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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김일성을 놀라게 만든 사건

6.25 전쟁 초기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겠다는 사실은 한국군에게는 전쟁 의지를 꺾는 큰 사건임에 틀림없다. 생전 처음 보는 쇳덩어리 괴물(T34 전차)의 입에서 으르렁대는 소리와 뿜어 나오는 불기둥을 본 사람들은 놀라움의 극치였을 것이다.
그것은 전투 의욕을 꺾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충격은 시간을 두고 완화되어 현실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군에게 방어 의지를 만든 것이다.

서울을 차지한 북한군은 3일이나 머물렀다. 서울에서 3일을 지체하지 않았더라면 6.25는 오늘날의 결과와는 판이하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준 개전 초 3일은 미군 중심의 서부전선 구축과 낙동강을 경계로 하는 지역 방어망을 구축하는데 부족함이 크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일본에 진주한 미군 극동사령부에서 한반도로 무기와 물자를 운반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국제연합 회원국의 협조를 끌어내어 참전하게 만드는 시간이 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군은 남쪽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소련제 탱크 때문이다.
한국전쟁 참전 입장을 결정한 미국의 입장에는 북의 남침 속도를 줄여야 하는 숙제를 떠안았다. 북의 남침 속도를 줄이는 문제는 북의 탱크를 저지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서울 무혈입성으로 들떠 있던 김일성 군대, 그러나 서울을 벗어났을 때 김일성을 놀라게 만든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건은 바로 오산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차지한 김일성은 한국전쟁에 미국은 있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남한의 정부수립과 함께 미군이 철수한 사건, 애치슨라인이 미군 불개입에 대한 믿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수도 서울까지 차지하였으니 김일성의 믿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런데 미국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전개될 한국전쟁에 먹구름이 몰려든다는 것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철수한지 1년이 채 안되어 이런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는 예측 못했다. 북의 음모를 눈치재지 못했으며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으로 발생한 한국전쟁,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국제적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일본에 주둔한 스미스부대를 파병하였다. 그러니까 스미스부대는 한국전쟁에 개입한 최초의 미군 선발대다. 스미스부대는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미8군 제24사단 소속 1개 대대의 특수부대로 7월 1일 북의 군대가 서울을 벗어날 무렵, 부산에 도착하여 기차로 부대이동을 하여 오산과 평택에 1개 중대씩 배치하고 북의 탱크를 없애는 특수부대로 편성되었다.
7월 5일 스미스부대는 오산의 죽미령에서 북의 군대와 조우하였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스미스부대는 소련제 탱크(T 34 전차)에 맞서 대전차 화기로 2시간 동안 교전하였으나 540명 가운데 150명이 전사하고 78명이 행방불명이 된 상태로 천안까지 철수하였다. 그렇지만 이 전투는 한미연합전선 구축의 첫 단추가 되었고 미군이 개입을 북에게 알려 며칠 동안이나마 침략을 중단하게 만들었다.

뒤이어 워커 중장이 휘하의 미8군 24사단 본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지만 북한군을 막아내는 일은 손바닥으로 강물을 막는 격이었다. 한미연합군은 참담한 패배만 맛보고 후퇴만 거듭했다. 한미연합군은 어쩔 수 없이 대구지역 낙동강을 경계로 하는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6.25 40일 만에 있었던 일이다.
북한군은 낙동강만 건너면 그들이 원하는 통일을 얻을 수 있었다. 북의 공세는 날로 거세져서 한미연합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당시 낙동강 전투를 지휘하는 사람은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었다.
워커 장군은 미국 포병 대대로 하여금 낙동강 너머 적을 퇴치하라고 공격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이 가져 온 최신 무기만 빼앗기고 도망치는 일까지 생겼다. 낙동강을 경계로 고지의 주인이 10번씩이나 바뀌는 격렬한 전쟁은 계속되었다.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낙동강 물이 핏빛으로 물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러나 8월 중순이 넘어서자 프랑스, 터키, 태국, 이디오피아,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세계 여러 나라 지원군이 속속 도착하였다. 한미연합군이 유엔군(국제연합군)으로 바꾼 것이다. 워커 중장이 걱정하던 병력 부족 문제도 해결되어 낙동강 전선은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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