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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칼럼

잊을 수 없는 버클리대학 조교 '쇼잉'



딱 마주쳤다. 그녀는 사회학과 사무실에서 나오는 중이었고, 나는 졸업 상담을 하러 크리스티의 사무실로 가는 중이었다. 너무 가까이에서 마주쳤기 때문에 피해갈 방법이 없었다. 

짧은 순간 그녀는 나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애써 웃으려 했지만 부자연스러워 가볍게 '하이'하고 인사만 했다. 짧은 순간 그녀도 눈치를 챘는지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다소 힘든 표정으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이다. 그녀와 이런 식으로 인사하고 헤어지기는.

쇼잉, 그녀는 장학생들 킬러 학과인 브로웨이 교수의 Sociology 101 B의 우리 섹션 조교로 왔다. Sociology 101 클래스는 학생이 수 백 명에 이르기 때문에 교수가 일일이 관리를 할 수가 없어 조교를 두어 20여명씩 관리를 하게 한다. 조교들은 교수의 강의에 대한 보충 강의를 일주일에 두 번하고 학생들이 쓴 페이퍼나 시험에 대한 성적을 매기게 된다.

대부분의 사회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이 과목에서 상당한 점수를 잃게 된다. 특히 이 과목을 강의하는 교수는 세계 사회학회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권위있는 사람이어서 자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점수를 짜게 주기로 유명하다. 

한 섹션에서 보통 한 두 명 A-를 받고 나머지는 모두 B+ 이하를 주도록 조교들에게 지시한다. 그렇지만 다른 교수에 비해 낙제 점수는 거의 주지 않는다. 이런 클래스가 장학생들에게는 제일 힘든 클래스다. 

버클리 대학의 사회학과는 전 미국에서 제일 우수한 학과로 선정되었고, 그런 만큼 학생들의 수준도 세계 최고급이다. 그런 학생들 사이에서 A-를 맞는 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최고의 성적을 자랑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무너진다. 다른 학과는 보통 4학점인 반면 이 학과는 두 학기에 걸쳐 10학점이나 된다. 점수 좋은 학생들은 이 클래스에서 죽도록 긴장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클래스의 조교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특히 점수 좋은 학생들에게는.

지난 학기 Sociology 101 A 과목 때 내가 듣고 있던 섹션의 조교는 점수를 매긴 페이퍼를 들고 클래스에 들어와서 목까지 차오른 울음을 참아가며 말했다. 

"너희들 보다 내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만 알아 줘."
그녀의 얼굴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빛이 역력했다. 다 비슷한 페이퍼들, 50여 가지나 되는 조건 억지로 채워가며 점수 깎아 갈 때의 비통한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만큼 힘든 학과인 것이다.

쇼잉은 사회학과로는 드물게 중국에서 온 조교다. 미국 문화에 익숙해야만 가능한 사회학과 조교로 뽑혀 올 정도면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 인지는 짐작이 간다. 그러나 중국에서 성장한 그녀의 영어 실력은 까다로운 사회학과 강의를 다 감당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학생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땀을 삐질삐질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학생들 사이에 노골적으로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나와 같은 버클리 대학 주택 단지에 살기 때문에 가끔씩 같은 버스로 돌아오기도 했다.

힘든 과정 마치고 돌아오는 그녀의 얼굴은 거의 매일 상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나는 그녀를 위로해 주곤 했다. 나의 위로가 힘이 되어 다소 밝은 표정으로 돌아올 때마다 한 어려운 사람의 짐을 가볍게 해 주었다는 사실이 적잖이 기뻤다. '꼭 이겨내라'는 내 말이 힘이 된다며 버스를 내리는 그녀는 버스에 오를 때와는 달리 발걸음이 가벼워져 있곤 했다.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대부분 그냥 그렇게 지내다 헤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이나 교수들 중에 대부분은 학교에 있는 동안만 만나고 별 의미없이 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르다. 많은 부분에 생각이 같고 알게 모르게 통하는 것이 많았다. 오래 친구해도 좋을 만큼.

그 힘든 Sociology 101 B를 수강하는 동안 나에게는 적잖은 외적인 어려움이 겹쳤다. 아르바이트와 여름 학기 미국 상원 의원 인턴 준비, 그리고 13학점이 풀타임인 한 학기 학점에 조기 졸업하려는 욕심에 18학점이나 신청해 놓은 상태(보통 장애인들은 한 학기에 9학점 정도 수강)에서의 공부도 죽도록 어려운데 거기다 삼출성 중이염으로 두 달 반을 제대로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그 까다로운 Sociology 101 B를 성공적으로 해낸 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학점을 줄이는 것, 상원 인턴, 혹은 신문사 리포터,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계속 무리를 했고, 쉬어야 낫는다는 중이염은 더 심해져만 갔다. 

휠체어는 왜 그리고 고장이 잦던지. 그런 상황에서도 쉴새 없이 공부해 성적은 무척 잘 나왔다. 내 성적과 사정, 그리고 내가 미래에 해야 할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쇼잉은 필사적이다 싶을 만큼 열심히 나를 도와주었다.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잘 듣지 못한 부분을 이해시키기 위해 일일이 도표를 그려서 다음 강의에 가져다 주고 수많은 설명을 이메일을 통해 보내 주기도 했다.

"말만해, 네가 공부에 필요한 것 다 해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가 그렇게 다정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두 번의 에세이 시험이 있었다. 첫 번째는 A-를 받았고 두 번째는 B+였다. 참여와 마지막 구두 시험이 두 번의 시험과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잘하면 A도 바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데다 내가 말할 때마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머리 안에서만 뱅뱅 돌아 말하기 조차 힘들어 토론에는 열심히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런 사정을 쇼잉은 너무 잘 안다. 귀의 상태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쇼잉이 그 정도는 참작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구두 시험은 모든 학생들이 긴장을 했다. 어떤 학생은 하도 긴장해서 교통사고도 일으켰다고 하고, 어떤 학생은 먹은 것 소화를 못시킬 정도라고 했다. 

나는 그네들 보다 더 걱정이 됐다. 안 들리는 귀 때문에 강의를 충분히 소화를 못 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민감한 구두 시험을 친다는 것은 적잖은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사정을 안 쇼잉은 내게 마지막 혜택을 주었다. 페이퍼로 해 와도 된다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특혜를 받는 다는 것이 싫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그녀는 몹시 걱정스런 눈빛으로 페이퍼를 종용했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녀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나는 때로 이런 쓸 데 없는 고집을 부린다. 장애인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며 클래스에서 치르는 시험을 집에서 해 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데도 거절했고, 장애로 인해 쓰는 속도가 느리니까 시간을 더 가지라고 해도 특별히 힘든 것이 아니면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곤 했다.

힘든 구두 시험을 마치고 나왔을 때는 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 학교에서 사회 학도로서 어려운 시험은 다 마친 것이다. 다소 힘들기는 했지만 그리 나쁜 점수는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 방학 기간 중 워싱턴 디시에서 인터넷을 통해서 나온 Sociology 101 B 점수를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B였다. 버클리에서 받은 최악의 점수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그녀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과 적잖이 데미지를 입은 평점이 나를 정신 못차리게 했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성적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잘 안다. 어려운 형편에 장학금에 의존해야 하고, 앞으로 내가 계획하고 나가려는 일에 있어 점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크다는 것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가 내게 줄 수 있는 최악의 점수를 주었다. 강의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다소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바람일 뿐이었다.

워싱턴에서 여름 학기 인턴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내 학사 관리를 하는 상담원이 학점 정정 신청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다시 그녀를 대한 다는 것이 죽도록 싫어서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나의 성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래, 그 똑똑한 본토 애들 속에서 이 정도 맞은 것도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성적에는 적응을 했지만, 쇼잉에 대한 앙금은 가라앉지 않았다.

빨간 단풍이 고운 지난 가을 어느 날, 상원 인턴으로 가느라 여름 학기에 듣지 못해 지연된 두 과목을 듣고 돌아오던 늦은 오후, 버스에 올라 눈을 들어 보니 쇼잉이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그 날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무언가 꼭 해야 될 말이 있기라도 한 듯.

"내가 페이퍼로 내라고 했잖아."
그 짧은 말 한마디에는 참으로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녀의 애절하다 시피 진지한 표정은 일순간에 내 마음에 일었던 앙금을 씻어 냈다.

"너는 페이퍼에 강하잖아. 그래서 내가 그렇게 졸랐는데……."
나는 그녀를 향해 오랜만에 밝은 웃음을 건넸다. 

"괜찮아. 지금은 그 정도 맞은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게 여간 힘든 클래스라야지."
그녀의 표정도 참으로 맑았다. 학교 주변을 도는 52L 버스 밖으로 단풍이 참으로 고왔다. 그렇게 버클리 대학 생활을 마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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