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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선생님, 제가 누구인지 아세요?“

수업 일수 5일을 남겨놓고 제자가 등교한 이유를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알게 되다

토요일 아침.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깨었다. 그런데 액정 위에 찍힌 전화번호가 낯설었다. 평소 늘 수면 부족으로 토요일만큼 그 누구로부터 수면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중년의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상대방은 ○회 졸업생이라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상대방의 뜬금없는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잠깐의 휴지(休止)가 있자, 제자는 학창시절 몇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그런데 졸업한 지 거의 20여 년이 된 제자의 이름을 기억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제자와 통화 중, 한 장의 사진이 전달됐다. 내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지 않자 조금이나마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제자는 한 장의 사진을 찍어 보낸 듯했다. 제자가 보낸 사진 속에는 두 장의 빛바랜 손편지가 있었다. 그런데 그 편지지 위에 쓰인 필체가 왠지 낯익어 보였다. 그 편지는 다름 아닌 제자가 고3일 때 내가 직접 쓴 편지였다. 그제야 전화를 건 제자가 누구인지 조금이나마 감(感)을 잡을 수가 있었다. 사실 제자가 보낸 사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도무지 제자의 이름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문득 제자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수업 일수가 부족해 하마터면 졸업을 못 할 뻔한 제자였기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자의 이름은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학창시절, 제자는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 해 결석을 자주 했다. 제자는 개학하여 딱 하루만 출석했을 뿐, 줄곧 결석했다. 그리고 가끔 학교에 나오긴 했으나 무단 조퇴가 일쑤였다.


제자가 결석할 때마다, 담임으로서 제자와 연락을 취할 방법은 전화뿐이었다. 그러나 전화를 할 때마다 제자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편지였다. 방과 후, 학교에 남아 제자에게 하고픈 이야기를 3일에 한 번씩 편지를 썼다.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할 이유와 유명인이 남긴 글 그리고 쓸 내용이 없을 때는 그 날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 등을 편지에 썼다. 그런데 편지에 빠트리지 않고 쓴 것이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남아있는 수업일수였다. 그리고 쓴 편지는 퇴근길, 집에서 가까운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다.


그러기를 약 3개월이 지났을까? 녀석은 수업일수 5일을 남겨놓고 학교에 출석했다. 그 이후, 녀석은 가끔 지각은 했으나 결석 한 번 하지 않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할 때까지 녀석은 학교에 나오게 된 이유를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졸업 후, 녀석은 내게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런 녀석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녀석이 내게 전화한 것이었다. 어느 날 문득 책상을 정리하다 학창시절 내가 써준 편지를 발견, 내 생각에 전화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내 편지 덕분에 졸업하게 됐다며 고마워했다. 그리고 학창시절 내가 써준 편지를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가끔 내 생각이 날 때마다 서랍 속에서 편지를 꺼내 읽어본다고 했다. 이제야 녀석이 수업일수 5일을 남겨놓고 등교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모든 소통이 SNS로 이뤄지고 있는 디지털시대, 아이들로부터 손편지를 받아본 지도 오래다. 나 또한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본 지도 오래된 것 같다. 그래서일까? 사제간 추억이 퇴색해져 가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든다. 제자와 통화를 한 뒤, 무언가 느껴진 것이 있었다. 가끔, 휴대폰과 컴퓨터를 끄고 보고픈 제자에게 편지 쓰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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