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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제주 ‘신화에서 역사로, 역사에서 신화로’

 

한여름 더위가 맹위를 떨칠수록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 있다. 바로 피서지다. ‘더위를 피하는 장소’란 뜻의 피서지는 사실 이름과 달리 더위를 즐기는 장소인 경우가 많다. 겨울의 해변도 아름답지만 해수욕객이 가득 채운 바다와 백사장은 여름에 더욱 빛을 발하곤 한다. 
 

그런 피서지 가운데 저절로 떠오르는 장소가 있다. 바로 제주도다. 제주의 바다는 검은 현무암이 배경을 만들어 눈이 부실 정도로 흰 백사장이 있고 에메랄드나 코발트 빛깔의 바다는 보는 것만으로도 청량감을 준다. 또 초록이 짙어 검게 보이는 숲은 육지에서는 이미 사라진 원시의 기운을 체험하게 한다. 실제 제주도는 세계자연유산(한라산 일원,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이며 세계지질공원 인증, 생물권보전지역 지정 등 유네스코가 자연을 평가, 인정하는 영역 세 부분에 모두 등재됐다. 그러니 사람들이 자연으로 제주도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주도에는 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유동인구를 고려하면 근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제주도를 채운다. 그러므로 제주도에 사람들이 살게 된 내력, 그러니까 제주도의 역사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신화에서 찾아낸 역사

 

제주 시내는 육지 사람들의 이미지와 달리 무척 혼잡하다. 출퇴근 시간의 러시아워도 만만치 않고 시내 곳곳은 집과 차로 가득차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주차장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런 제주 시내에서 유독 푸른빛이 가득한 곳이 있다. 바로 삼성혈. 민속자연사박물관 옆이다. 입구에는 제주의 상징인 오리지널(?) 돌하르방이 마주 서 있다. 그리고 작은 전시관과 사당을 지나면 신성한 기운이 가득한 세 개의 구멍을 담으로 막아놓은 곳이 있다. 이 세 개의 구멍이 바로 삼성혈(三姓穴/三聖穴)이다. 주변의 숲은 웅장한 곰솔을 비롯해 깊은 산에 들어온 것과 같이 울창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삼성혈은 세 명의 신인(神人)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나온 구멍이다. 제주도에 처음 인간이 살게 된 것을 알려주는 신화인 셈이다. 조금 더 살펴보자. 신인은 사냥을 하며 지냈는데 먼 바다에서 배가 도착하는 것이 보였다. 급히 마중을 가니 멀리 벽랑국에서 여기에 사는 세 신인과 인연을 맺기 위해 세 명의 공주가 타고 왔단다. 그리고 폐백으로 소와 말, 그리고 오곡의 씨앗을 들고 왔다. 
 

신화의 내용은 배필이 멀리서 찾아온다는 점에서 금관가야의 김수로왕 얘기 같기도 하고, 바다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석탈해 신화 같기도 하다. 제주도의 건국 신화라고 할만하다. 여기서 ‘건국’이란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주도는 고려 때 군현이 되기 전까지 독립국으로 행사했다. 그러니 당시까지 제주도는 탐라, 탐모라, 탁라, 또는 주호라 부르던 하나의 나라였다.
 

삼성혈 신화는 여러 모로 흥미롭다. 사실 신화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사실에 근거해 이해하려는 역사에서는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사실 너머에 진실을 품은 이야기로 그 사실을 온전하게 후대에 전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역사는 신화를 가볍게 여기지 않은 편이다. 그렇다면 삼성혈 신화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먼저 땅 속에서 나온 사람이란 모티브는 제주도의 동굴 모습을 안다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육지의 여느 동굴은 산에 올라가야 만날 수 있지만 용암동굴이 많은 제주도는 입구가 평지에 있다. 그러니 동굴에서 사람이 나오는 모습을 본다면 마치 땅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세 신인이 배필을 맞이하기 전 모습은 제주도의 구석기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며 동굴이나 바위그늘에서 생활하던 구석기인이다. 그러다가 외부에서 들어온 문화를 받아들여 목축과 농경이 실시되는 신석기 시대 이후의 모습은 세 신인의 혼례로 표현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신화는 공간적인 상상력을 동원하도록 한다. 성산일출봉 옆 혼인지가 세 공주를 맞이한 곳인데 실제로 거기에는 세 부부가 신방을 차렸다고 하는 ‘신방굴’이 있다. 또 각각 살 곳을 정하기 위해 화살을 쏘았는데 그 장소가 지금 제주시의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이다. 
 

삼성혈 신화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명확하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육지의 여느 신화 못지않다. 우리가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를 역사 이해의 도구로 활용하듯 제주도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이후 사당까지 만들어 놓은 삼성혈. 제주 역사의 시작을 생각하며 찾아볼 만한 곳이다.

 

 

역사가 만든 신화

 

그렇다면 독자적인 제주도의 역사는 언제 육지 역사와 같은 흐름을 갖게 됐을까.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바로 이름이다. 제주를 다른 말로 ‘탐라’라고 한다. ‘탐’은 제주 말로 섬을 뜻하고 ‘라’는 나라의 뜻이 있다. 풀어보면 섬나라쯤 되겠다. 그러니 ‘탐라’란 이름을 유지하던 시기가 독자적인 역사를 꾸려가던 때가 될 것 같다. 물론 고려 숙종10년(1105년)에 탐라군이 설치됐고 의종 때 탐라현이 됐으니 이미 육지의 군과 현이 됐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탐라’란 이름이 남아있으니 아직까지 독자성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충렬왕 때 ‘제주’가 됐다. 육지의 나주며 충주와 같은 이름이 된 것이다. 아마 이쯤 되면 제주도는 특수함보다는 보편성을 요구받게 됐을 것이다.
 

탐라에서 제주로 이름이 바뀐 배경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바로 ‘삼별초의 항쟁’이다. 삼별초는 1271년 제주도로 들어왔다. 1270년 강화도를 떠난 삼별초는 진도에서 여몽연합군에 저항했지만 결국 1273년에 함락되고 말았다. 삼별초가 진도에 머물던 시절, 고려 정부는 물론 삼별초도 제주도에 관심을 갖게 됐고 결국 두 세력은 제주도 장악을 두고 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삼별초의 승리. 결국 진도가 함락되자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는 다시 제주도로 들어왔다. 그리고 2년 반 동안 저항을 하다가 결국 여몽연합군에게 함락당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몽골은 제주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쿠빌라이(원 세조)가 계획하던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로서 갖는 의미, 그리고 말을 기르는 목마장으로 의미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결국 육지의 여느 지역(동녕부를 제외한)과 달리 제주도는 몽골의 직할령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제주도는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원이 망하자 고려는 무력을 동원해 제주도에 있던 목호(牧胡)를 몰아내고 다시 찾아냈다. 이후 탐라란 이름 대신 제주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을 갖게 됐다. 
 

육지에서는 고려시대 여러 사건 가운데 하나인 ‘삼별초의 항쟁’이지만 제주도에서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큰 사건이었다. 그 가운데 중심이 되는 곳이 애월에 있는 항파두리다. 항은 항아리를 뜻하고 파두리는 바두리란 제주도 말로 입구를 뜻한다. 항아리 입구처럼 둥글게 쌓은 토성으로 둘레가 6km에 이른다. 그 중심에는 750m정도의 석성을 쌓았다. 항파두리 안에는 1970년대에 세운 기념관 등이 있다. 항파두리는 널리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토성이 보이는 정자에 올라가 보면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장소인지, 멋진 풍광이 증명해 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있다. 삼별초를 이끌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김통정은 제주에서 신과 같은 인물이 된다. 김통정의 어머니는 지렁이와 사통해 김통정을 낳았고, 김통정이 재를 뿌려 제주도를 어둠에 빠뜨리기도 한다. 김통정 군은 역사 내용과 달리 신화로 살아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제주도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던 삼별초의 항쟁, 그 중심에 있던 김통정은 한편으로 제주의 독자성을 지키는 마지막 인물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제주도에서는 역사가 그 진실을 전할 방법으로 신화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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