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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역사 속 철도, 미래의 철도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남북철도 연결’. 이 말이 갖는 의미는 그저 철도로 평양이나 원산을 간다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러나 지금은 현실을 반영하는 낱말인 ‘해외여행(海外旅行)’을 벗어날 수 있으리란 희망 때문은 아닐까. 외국여행을 뜻하는 해외여행은 섬나라에게 적합한 말이 아닌가.

 

더구나 예전에는 대륙으로 연결되는 철도로 이미 다닌 사람들이 있다. 1926년 세계일주를 했던 첫 번째 여성인 나혜석도, 1932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손기정도 철도로 국경을 넘었다. 남북분단은 물리적인 공간의 제약 뿐 아니라 생각도 규정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외국여행’ 대신 ‘해외여행(비록 현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이 우리에게 맞는 말인 줄 알고 쓰는 듯하다.
 

철도라면, 그것도 대륙으로 연결할 수 있는 철도라면 우리 사고의 틀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다. 남북관계에 나오는 철도 이야기는 그래서 신난다. 그런데 역사 속 철도가 늘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지금 그 이야기를 굳이 살펴봐야겠냐는 의견도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 역사에서 철도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살펴본다면 그 부정의 모습을 극복할 방안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서울역, 경부선과 경의선이 만나는 곳

 

고속철도 KTX가 닿는 서울역 건물은 무척이나 화려하다. 겉모습이 거창한 서울역은 유리창을 번쩍이며 위용을 자랑한다. 산뜻한 새 건물로 규모도 커서 쾌적하게 기차를 기다릴 수 있다. 그런데 그 옆에, 그러니까 숭례문 방향으로 조금 작고 낡은, 그렇지만 돔이 있어 고풍스런 건물이 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 동상 뒤에 있는 이 건물은 옛 서울역 건물로 1925년에 완성됐다. 지금이야 주변에 거창한 건물이 있지만 이 건물을 처음 지었을 때는 서울 3대 건물로 손꼽혔다고 한다. 이 역이 있던 시절, 그리고 처음 우리나라에 기차가 놓이던 시절을 생각해 보기 좋은 곳이다.

 

 

일제 침략의 도구로 활용된 철도

 

1899년 우리나라에 첫 철도인 경인선이 놓였다. 이 철도는 처음 미국인 모스가 부설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금 문제로 일본의 손에 넘어가서 완성됐다. 처음에는 인천~노량진 간으로 설계됐지만 1900년 지금의 서울역까지 연장 개통됐다. 이 철도는 자본주의 첨단 문물이 우리 땅에 들어왔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도 일제가 손을 댔지만 조금 더 중요한 철도는 바로 경부선이었다. 철도의 완성은 1905년이고 부설공사가 시작된 시기는 1899년이지만 경부선의 역사는 1880년대 초로 올라간다. 
 

한반도 침략을 기정사실화 한 일제는 이미 이때 한반도를 관통하는 철도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실제 경부선을 놓기까지 우리 정부와 상관없이 5번에 걸친 답사를 마친 상태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철도 부설은 당장 실현해야 할 문제가 돼 우리 정부를 압박한 것이다. 그렇게 얻어낸 것이 <경부철도합동(1898)>이란 계약이다. 철도부설권, 철도영업권, 철도용지를 무상으로 일본에 제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본격적인 침략이라고 할 수 있는 한일의정서(1904)나 을사늑약(1905)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이뤄진 것이다. 
 

이후 경부선 뿐 아니라 경의선 부설권까지 빼앗아 낸 일제는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철도 부지를 확보한 뒤 연인원 1억 명에 이르는 한국인을 노동자로 동원해 5년 만에 경부선(1905)과 경의선(1906)을 완성했다.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가는 철도 노선을 확보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토지를 빼앗기고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저항했다. 일제가 체포해 군사재판에 넘겨 사형선고를 당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렇다면 일제는 왜 이렇게 무리를 해서 경부선과 경의선을 놓으려고 했을까. 그 답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다. 바로 철로 폭이다. 지금 세계의 철로 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가장 널리 쓰이는 표준궤(1435mm)와 그보다 넓은 광궤(1520mm 외), 그리고 표준궤보다 좁은 협궤(1067mm 외)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경부선과 경의선을 포함한 우리나라 철로는 표준궤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철로는 협궤였다. 왜 일본은 자기 나라와 다른 철로의 폭을 선택했을까. 
 

 

사실, 처음 경부선과 경의선을 부설할 때 일본과 같은 협궤를 놓거나 또는 그보다 더 좁은 철로를 놓자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표준궤를 놓기로 결정됐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 만주의 철도가 모두 표준궤였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철도를 표준궤로 놓아야 바로 대륙으로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당시 러시아가 놓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광궤였다. 러시아를 위협으로 여겼던 일제로서는 역시 표준궤를 선택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한반도 철도는 대륙 침략을 목표로 만든 도구 가운데 하나였고 그래서 그토록 집착을 했던 것이다. 실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철도는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일제의 대륙 침략을 목표로 만든 것이었다. 또 서울을 중심으로 X자로 놓인 철도를 통해 식민지 지배가 용이하도록 했다. 그런 점에서 광복 이전 철도는 세계로 향한 창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우리민족을 옥죄는 도구였던 것이다.
 

다시 옛 서울역 건물을 보자. 강우규 의사가 여기서 폭탄을 던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나라를 무단통치하려는 일제의 총독이 기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일제의 침략도구를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도구로 돌려놓기도 했다. 상하이로 망명한 뒤 서울에 6번이나 들어왔던 정정화 선생이 주로 이용한 것도 바로 철도였다. 숱한 독립운동가가 이 철도로 독립의 꿈을 퍼 날랐던 것이다. 3.1운동 당시 북한의 여러 지역에서 서울과 동시에 만세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철도 덕분이었다. 경의선과 경원선이 닿는 곳인 평양, 진남포, 원산 등지에서 3월 1일, 그날 만세운동이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는 철도의 역사를 담은 장소가 없다. 물론 의왕의 ‘철도박물관’이 잘 정리해 놨지만 그 장소가 갖는 의미를 전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역사의 현장에서 어두웠던 시기, 희망을 찾으려고 했던 작지만 소중한 움직임을 볼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옛 서울역 건물만한 것이 없다. 이 건물은 새 서울역 건물이 생기면 문화공간, 전시공간으로 쓴다고 했지만 이 건물의 올바른 역할은 철도의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 돼야 할 것이다.

 

 

철도 역사 한눈에… 의왕 철도박물관

 

철도를 생각하기 좋은 장소가 있다. 경기도 의왕 한국교통대 옆 철도박물관이다.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를 전시실에서 살펴볼 수도 있고 중요한 역 건물들의 옛 모습도 모형으로 살펴볼 수 있다. 요즘이야 옛 건물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옆에 새로 건물을 짓기도 하지만 사라진 한때 새것으로 낡은 것을 대체하는 경우가 많았던 시기를 생각하게 한다.
 

철도, 그러니까 기차를 보는 재미도 있다. 여러 기차 기관차며 객차, 그리고 대통령 전용객차(그런 것이 필요한 시기가 있었다는 것도 역사가 되겠다)가 있어 가까운 개인사를 투영해볼 기회가 될 것 같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담는 곳이 주로 박물관이지만 여기서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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