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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벗들과 경남 창녕군의 화왕산 자락의 관룡사와 용선대로 여행을 다녀왔다. 가을이면 억새군락으로 유명한 화왕산에는 숨겨진 아름다운 보석들이 많다. 그 중에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관룡사 용선대의 석조여래좌상과 다정하고 소박한 석장승을 소개하고자 한다.

1. 관룡사(대웅전, 약사전, 석조여래좌상)철쭉과 억새로 유명한 화왕산군립공원 내 관룡산 병풍바위 아래에 위치한 관룡사는 신라 8대 사찰의 하나로 내물왕 39년(394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원효대사가 중국 승려 1,000여 명을 모아놓고 화엄경을 설법한 곳으로 유명하다. 창건 당시 화왕산에 자리하는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에서 사찰의 이름을 가져왔다.

일주문을 대신하는 돌담장 위의 산문을 지나 천왕문과 원음각이 산세를 따라 부드럽게 이어진다. 보물로 등록되어 소중한 가치를 인정받는 대웅전과 약사전을 비롯하여 석조석가여래좌상 등 5점의 지정 유물이 있어 사찰의 가치가 더욱 높다. 특히 산 중턱 용선대 위에 올라앉아 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 잡은 불상이 아닐까 싶다.

가. 관룡사 대웅전(觀龍寺大雄殿) 보물 제212호

이 건물은 1965년 해체·보수 공사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조선 태종 원년에 창건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9년에 중창하였고, 그 후 영조 25년에 중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관룡사 사적기에는 숙종 30년(1704년) 가을의 대뇌우로 금당 부도가 유실되고 주승 20여 명이 익사하는 참변을 당한 후 38년(1712년)에 이 대웅전과 기타 당옥은 재건한 것으로 되어 있어 상량문과는 일치되지 않는 점이 있으나, 건물에 관한 한 상량문을 더 중시해야 옳을 것 같다. 팔작지붕의 다포집계 건물로 비교적 조선시대 중기 이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뒤쪽에 치우쳐 고주(高柱) 2개를 세워 그 위로 대들보가 건너가게 했다. 고주(高柱)를 의지하여 불단을 설치했고 그 상부에 닷집을 달았으며, 천장은 우물 천장이지만 중앙 부분을 주위보다 한층 높게 한 것이 특이하다.

나. 창녕 관룡사 약사전 (昌寧 觀龍寺 藥師殿) 보물 제146호

약사전은 조선 전기의 건물로 추정하며, 건물 안에는 중생의 병을 고쳐 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1칸·옆면 1칸으로 매우 작은 불당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간결한 형태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이와 비슷한 구성을 가진 영암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 순천 송광사 국사전(국보 제56호)과 좋은 비교가 된다. 옆면 지붕이 크기에 비해 길게 뻗어 나왔는데도 무게와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건물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몇 안 되는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로, 작은 규모에도 짜임새가 훌륭하여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다. 관룡사 석조여래좌상 (觀龍寺 石造如來坐像)보물 제519호

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였던 관룡사의 약사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이다. 표현기법에 있어 절의 서쪽 계곡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는 큼직하게 표현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이마 위쪽으로 반달 모양이 표현되어 고려시대 불상의 머리 형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에 있어야 할 3개의 주름은 가슴 윗부분에 표현되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얕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겉옷 안에는 두 가닥의 접힌 옷자락이 역시 도식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른손은 왼발 위에, 왼손은 오른발 위에 놓여 있는 독특한 손모양이며 왼손 위에는 약그릇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연속된 거북이 등모양으로 연꽃을 표현하고 있는 상대가 특이하다.

머리에 표현된 반달 모양과 형식화된 세부표현 기법 등에서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을 고려시대에 이 지방의 장인이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고려 공민왕 때 개혁정치를 펼친 신돈과 관련된 유적도 있다. 신돈의 어머니는 창녕 절의 노비였다고 전해집니다. 신돈이 출가한 곳으로 알려진 옥천사지와 신돈이 태어난 일미사지가 인근에 있으며, 절 아래 옥천계곡은 여름철 피서지로 인기가 많다.

2. 용선대 / 보물 제295호 / 통일신라시대
관룡산(739.7m) 정상 부근의 수십 길 낭떠러지 위에 홀로 앉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전체 높이 2.98m, 불신 높이 1.81m, 대좌 높이 1.17m이다. 높은 대좌(臺座) 위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앉았는데 광배는 없어졌다.

머리에는 둥근 육계(肉髻)와 나발(螺髮)이 올려 졌고, 사각형 얼굴이지만 둥근 맛이 있다. 조금 뜬 길다란 눈, 짧고 넓적한 코, 입가에 미소를 띤 온화한 인상이다. 귀는 어께까지 내려오고, 짧은 목에 옆으로 그은 삼도(三道)는 가슴에도 새겨 있다. 머리에 비해 좁은 어께는 조금 위축된 자세지만 안정감이 있다. 다리를 틀은 하체는 묵직하여 안정감이 있다. 불상의 뒤까지 표현된 옷 주름은 규칙적이면서 평평하게 표현되었다. 대좌는 세 부분으로 높고 아름답게 만들어져, 연꽃봉오리 모양의 상좌, 팔각형의 중좌, 두 겹의 연꽃잎을 깐 하좌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8세기의 불상에도 나타나지만, 위축된 자세와 사실성이 줄어든 조각수법 등을 볼 때, 8세기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9세기 이후에 형식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바로 뒤가 절벽인 것으로 보아 불상 위에 건물은 없었던 듯하며, 자리를 정하는 데에는 땅의 기운을 무르려는 신라하대의 도참사상(圖讖思想)이 작용한 듯하다.

한편 한 걸음 물러서서 용선대를 바라보는 전망대가 있는 오른편 화왕산성 길을 택하면, 용선대가 깊숙한 골짜기에 불쑥 낯설게 튀어나온 천연의 거대한 암벽이라는 것을 뚜렷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 모양이 마치 큰 바다를 가르는 배의 모습이라고 하고, 용선대를 ‘반야용선’(般若龍船)에 비유하기도 한다. 법화신앙에서는 대웅전을 지혜를 실어나르는 배 또는 고통의 연속인 중생을 고통이 없는 극락의 세계로 건너가게 해주는 배로 비유하는데, 이것이 바로 반야용선이요, 용선대가 바로 이 반야용선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마침 용선대의 생김을 눈여겨본 누군가가 용선대를 배로 생각하고 뱃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불상을 놓아 이 바위군을 이름만이 아닌 진짜 반야용선으로 만든 셈이다. 따라서 이 용선대에 오르는 것은 극락세계로 가는 반야용선에 승선하는 기쁨이 되기도 한다.

이곳에 와서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3. 관룡사 석장승

관룡사의 숨은 보물, 석장승 역시 장승 거개가 그러하듯 두 기가 한 쌍이다. 몸통 아랫부분의 돌조각이 뭉텅 떨어져나간 왼쪽의 장승이 높이 2.2m 둘레 0.7m이며, 오른쪽 장승이 높이 2.5m 둘레 0.8m로 조금 더 몸집이 크다. 상투 같은 둥근 머리에 왕방울 눈, 주먹코, 방방한 턱, 몸매가 육중한 것까지는 서로 닮았으나, 왼쪽 장승이 혼자서 벙거지 같은 모자를 쓰고, 콧잔등에 굵은 주름을 두 개 긋고 있으며, 송곳니를 위로 빼물고 있다. 통방울 눈에 콧잔등의 굵은 주름이 마치 동그란 안경을 걸쳐 쓴 것같이 보인다.

오른쪽 장승은 왼쪽 장승보다 좀 더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아래로 빼물고 있으며, 얄궂게도 콧구멍까지 뚫려 있다. 왼쪽 장승이 남장승, 오른쪽 장승이 여장승이며, 명문을 새긴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장승의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풍화가 심한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꽤 연륜이 깊은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장승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고(故) 김두하 선생은 절 입구에 석장승과 풍화의 정도가 비슷한 당간지주의 명문 ‘乾隆三十八年癸巳十月’(건륭 삼십팔년계사시월)로 미루어 이 장승들도 같은 시기인 영조 49년(1773)에 세워진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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