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내의 나들이가 잦다. 성격 좋은 아내는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모임도 잦다. 아내의 모임이 원래 많은 것은 아니다. 자식 키워놓고 나이 들어 일과 경제적으로 해방되니까 모임에 나가는 것이다. 30년이 넘도록 아침부터 가족을 위해 살았으니 아내의 자유로운 나들이는 당연하다.
이번 아내 모임은 강릉이다. 강릉에서 나고 자라 1박 2일 그곳 여고 모임에 가는 것이다. 아내는 모임의 총무도 맡아서 아침 일찍 단단히 서둘렀다.
나는 그 모습이 싫지 않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집을 비우면 아내의 빈자리는 너무 크다. 우선 아침밥을 준비하는 일에서부터 설거지 하는 일, 둘째 아이 출근시키는 일 등은 보통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저녁때 잠자리에 들어갈 때 허전한 옆자리도 여간 일은 아니다.
그런데 정작 아내의 빈자리를 가장 크게 느끼는 가족이 있다. 그건 코코와 다룽이다.
코코와 다롱이는 우리 집 강아지다. 원래 우리는 강아지 키우는 일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우선 키울 곳이 마땅하지 않다. 우리가 사는 집은 여럿이 사는 아파트인지라 때를 가리지 않고 짖어대는 강아지 소리가 걱정되고 좁은 공간에 대소변을 치우는 일도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해 전 큰 아이가 한 마리 사왔다. 강아지를 키우는 집에 가보니 너무 좋더라는 것이다. 반려견을 키우면 가족 간 대화도 생기고 혼자 있을 때 정서적인 교감을 나눠 정신건강에도 도움 된다고 사온 것이다.
큰 아이가 사온 강아지는 하얀 말티즈다. 우리 부부는 데려온 강아지를 나무랐지만 겨우 눈뜬 하얀 강아지의 모습이 귀여워 금세 주목을 빼앗겼다. 하루 이틀을 지내면서 강아지에 대한 거부감은 허물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가족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강아지 이름은 코코, 하얀 얼굴에 까만 코가 귀여워 만든 이름이다.
그런데 그해 가을 큰 아이는 귀가 쫑긋한 강아지 한 마리를 더 사왔다. 코코가 낮 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안쓰러워 사왔다는 것이다. 둘째 강아지는 코코보다 훨씬 작고 앙증맞은 검은 회갈색 요크셔테리어다. 요크셔테리어는 영국 요크 지방 노동자들이 기르던 개로 쥐잡기 실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우리는 둘째 강아지도 이름을 지어주었다. ‘다롱이’ 귀엽고 앙증맞기도 했지만 개구쟁이처럼 활발해서 지어준 이름이다. 이렇게 가족으로 맞이한 우리 집 강아지는 두 마리다.
코코와 다롱이가 살면서 우리 가족은 강아지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실에다 보금자리를 만들어 키우다가 차츰 방안으로 들어와 지내더니 해가 바꿔 침대까지 점령해버렸다.
아들 둘 있는 무뚝뚝한 집에서 대화가 생기고 서로 만나 반가워하는 것도 강아지에게 배웠다.
가족이 집으로 들어올 때 코코와 다롱이는 세상에게 가장 진한 환영 세리머니를 한다. 그 세리머니는 거실에서 울리는 바깥 현관 초인종 음악에서 시작된다. 귀를 쫑긋하고 거실 현관문으로 가서 준비한다. 이윽고 현관문 번호 열쇠 누르는 소리가 나면 숨넘어갈 정도로 짖어댄다. 마침내 문이 열리면 온몸과 꼬리로 흔들며 깡동거리고 짖어대며 한동안 걸음을 막는다.
사람이 하는 인사는 절대 우리 집 강아지 환영 세리머니와 비교할 수 없다. 아무리 먼 여행길에서 들어와도 그 흔한 포옹 한번 하지 못하고 ‘잘 다녀왔니?’, ‘힘들지 않았어.’, ‘고생 많았다.’ 기껏해야 이런 말을 건네며 가방을 들어주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게 우리들의 모습 아닌가?
그런데 이번 아내의 1박2일 외출 때 또 한 가지 발견했다.
그것은 잠잘 때의 일이다. 나는 아내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며 멀뚱하게 침대에 누워 있다가 코코와 다롱이를 바라보았다. 잠이 오지 않아서다. 그런데 코코와 다롱이도 도대체 잠을 자려 하지 않았다. 집에 올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공동현관에 사람 지나가는 기척이 났다. 코코와 다롱이는 쏜살같이 나가 짖어대었다. 그날 밤 둘째 아이가 들어올 때까지 이렇게 몇 차례 짖으며 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나는 코코와 다롱이를 침대위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다롱이는 끙끙대며 못마땅해 몸을 뒤틀며 도망을 쳤다. 이유가 뭔지 궁금해서 다시 자리에 일어나 다롱이에게 갔다. 다롱이는 파자마가 걸려있는 옷걸이 아래로 가서 깡충거렸다.
‘참 이상한 짓도 하네.’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집요하게 다롱이는 파자마가 걸려있는 옷을 향해 몇 번이고 깡충거렸다.
‘왜 그럴까?’
한동안 생각하며 살펴보니 다롱이가 깡충거리며 쳐다보는 옷이 아내의 파자마였다. 나는 옷걸이에 걸려있는 아내의 파자마를 걷어서 침대위에 펼쳐놓았다. 그제야 다롱이는 아내의 파자마 위에 올라가 잠을 자는 것이다. 다롱이가 찾는 것은 아내의 파자마에 묻어있는 엄마냄새였던 것이다.
세상 뉴스는 연일 사건으로 뒤숭숭하다. 갑자기 나쁜 사람이 늘고 있는 것만 같다. 어린이집 폭행사건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무상보육정책 과연 옳은가 반문해본다. 무상급식에서 표를 딴 교육감 선거를 흉내 낸 정책이 무상보육이 아닐까. 그 결과 우리나라는 한꺼번에 어린이집이 들어섰다. 전국의 어린이집이 4만4천개, 퍼주기 예산은 10조 4천억 원이다. 만 0세 아이의 경우 어린이집으로 보내지 않고 집에서 기르면 양육수당으로 월 20만원, 어린이집에 보내면 77만 8천원의 보육료가 지원되는 격이다.
그래서 아이 있는 엄마들은 누구나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으로 보낸다. 여성 일자리와 아이 양육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신통한 정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말 나쁜 정책이다.
그 많은 돈은 정치인과 대통령 호주머니에서 나오지는 않을 것이고 부자나 기업에게도 전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나랏빚이 되거나 가난한 서민의 세금으로 충당할 텐데 말이다. (담배 값 올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빈부차이는 해년 늘고 있다) 연말정산으로 얇아진 1월 월급은 카드에 의존해야 하고 국민연금과 공무원 연금 앞날까지 걱정하는 일도 나랏돈을 아껴 쓰지 못해 생기는 문제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에게 엄마냄새를 빼앗는 일이다. 아이에게 엄마 냄새를 쐬어주는 일은 인성교육의 시작이다. 왜냐면 어릴 때 애착형성은 사람과 사회에 대한 신뢰감으로 발전하며 긍정적인 자아정체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으로 집안에 있는 엄마들의 부엌을 빼앗더니 이번에는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 냄새를 빼앗았다. 그 결과 ‘브런치’ 식당이 골목마다 생기고 어떤 곳에는 엄마들을 위한 사모님밥상 메뉴가 있단다. 골목마다 있는 어린이집도 그렇다. 하루가 멀다고 일어나는 사건사고 세상이 된 것은 엄마냄새를 빼앗아 가서 나쁜 사람이 늘기 때문이다.
엄마냄새 빼앗는 정책으로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 나쁜 사람은 얼마나 늘어날까? 사람이 우리 집 강아지보다 못한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어린이집 늘리는 여성 일자리가 그렇게 중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