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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2018. 통일리더캠프 북중국경에서 통일을 꿈꾸다 5편

압록강아 너는 알고 있느냐?

우리 시간보다 한 시간 이른 새벽 다섯 시 퉁화시의 아침이 밝아온다. 깔끔한 숙소 때문에 몸이 가뿐한 아침이다. 고구려의 도읍지 집안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긴다. 풀고 싸기를 반복하면서 여정의 또 다른 묘미를 느낀다. 로비에서 같은 조원을 만나 인사를 한다. 낯가림이 심한 편이지만 며칠사이 얼굴이 익어 편안하다.


퉁화시에서 집안시까지 가는 길은 물길, 들길, 고갯길, 구불구불한 길이다. 길옆을 흐르는 시내에는 소들이 풀을 뜯고 빨래하는 아낙네와 물놀이 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여느 시골의 여름 풍경이다. 303번 국도를 달리다 잠깐 휴게소에 들린다. 장뇌삼이 가득하다. 우리나라의 휴게소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파란 하늘과 햇살의 따끔함이 상큼하다.


위도가 낮아질수록 여름의 한가운데로 접어든다. 차량은 속도를 내지 못한다. 골짜기를 달리며 차창으로 보는 원시림이 눈을 시원하게 한다. 짙은 녹색의 산등성이 뒤로 펼쳐진 거울 같은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약간의 낮은 구릉지에는 벼들이 이삭을 패고 있다. 또다시 경사가 있는 길을 달린다. 길 아래는 낭떠러지다. 집안시로 가는 길은 이렇게 좁은 협곡을 통과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협곡을 막으면 천혜의 요새가 된다. 두어 시간 달리자 멀리 집안시의 모습과 북한 만포시의 제련소 굴뚝이 눈에 들어온다. 환도산성을 돌아 나와 집안시의 왼쪽을 흐르는 통구하는 앞쪽의 압록강과 합쳐진다. 집안시는 지형적으로 한 나라의 도읍지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춘 곳이다.


광개토대왕비와 왕릉을 보기 위해 내린다. 정오에 쏟아지는 팔월의 태양이 위세를 발휘한다. 유적지는 관람로 외엔 잡초가 우묵장성이다. 고구려의 세력을 요동까지 떨쳤던 광개토대왕비 앞에 선다. 이 비는 서기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비석으로 한국에서 제일 큰 규모이다. 높이 6.39m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 부분은 약간 좁다. 총 1802자의 금석문은 고구려의 건국 내력과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을 연대순으로 삼국의 정세와 일본의 관계를 새겨놓았다. 하지만 이 고구려의 역사도 중국은 한 변방 민족으로 중국사 일부분으로 오도하고 있으며 사드 사태 이후 찾아오는 한국 관광객에 대하여도 좋지 않은 시각으로 본다. 그래서 사진 촬영도 금지다. 우리의 고대사를 남의 땅에서 눈치를 보며 보는 것이 속상하다.


광개토대왕비를 뒤로 왕릉으로 간다. 관람로 주변의 해바라기꽃밭이 생뚱맞다. 늘어진 버드나무 그늘에 분노를 삭이고 땀을 식히며 왕릉을 둘러본다. 왕릉은 돌무지무덤 형태로 능 주변을 받치고 있는 호석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곳곳에 도굴당한 흔적과 허물어져 방치된 모습이 1500년 전의 모습과 대비된다. 원형대로 보존되었다면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견줄만하겠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한 왕의 무덤이 있는 곳도 옛 우리 민족의 근거지였으며 압록강 너머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북한 땅도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역사의 일부분으로 이르고 있다. 다시 차량으로 1.4㎞ 떨어진 장군총으로 간다. 장군총은 7층의 단계식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고, 평면은 장방형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31.5~33m며, 무덤의 높이는 현재 14m로 아파트 5층 높이에 달한다.

 

기단(基壇)의 무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護石)이라 하는 적석 밀림 방지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분실되었는지 오직 동변만 가운데 호석 없이 두 개뿐이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광개토대왕릉과 장군총을 연결하면 백두산 천지와 일직선을 이룬다고 한다. 만주족도 장백산이라는 백두산을 자신의 성지라고 하는 어떤 해석이 필요한지 모를 일이다. 장군총을 마주하는 일행의 눈빛이 반짝인다. 교과서 사진으로 본 것을 직접 본다고 한다. 셔터의 울림에 파란 하늘과 아픔이 담긴다. 장군총을 뒤로 장수왕릉 1호 동반 무덤으로 간다. 규모는 작다. 특이한 점은 덮게석 가장자리를 따라 파낸 홈으로 빗물이 묘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고구려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장군총을 지나 집안시내로 들어간다. 시내 곳곳의 건물은 외성에 사용된 성곽 돌들이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남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야만족 같은 형태다. 시내를 통과하여 압록강 변에서 정차하여 잠시 북한 만포시를 조망한다. 첫날 두만강 탐방시 날씨로 인해 보지 못한 하루가 비친다. 두만강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유리알처럼 맑은 물에 파란 하늘, 흰 구름이 내려앉은 모습이다. 강 건너는 북한의 만포시 주변의 산은 경사가 심해도 전부 밭으로 개간된 모습이다.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곳이다. 지금 앞을 흐르는 압록강은 국경선이다. 아쉬움을 달래려 강둑을 내려가 강물에 손을 담가 본다. 통구하와 합쳐지는 압록강 물엔 담긴 산과 하늘이 시원하다.


바쁜 오후 일정으로 빨리 점심을 먹고 집안시를 빠져나온다. 멀어지는 압록강을 보며 한 나라의 도읍지였으며 그 역사를 간직할 유적과 유물을 이렇게 홀대를 하는 중국 정부와 우리의 관심 밖에 멀어진 고구려의 역사가 안타깝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을까? 뜬구름 잡는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 오늘의 우리 역사는 과거가 만든 작품이다.

 

지구촌의 정체를 훤히 꿰뚫는 국제정치학의 대가라 하더라도 인류의 원형문화와 시원 역사를 모른다면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문명 인류의 미래 문명도 알 수도 없고 준비할 수도 없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읽게 하되 어릴 때부터 읽게 할 것이며 역사를 배우게 하되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우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한국인으로 살려면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알고 세워야 한다.


태양은 하늘 한가운데서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집안시에서 단동시까지 다섯 시간의 긴 이동이 시작된다. 도로 사정은 더 나빠진다. 때론 계곡 사이의 좁은 낭떠러지 길을, 하천을 가로지르는 좁은 길을, 몇 굽이의 고개를 넘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밖의 경치를 보며 네 시간쯤 달리자 넓은 호수가 나타난다. 바로 평안북도 삭주군 위치한 수풍댐이다. 이 댐은 전력생산은 물론 가두리 양식과 조개 양식도 많이 한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 만주족의 후손들은 이런 수자원을 끼고 있으면서도 벼를 재배하지 못한다고 한다.


단동시가 가까워질수록 강폭은 넓어지고 산은 낮아진다. 강 저편 호산장성 일명 박작성이 보인다. 이 성은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할 때 300척의 배를 만들었던 곳이다. 그런데 중국은 만리장성의 끝이라는 역사의 오류를 가공하고 있다. 실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중국 허베이성 산해관이다. 역사를 바로 보지 못함이 아쉽다.


단동시내로 들어선다. 썰물 때 이어서 압록강 하류는 가장자리를 드러내고 있다. 낚시, 수영 등 여름날 저녁 시간을 즐기는 사람으로 강변은 요란하다. 하지만 강 건너 위화도와 신의주 쪽은 건물도 없고 조용하기만 하다. 단지 북한 주민 몇몇 빨래하는 모습뿐이다.


단동시는 역사에 따라 다양한 사연을 담고 있다.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멸망 후 당은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으며 6.25 한국전쟁 시 중국인민군의 병참 전선이 된 곳이다. 많은 교통량으로 가고 서기를 반복하여 압록강 단교에 오른다. 이 다리는 파괴되기 전 한반도와 중국을 이어 주던 중요한 교통로로 1911년 일본이 대륙 침략을 목적으로 압록강 하류에 건설했다. 그리고 6·25 한국전쟁 때 미국이 중국의 전쟁 개입을 막기 위해서 B-29 폭격기로 절반을 파괴하여, 현재 중국 쪽 절반 만 남아 있으며 파괴된 북한 쪽 다리는 교각만 덩그러니 드러나 있다. 끊어진 다리라는 뜻에서 ‘단교(断桥)’라고 부른다.


다리 위에 걸어 둔 6·25 한국전쟁 사진과 설명이 눈길을 끈다. 마오쩌둥 사진 옆에 적힌 ‘抗美援朝, 保家卫国(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돕고 나라를 지켰다)’라는 글귀에서 6·25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리고 단교에서 70~80m 떨어진 상류 쪽에 세워진 온전한 다리도 본다.

 

이 다리는 1943년에 건설한 ‘중조우의교(中朝友谊桥)’로, 오늘날 중국과 북한을 잇는 다리이다. 944m에 달하는 이 다리는 1차선 철길과 1차선 도로로 북한과 중국의 최대 교역로이자 통행로다. 지금도 북한 쪽에서 물건을 싣고 나오는 트럭이 보인다. 북핵사태로  교역이 금지된 줄 알았는데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압록강 단교 반대쪽은 북한 신의주시이다. 다리 아래 흐르는 무채색 계열 암청색 물결이 하염없이 시간을 삼키며 흐른다.


압록강을 둘러보기 위해 배에 오른다. 강 하류의 위쪽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이고 강 아래는 신 압록강 대교와 새로운 개발지도 떠오르고 있는 황금평이 있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교각 사이를 통과하여 강심에서 신의주 쪽으로 약간 나아갔다가 다시 머리를 돌린다. 더는 나아갈 수 없다. 압록강에 붉은 노을과 어스름이 내린다. 단동시의 현란한 LED조명이 강물에 반사된다. 아름다운 야경이다.

 

그러나 반대쪽 신의주는 풀벌레 소리만 어둠에 물든다. 어떻게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나라와 체제 유지에 급급하여 사회주의 통제경제를 이어온 나라의 광경이 다른지 씁쓸하다. 결국 힘들고 아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나라의 국민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개방은 또다른 혼란과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한말의 조선과 청나라 말기의 상황을 되돌아본다. 산업혁명이란 기계문명 발전이란 시대적 조류를 늦게 파악한 조선과 청은 외세의 힘으로 개방되어 결국 열강의 침탈장이 되었다. 이런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보고 지금 모두의 공존과 번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북한 권력층과 위정자들은 상황파악을 잘 해야 한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관망하는 패권 국가는 남북이 하나 되는 것을 결코 좋아할 리 없다. 시대적인 조류를 타며 우리 민족의 공존을 위해 지금 최선책이 무엇인지 늦지 않은 준비를 해야 한다. 아마 그것이 통일이라면 그 바이러스를 심어야 한다.


까만 밤이 압록강에 짙어 온다. 압록강을 끼고 저녁 식사 장소로 향하며 우리나라 사람으로 독일에서 일생을 마친 작가 이미륵을 떠 올린다. 그의 대표작은 ‘압록강은 흐른다’ 이다. 이미륵은 3.1운동의 검거 선풍을 피해 압록강 하류에서 쪽배를 타고 건너 중국 상하이를 거쳐 독일로 떠난 슬픈 작가이다. 


짙어지는 검은 어둠속에 흐르른 압록강을 향해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압록강아 아느냐? 이 아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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