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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6.25 발생 당시 한국에 미군이 있었을까?

오래 전 전교조 선생님이 한국전쟁을 가르치는 수업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동영상에는 한국전쟁(6.25)은 미군이 유발시켜 발생했으며 미군 개입에 의한 우리 국민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라고 가르쳐 잘못하면 북침 전쟁이라는 인식까지 심어줄까 염려되어 잊혀져가는 6.25에 대해 이 글을 쓴다.


먼저 6.25가 발생했을 당시 한국에는 미군이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대답은 우리 땅에 미군이 한명도 없었다.
미군이 없는 한국 땅에는 좌와 우로 나눠 혼란이 극에 달했다. 우리 땅에는 이전에 없던 38선이라는 경계선이 생겨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국경의식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남북분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북진통일까지 주장하여 미국과 대립각을 세웠다.

2차 세계대전의 산물로 얻어진 주권은 자주성을 침해받으며 남북을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주권 선택 문제도 모스크바 삼상회담, 미소공동위원회 등 대립각만 세워 정치적 혼란과 군사적이 충돌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주권 문제는 남과 북이 갈린 채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여 별개의 정부를 세우는 형국이 되었다. 유엔군이 주둔한 남한 땅은 미군정 하에 1948년 3월 31일 이전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하며, 이를 위해 유엔임시위원단이 선거 및 정부수립을 감독하고,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모든 외국군을 철수시킨다는 계획을 마련했으나 중국대륙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의 쇠퇴와 공산화 가속 등 예상하지 못한 사태 야기로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주한미군 철수로 귀착되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 내전으로 국민당 정부(장개석)를 지원했지만 공산당(모택동)에게 몰락의 길을 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의 빌미를 만들었다. 이는 미국의 적이 전범국가 일본과 독일에서 전쟁을 함께 수행했던 소련과 중국이 잠재적 적국으로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미국과 정치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스탈린과 모택동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은 동북아시아 군사적 영향력 확대와 힘의 균형 유지를 위해 오키나와 미군 주둔을 결정하고 극동지역 방어라인을 구성하였는데 당시 국무장관 이름을 딴 애치슨라인이다. 애치슨라인은 한반도를 포함시키지 않은 동해 동쪽으로 설정했다. 그것은 한반도가 미국의 잠재적 적극 중국과 소련 턱밑에 위치하여 충돌 위험이 높으며 한반도 충돌 시 핵무기 사용 등 세계대전까지 비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한국)는 충돌위험의 완충지대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를 대비하여 감군과 국방예산의 감축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며 오키나와에 미군주둔을 결정했다.
1947년 10월 미 육군부는 우리 땅에 미군철수를 염두에 두고 맥아더와 하지에게 한국군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하지는 그 달 남한에 사령부와 지원부대로 구성된 6개의 사단을 편성하고, 그 무기와 장비는 1년간 미군에 의해서 지원되고 훈련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맥아더는 한국에 국방군을 설치하는 것은 유엔 총회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는 연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4부조정위원회 실무단의 검토로 넘겨져 사실상 육군부와 공군 관련기관 사이를 선회하며 미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 간에 남한의 국방군 건설과 관련하여 논의만 계속하는 동안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의 창설을 전격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8년 4월 미 국무부는 하지 중장에게 동년말까지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도록 한국 측과 협정 체결을 지시했다. 같은 해 우리 정부 수립을 앞두고 5만 명 수준으로 경비대 병력을 증원하고, 미군 철수를 결정하고 무기와 장비는 이양시킨다는 조선경비대 증강계획을 추진했다.
이렇게 하여 주한미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1949년 6월 30일부로 철수를 완료했다.
미군이 한명도 없는 남한 땅에 무기와 장비 이양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북의 김일성에게 전쟁 발발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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