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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공자(4) - 인간 성숙의 길, 자기객관화

임건순의 동양의 스승들 - 사상가, 학자 이전에 스승, 교육자였던 사람들의 이야기



누구나 아는 답

군자는 자기를 헤아리는 법도로 곧은 먹줄을 사용하지만 남을 대하는 법도로 굽은 도지개(틈이 가거나 뒤틀린 활을 바로잡는 틀)를 쓴다. 자기를 먹줄 같은 곧은 법도로 헤아리기 때문에 충분히 천하의 법도가 될 수 있다. 타인을 굽은 법도로 헤아리기 때문에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고 여러 사람을 움직여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 (순자 비상편)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하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하라. (명심보감)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나쁜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요? 답은 매우 쉬울지도 모릅니다. 문화와 국적과 시대를 막론하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르는 기준으로 누구든 동의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사람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한 사람일 것입니다. 나쁜 사람은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 엄격한 사람일 것이고요. 누구나 알고 너무도 뻔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정말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하기가 말처럼 쉬울까요? 아닐 것입니다. 명심보감대로 나에게는 추상, 타인에게는 춘풍이기는커녕 나에게는 춘풍, 타인에게는 추상으로 살기 쉬운데 왜 그럴까요?

단순히 인간의 본능이고 인지상정이랄 수 있겠지만, 인간은 늘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못하고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사태를 바라보기 쉽습니다. 늘 주관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좋은 사람이 되려면 즉 나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해지려면 결국 자기객관화에 능해야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자기객관화 참 힘들지요. 본능, 인지상정과 역행하는지라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성숙을 위해선 반드시 지향해야 할 목표이고, 인간의 성숙을 옆에서 도와야 할 교육자라면 늘 일깨워줘야 할 바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객관화

인간의 성숙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객관화일 것입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소위 말해 철이 드는 것일 테고, 그것이 어쩌면 궁극적인 인간 성장의 나침반일 수 있습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타인에게는 관대하게 대하기라는 것도 다 자기객관화와 연관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안 그래도 논어를 읽다 보면 자기객관화의 맥락으로 읽을 수 있고 또 읽어야 하는 부분들이 적잖이 등장합니다.

“자신에게 엄하게 책망하고 남에 대해서는 가볍게 한다면 원망을 멀리할 수 있을 것이다.” (위령공편 14장)

번지가 무우 아래에서 공자를 모시고 있을 때 말했다. 
“덕을 높이고 사특함을 다스리며 미혹을 변별하는 방법을 감히 여쭙니다.”
공자가 말했다.
“좋구나, 그 질문이여. 해야 할 일을 먼저 한 다음에 얻는 것이 다음으로 덕을 높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악함을 다스리고 남의 악함을 다스리지 않는 것이 간특함을 닦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루아침의 분노가 자신을 잊어버려 그 결과가 부모에게 미치도록 하는 것이 미혹됨이 아니겠는가?” (안연편 21장)

자신을 엄히 책망하고 남에 대해서는 가볍게 하고, 자신의 악함을 다스리고 남의 악함을 다스리지 말라고, 즉 자신의 악함을 공격하고 타인의 악함을 공격하지 말라고 한 것이 바로 뭐겠습니까? 나에겐 엄격, 타인에겐 관대한 삶의 자세를 가지려고 하는 것이며 자기객관화를 위한 연습이 아닐까요?

내 잘못은 보기 힘들고 남의 잘못만 내 눈에 들어오기 쉬운 게 인간인데 내 잘못을 보려고 하고 그것을 엄히 다스리려고 해야지요, 나를 객관화하려면요. 자기객관화의 시작과 끝이 그것 아닐까요? 내 잘못을 보려고 하고 내 결점을 직시하려고 하는 것. 그래야 인간의 성숙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육자라면 늘 그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내 잘못과 결점을 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성찰일 것입니다. 성찰은 자기객관화를 위해 늘 필요한 것이지요. 안 그래도 증자가 말했습니다.

증자가 말하기를 “나는 하루 세 번이나 자신에 대해 반성한다, 남을 위해 일을 함에 성의를 다했는가? 벗과 사귐에 신의를 다했는가?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것을 남에게 가르치지 않았는가?”

증자의 말인데 공자도 성찰과 반성을 말했지요,이인편에서요. 유명한 말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진 사람을 보면 그와 같이 되려고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이를 보면 스스로 마음속에서 반성해야 한다.”

어진 이를 보면 배우려고 해야 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혹시 나도 그와 같은 결점이 있지 않나 돌아보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죠. 술이편에서 공자가 한 말도 아주 유명한데, 결국 자기객관화를 위해 나를 돌아보는 연습과 훈련을 하라는 말이라 봅니다.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좋은 면을 골라 그것을 따르고 좋지 않은 것에서는 나의 허물을 고친다.”

공자의 사무(四無)

공자는 사사로운 뜻을 내세우지 않았고(毋意),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 없었으며(毋必), 한곳에 고착되는 일이 없었고(毋固),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없었다(毋我).

공자는 자신의 잘못과 결점, 허물을 늘 보려고 하는 것만으로 자기객관화가 가능하다고 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위의 네 가지와 절연하라고 한 것 같습니다. 공자는 자기만의 우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독단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이 네 가지 폐단이 없게 늘 노력했던 거 같습니다. 공자는 왜 자기중심적 관념과 사고에 빠지려는 인간 본연의 습성을 늘 지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을까요? 그래야 자기객관화를 위한 역량과 시야가 생길 수 있고, 앞서 말한 것처럼 자기객관화가 돼서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여기서 그런 질문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타인에게 관대한 것은 무엇일까요? 무조건 용서해주고 너그럽게 헤아리고 옹호해주는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결과만 보지 않고 과정을 보고, 원래 저런 사람이라 그렇다고 단정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삶의 맥락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은 타인을 볼 때 늘 결과만 봅니다. 보통 자신이 잘못했을 경우에는 왜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됐는지 과정과 맥락에 대해서 구구절절 이야기할 준비가 돼 있지만, 타인이 같은 잘못을 했을 때에는 마구 공격할 준비가 돼 있는 게 인간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했을 때는 결과만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단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어렵게 이야기하자면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단점은 환경 귀인으로 설명하고 타인의 행동은 속성 귀인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의 단점과 허물, 최근의 잘못은 내가 불우한 환경에서 컸거나 최근에 스트레스가 심해서 혹은 일이 잘 안 풀려서 그렇다고 하고, 타인이 잘못한 경우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단정하거나 근본이 어째서 그렇다고 하거나 심지어 출신이 어디라 그렇다고 단정하기도 하는데 단순히 타인에게 엄격한 정도를 넘어 잔인하기까지 하지요.

하지만 타인의 잘못과 단점도 말이죠, 나의 경우처럼 맥락과 과정을 보려고 하고 환경 귀인으로 설명,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타인에게 관대한 것이 아닐까요? 타인에게 관대한 것은 우선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텐데 그러려면 과정과 맥락을 봐야겠지요. 그리고 타인의 과정과 맥락을 보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나의 단점을 보려고 노력하고, 자기객관화를 위해 노력했을 때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고 하고, 또 왜 실수를 했고 이런 결점을 가졌는지 돌아보려고 하면, 타인의 결점과 잘못을 볼 때 바로 욕하고 섣불리 공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떤 원인과 배경이 있었기에 그런 게 아닌가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보게 될 것입니다. 자기객관화를 해야 타인을 맥락과 과정으로 볼 수 있고 타인에게 관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좋은 사람,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고요.

사람 제대로 미워합시다

“오직 어진 자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능히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자공이 말하기를 “군자도 미워하는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미워하는 것이 있느니라. 남의 잘못을 떠들어대는 자를 미워하며,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비방하는 자를 미워하고, 용기만 있을 뿐 예의가 없는 자를 미워하며, 과감하면서도 앞뒤가 막힌 자를 미워한다.”
이윽고 말씀하시기를 “자공아,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느냐?”
“남의 말을 가로채 아는 척하는 자를 미워하고, 불손한 것을 용기라고 하는 자를 미워하며, 남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을 정직하다고 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공자도 미워함을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군자는 무조건 사람을 감싸주는 무골호인이 아닙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군자도 사람이고, 사람은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미워해야 할 대상을 최소화해야 할 것이며, 미워해도 제대로 미워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봐야 할까요? 역시 자신을 객관화해봐야 할 것입니다. 타인을 맥락과 과정으로 보고, 속성 귀인이 아니라 환경 귀인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하려고 하고요. 오직 어진 자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능히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고 공자가 말한 것이 과거에는 참 이해가 안 됐습니다. ‘아니, 군자도 남을 미워하나’ 싶었고, ‘사람 미워하는데 따로 무슨 자격이 필요한가’ 싶었지요. 하지만 이런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질고 타인에게 관대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군자는 타인을 환경 귀인으로 접근해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고 난 뒤에야 누굴 미워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그게 바로 사람을 제대로 미워하고 싫어하는 법이라는 뜻 같습니다. 공자는 자기객관화를 말했기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누구누구 너무 싫어요”, “정말 밉습니다” 제자나 자식이 와서 이렇게 말할 때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평소에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만을 미워해야 하고, 어떻게 미워해야 하며, 미워하기 전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고, 미워하는 대상을 좁히고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해야 할 것이고, 그 답을 위한 고민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역시 나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자기객관화를 이야기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미워하는 사람의 범위도 좁힐 수 있고 제대로 미워할 수 있으니까요.

여러 장에서 자기객관화를 말한 공자, 그는 천생 교육자고 스승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의 본능상 자기객관화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지만 진정한 성숙과 성장을 원한다면 공자가 말한 대로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기객관화를 위해 연습 또 연습해야겠지요. 노력에 노력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