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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강마을에서 책읽기-풍금이 있던 자리

오디세우스의 귀환과 페넬로페의 가출

질기고 무서운 폭염이 쏟아지던 여름의 끝자락에 지인들과 여수엘 갔습니다. 짙푸른 바다와 반짝이는 잎새가 아름다운 동백나무가 있는 돌산도의 끝자락 거북목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싱싱한 회를 갓김치에 얹어 먹을 때 바다는 먼 불빛으로 일렁이고 바람 속에 벌레소리가 섞여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찻집에 앉아 올봄 아버지를 여읜 지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금슬이 유난스러웠던 지인의 아버지께서는 아침을 준비하던 사랑하는 아내 얼굴도 보지 못하고 쿵 소리와 함께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꽃을 사랑하여 집 주변 마다 꽃을 심어두고 즐기셨던 아버지를 보내고 돌아와 보니 주무시던 창 앞에 홍매화가 유난히 붉게 피어있더랍니다. 가고 없는 아버지의 손길이 닿았던 꽃밭과 진달래로 사태 진 산기슭마다 송이송이 핀 아버지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합니다.

 

짙푸른 여수바다로 가는 제 가방에 넣었던 한 권의 책은 이 시대 대표적 작가인 신경숙의 오래 전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입니다. 이 소설은 고향으로 잠시 돌아간 화자가 그동안 지속해 온 불륜을 끝내기로 결심하기까지 하염없이 고민하며, 떠올린 상념들을 상대방에게 편지형식으로 고백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화자는 사랑을 나누는 유부남으로부터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매혹되었던 분꽃 같았던 아버지가 데려온 여인을 생각합니다. 모두가 손가락질하였지만 조선파 같이 파랗고 뽀얀 그녀가 닮고 싶었습니다. 숙주나물에 청포묵을 얹었고 아름다운 고명이 있는 국수를 내었던 그녀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떠납니다. “나....나처럼은.... 되지 마!” 이렇게 말했던 그녀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기 때문일까요. 화자역시 가족이 있는 그를 떠납니다.

 

흔히 신경숙 작가에 대해 90년대 문학의 신호탄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80년대가 남성작가의 시대라면 90년대는 신경숙으로 대표되는 여성작가군의 등장을 어떤 평론가는 “오디세우스의 귀환과 페넬로페의 가출‘이라고 비유로 명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신경숙은 세계 대신 내면을 공동체대신 개인을 더듬거리듯 속삭이듯 서정적인 문체로 이 소설 속에서 독립된 주체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여성의 욕망을 표현합니다. 이 소설 속의 화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그의 가족을 버리고 함께 떠나려 하지만 이것을 거부하고 외롭고 서럽게 주체적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여수 밤바다는 아름다웠습니다. 어느 가수 노래처럼 넘실거리는 지평선 위로 아스라이 비치는 고깃배의 불빛이 일렁일렁 하였습니다. 바다로 향하는 거북 형상을 한 그 곳에서 지인의 서러운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바람은 그녀의 뺨을 스쳐가며 위로하였습니다. 아버님의 보낸 슬픔에 젖어 있을 그녀의 어머니가 푸른 솔처럼 건강하고 씩씩하기를 기원하였습니다.

 

바람결에 서늘한 향기가 나고 저녁이면 들리는 벌레 소리가 청량합니다. 가을이 저만치 와 있나 봅니다. 멋진 그를 기다리는 한 주 되십시오.

 

『풍금이 있던 자리』, 신경숙지음, 문학과지성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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