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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공부’ 가 아닌‘즐거운 주제'

통상적으로 우리에게 교육이란 ‘많은 지식을 머리에 채워서 평가 점수를 잘 받는 것’이라고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핀란드와 독일 교육은 달랐다. 일단 교육의 주체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었고,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심이었다. 즉, 교육이란 학생 스스로 좋아하는 것, 행복한 순간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의 예는 과학의 역사에서도 잘 찾아볼 수 있다.


창조적 파괴, 과학의 영역을 무한대로 넓히다

16세 소년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빛을 같은 속도로 따라가면 빛은 어떻게 보일까? 당연히 빛도 정지하여 보일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뉴턴 역학으로는 가능한 ‘멈춤 빛’은 진동하지 않는 전자기파를 의미하기 때문에, 명백하게 전자기학(電磁氣學)과는 충돌한다. 그는 평범한 일상생활이 아닌 극한 상황까 지 설정하여 두 이론 간의 대칭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1905년, 26세가 된 아인슈타인은 수많은 실패와 고뇌 속에서 소년 시절에 품었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된다. ‘관측자의 운동과는 관계없이 모든 관찰자 에게 빛의 속도가 일정하게 관찰된다’는 대담한 가정이다. 관찰자의 운동과 관계없이 일정한 값으로 빛의 속도가 측정되기 위해서는 운동하는 시계의 시간은 느려지고, 측정자는 이동 방향으로 축소된다는 결과를 도출한다. 또한 전자파인 빛의 속도를 돌파할 수 없기에 질량을 가진 모든 운동하는 사물의 질량은 증가 하여, 결국 그 유명한 ‘질량은 에너지와 등가’라는 법칙이 나온 것이다.


그 당시 거의 동일한 업적을 이룬 로렌츠(Lorentz)와 피츠제럴드(FitzGerald) 는 에테르를 구하기 위해 전자기이론만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젊은 아인슈타인보다 훨씬 뛰어난 수학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법칙의 적용 범위를 영 역의 경계상황까지 끌고 가는 ‘사고실험’을 수반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더 넓은 영역인 특수 상대성이론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뚜렷한 목표 없이 이미 규격화된 이전의 이론들을 비판 없이 무조건 학습하라고 하지는 않는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현재 중·고등학교의 기초과학교육은 객관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기존의 법칙들을 암기하 고 적용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다. 예를 들면 오늘날 대부분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는 과학을 비역사적인 방식으로 가르친다. 교과서에는 각 자연과학분야의 주요 아이디어들이 최대한 간편한 형태로 제시될 뿐, 그 발견이 있기까지의 우여곡절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서양 과학의 뿌리가 되는 플라톤 학파의 필연성 논리는 ‘첫 번째 상위체계는 두 번째 하위체계를 전제로 한다’이다. 과학의 체계가 역사적 흐름 속에서 각 학문의 체계를 형성해 왔음을 의미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혁명적이라 해도 어느 시대의 과학 사상사 흐름을 완전히 삭제한다면 지금의 과학적 세계관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창조적 사고’의 부화 기간은 길다

우리는 실제적인 창의력과 갈등하는 경우 학교제도만 탓하곤 한다. ‘창조적 파괴와 구성’ 기능을 가진 아인슈타인의 창의적 사고는 적어도 10년 이상의 부화 기간을 필요로 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특허국 하위 공무원 시절의 업무를 통해 누구나 동일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시간의 절대성과 동시성을 의심하게 됐다. 그의 사고는 소년 시절과 대학 생활을 거쳐, 사회생활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를 보면, 한국의 학업 순위는 계속 하락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은 1위였는데 2015년에는 5 위 아래로 밀렸다. 최상위권 비율이 감소한 반면, 기초학력에 미달하는 최하위권 비율은 증가했고 학생의 흥미도는 OECD 평균보다 다소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PISA 2015 Results, OECD, 2016.12.6)


특히 한국 학생들의 과학에 대한 흥미는 학년이 갈수록 점점 떨어진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대학에서도 교양과정에서 인문사회계 학생들은 물론 이공계 학생들조차 과학을 논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흥미 있는 과학적 사실을 소개해도 감탄보다는 세파에 시달린 어른들처럼 부질없는 것으로 여긴다.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다. 대학에 들어온 이상 ‘주어진 의무’로 어쩔 수 없이 과학 학습에 임할 뿐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과학적 태도는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우리는 고대 신화의 시시포스에게 부여한 형벌처럼 아무런 의미 없이 학생들에게 똑같은 바위를 계속해서 굴리게 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묻고 성찰해야 한다. 또한 학생들의 흥미를 향상시키기 위해 단기적이고 표면적인 방법으로만 이끌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학교육은 경쟁은 있지만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선택과 필요에 의해 물흐르 듯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최근의 과학교육을 보면 무작정 실험·실습을 하고 교실 토론을 하면 ‘구성주의적 사고’가 생겨나고, 갑자기 과학자처럼 태도 변화가 나타날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과학을 잘 응용할 수 있는 단기적인 학습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것이 평생 공부를 해도 즐거운 주제’ 라는 사실을 인식시켜주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단순 지식과 시험 점수만 높은 소위 만들어진 영재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재료들을 즐겁게 굴려 언덕 위로 올리는 참된 인재가 우리 기초과학교육에 필요하다.


과학적 소양, 세상을 천연색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

또한 과학교육은 장기적으로 계통적인 과학 사상사 속에서 시대정신에 알맞은 과학적 세계관 교육이 이뤄져야 기초과학교육이 산다. 왜냐하면 과학 사상사와 과학적 세계관에는 근대의 양적세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 는 현대의 다양한 질적인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과학의 시대에 과학적 소양이 부족하다면 마치 세상을 천연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흑백으로 보는 것과 같다. 때문에 기초과학적 소양은 문·이과 구분을 떠나서 민주시민으로서 공통적으로 가져야 된다. 우리나라 과학교육도 과학 시대의 소양교육인 기초과학교육과정을 축소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적어도 이전 방식의 기초과학교육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