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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동족상잔의 사상선택

동족상잔이라는 말을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dog-eat-dog’이다. 개가 개를 잡아먹는다는 뜻이다. 우리말 사전에는 ‘같은 겨레나 혈족끼리 서로 싸우고 해치는 일’로 나와 있다. 6.25 전쟁이 바로 이러한 형국이었다.
통일의 미명 하에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 이 전쟁의 와중에는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사상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다.

사상 선택의 강요를 피하려면 자신이 원하는 진영으로 떠나야 했다. 정든 집과 고향, 친척과 형제를 멀리하고 피난의 행렬에 들어서야 했다. 도망자의 신분이 된 것이다. 그것도 눈에 띄지 않는 시간을 이용하여 말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거짓으로 지지 의사를 나타내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인, 지주, 공무원 등은 사상 강요가 막히지 않는 계층은 감시를 당해야 했다. 전쟁이 극심하여 진영이 자주 바꿀 때는 손바닥 조사까지 당해 궂은살이 있고 없는 정도로 사상 분류를 했다. 가족 중 한둘이 남측 진영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더욱 심한 감시를 당했다.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사상 선택 강요는 우리 군에서도 일어났다. 사상 강요의 피해자가 또 다른 사상 강요의 피해자를 만든 것이다. 예를 들어 빨치산에 가담한 집안, 의용군에 가담한 사람, 적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 등은 우리 측에서 감시와 재판을 했다.

이러한 일은 전쟁 초기부터 일어났다. 어느 날 갑자기 북의 군대(인민군)가 들어왔다. 사람들은 원하든 원치않던 북의 기를 들고 나가거나 박수로 환영해야 했다. 그리고 사상 강요 교육을 받아야 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인민군을 위한 전쟁 물자 수송과 전투에 동원되어야 했다.

이런 일은 우리 군대(유엔군)가 서울이나 평양을 수복했을 때도 비슷했다. 그러나 거기는 진심이라는 표정의 차이가 있었다.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 진정으로 고맙다고 느끼는 마음이다. 그것은 1.4 후퇴 때 우리 군을 따라 나온 피난의 행렬의 수가 말해준다. 그런데 북은 전쟁을 피해 떠나는 피난의 행렬에도 위장한 정찰병을 보내 군사 정보를 빼앗거나 이동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유엔군은 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며 때로는 전세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주는 숨어있는 북의 정찰병과 북군을 막기 위해 싸우다 피난민까지 다치게 만들었다.

6.25로 인하여 우리 국민은 몇 번이나 사상 선택을 강요받으며 살아야 했다. 특히 북의 치하로 되었을 때 사상 선택 강요는 극심했다.

남한 땅에 들어온 북의 군대는 주민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심어주기에 애썼다. 그리고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사상 선택 강요를 하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 학교나 마을회관 (때로 마을에서 가장 넓은 공터)에 주민을 불러내어 김일성 노래와 충성맹세 구호, 전쟁 구호를 외우도록 했다. 북의 사상 교육은 민족을 둘로 나누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남조선 동무들, 수고 많습네다. 우리 북조선은 미 제국주의들과 친일 이승만 앞잡이들에게 시달리는 동무들을 해방시켜주기 위해 왔습네다.”

이른바 남조선 해방전쟁의 취지를 설명하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두 계급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주로 머슴, 때로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지식은)을 앞잡이로 세우고 지주들은 일제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매판자본으로 분류하여 자산 압류를 하였다.

이들은 자아비판이라는 형식으로 자신들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은 종교인, 지식인, 지주들에게 인민재판을 수시로 벌였다.

인민재판이란 북조선에서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니다. 마오쩌둥이 문화혁명을 일으킬 때부터 인민에 의한 재판이 시작이다. 기소 대상은 지주(부르주아), 지주에 빌붙어 인민을 세뇌시키고 풍기를 어지럽혔다는 논리로 지식인, 자본가를 심판했으며 공산당원(내무서원)이 참관하여 배심원이 되어 판결을 내리는 재판이다.

그런데 누구나 고발이 가능하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판결을 이끌어 내면 그만이기 때문에 결과가 과격했다(결과에 따라 총알이 아까워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까지 하였다고 한다). 때로는 재판 결과를 정해놓고, 재판 당일에는 선동하는 사람(옳소 부대)까지 동원해서 공산당이 정한 사람이 죽도록 조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희생자가 더욱 많았다.

6.25는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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