발표한 ‘에헤야 노아라’는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무용발표회 뿐 아니라 영화에도 출연해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본인의 이야기를 담은 ‘반도의 무희’로 그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 시기에 그의 무용을 관람한 일본 문학가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는 일본 ‘문예’지에 발표한 ‘무희 최승희론’에서 “최승희는 조선무용을 그대로 춤추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을 새롭게 하고 약한 것은 강하게 하고 없어진 것은 재생케 하는, 자기스스로 창작한 조선춤인 것이다. 그녀의 머리, 그녀의 가슴, 그리고 그녀의 혈관과 춤 속에 어느 때나 충만된 민족애야말로 조선 속에서 가장 찬양해야 할 것이라 본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스승 바쿠 또한 “그녀의 무용이야말로 유산의 비판적 섭취 그 자체”라고 평했다.
 

이런 평가 속에 그는 “조선무용이 지니는 민족무용으로서의 양식화를 세계인에게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선언하고 외국 공연을 기획했다. ‘조광’ 잡지가 주최한 좌담회에서는 “조선고대의 춤과 각지의 민속과 정서를 연구해 이것을 가지고 레퍼토리를 준비한 후 출발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실제로 조선 각지를 순회하며 공연했다. 오빠에게 쓴 편지에서는 “조선의 리듬을 가지고 서양에 싸움을 하려 건너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숙명여자전문학교 창립을 위한 기금 모금공연도 이 즈음이었다. 
 

그는 1937년 12월 19일 첫 공연지 미국으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뉴욕 등에서의 공연은 세계의 무용 애호가들에게 조선춤을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기여했다는 평(시카고 데일리뉴스)과 함께 “조선예술의 완전한 르네상스를 가져온 유명한 딸, 조선의 우다이 샹카(시어터 아트)”라는 칭호를 얻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게리 쿠퍼, 찰리 채플린, 로버트 테일러 등 문화 예술인들이 그의 공연장을 찾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교포들로부터는 친일무용가라는 비판과 함께 배격운동을 당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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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9년에는 조선 악사 2명과 프랑스 파리 공연을 통해 “그녀야 말로 진정한 동양적 환상의 현현이라 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남편 안막은 프랑스 공연에 관해 쓴 시에서 “구라파의 한 복판에서 조선이 움직이고 있다. 절묘한 몸 움직임에 파리 사람들이 먼 조선으로 이끌려 간다”고 노래했다. 파리 공연에는 피카소, 장 콕트, 로망 롤랑 등도 관객으로 참여했을 정도였다. 이후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이태리, 덴마크, 스칸디나비아 지역과 영국, 에스파니아 등지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1940년에는 중남미 이십 여개 도시에서 61회의 공연을 했다. 1940년 여름까지 3년 동안 서양에서만 약 150회의 공연을 했다. 요즘의 BTS를 연상케 하는 인기였다.
 

그녀가 보여준 작품은 대부분 직접 창작한 민족의 정취가 반영된 ‘영산춤’ ‘봉산탈춤’ ‘산조’ ‘가면무’ ‘검무’ ‘승무’ ‘장고춤’ ‘무녀무’ ‘화랑의 춤’ ‘선녀의 춤’ ‘아리랑’ 등  전통 무용이나 그에 바탕을 둔 창조적 무용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의 벽화에서’ ‘고구려의 전무’ ‘석굴암의 벽조’ 등 역사 내용을 소재로 창조한 무용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의 인생에 어려움이 닥친 것은 1942년 이후 일제의 군대 위문공연 요청에서 비롯됐다. 1942년에만 조선과 만주에서 190여 회의 위문 공연을 가졌다. 1944년에는 동양무용을 세계적인 무용으로 키우고 싶다는 기대를 걸고 중국에 정착해 ‘동방무용연구소’를 건립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중국 경극 배우 메이란팡과 교류하며 ‘패왕별희’ ‘길상천녀’ 등 많은 작품들을 창작해 중국 무용의 현대화와 제자 양성에 집중 했다. 
 

중국에서 해방을 맞고는 곧바로 고향 서울로 돌아왔지만 친일파로 낙인 찍혀 있었고 결국 남편을 포함한 많은 사회주의 계열의 예술인들과 함께 월북하게 된다. 1948년 김구 등 남북연석회의 참석자들 앞에서는 무용시 ‘해방의 노래’를 공연했다. 이후 북에서 그녀는 최승희무용연구소 소장, 인민배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지냈다. 1956년에 ‘최승희무용연구소’는 국립무용학교로 개편됐고 교장이 됐다. 경성사범학교 입학 좌절로 포기했던 교육자의 꿈을 30년 만에 이룬 것이다. 1950년대 후반까지도 그는 세계청년대표 대회 등에 참가해 무용 공연을 활발하게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8년 남편의 숙청이후 그의 무용이 주체예술사상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외되기 시작했다. ‘조선민족무용기본’(1958) ‘조선아동무용기본’(1964)을 펴내는 등 교육과 창작 활동을 지속하기는 했지만 생애 후반은 평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에서의 냉대로 사망 소식조차 외부 세계에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2003년에 그의 묘가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됐다는 북의 발표로 1969년 8월 8일에 사망했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졌을 뿐이다.
 

 

그가 58년의 짧은 생을 통해 실천하고 보여준 것은 다양하다. 문화예술에서 탈 중심과 융합의 가치,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의 출발점이라는 자각, 서양적 기술을 바탕으로 한 아시아 예술의 발견과 재창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했다. 이는 지금 이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와 다르지 않고 미래 교육이 추구해야할 가치와도 통한다. 친일 경력이나 월북으로 지워져야 할 정도로 가벼운 흔적은 결코 아니다.
 

그는 아시아인을 넘어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음악과 춤에 대한 천부적 자질을 지니고 있었고 무대 위에서 관객을 사로잡는 눈빛과 몸동작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더 가지고 있었다. 그의 춤 속에는 국제주의적 감각과 함께 민족주의적 색채가 들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가인 오빠의 영향으로 틈만 나면 푸시킨, 바이런, 하이네, 톨스토이, 고리끼 등 외국 문학 작품들을 탐독했고 민족 현실을 다룬 카프계열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도 섭렵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우리 무용으로 세계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몸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지만 그녀의 머리, 가슴, 혈관에는 민족 문화에 대한 사랑, 민족의 아픔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었다. 요즘 한류스타들의 머리, 가슴, 혈관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