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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빨간 머리로 염색한 아들, 잘 어울리네!"

퇴근 후, 현관문을 열었더니 집안은 모두가 외출한 듯 불이 꺼져 있었다. 그래서 일까? 왠지 모르게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그런데 막내 녀석의 방문 틈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최근 대학에 합격했음에도 외출하지 않고 공부하고 있는 녀석이 왠지 모르게 대견스러웠다. 그래서 내심 용돈이라도 줄 요량으로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녀석은 피곤했는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자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책상 위에 용돈을 올려놓고 방을 나왔다. 녀석의 방문을 열고 나오자, 외출을 다녀 온 아내가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당신도 놀라셨죠?"
"……"

아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물었다.

"여보,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 아직 못 봤어요?"
"무엇을 말이오?"
"아이가 머리를 빨갛게 염색을 했지 뭐예요?"
"녀석이 염색했다고?"
"제가 야단을 많이 쳤으니, 당신이 이해하세요."

평소 내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아내는 눈치를 살폈다. 아내는 이 문제로 내가 녀석을 심하게 꾸짖을까 걱정이 되는 듯, 지레짐작 겁을 먹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이제 대학에 합격도 했는데……"

그러고 보니, 녀석은 외출을 안 나간 것이 아니라 못 나간 것이었다. 녀석은 아내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위를 하는 듯 했다.

"그냥 내버려둬요. 그간 얼마나 하고 싶었으면…"

내 말에 아내는 미심쩍은 듯 말을 했다.

"그렇다면 봐 주는 거예요?"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아들아이의 방으로 가서 자는 척하는 녀석을 데리고 나왔다. 모자를 눌러 쓴 녀석이 아내의 손에 이끌려 나왔다. 멋쩍은 듯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녀석에게 모자를 벗어 보라고 하였다. 염색을 한 녀석의 모습이 생각보다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잘 어울렸다.

고3 동안 녀석은 아내와 내게 많은 것을 요구했었다

돌이켜 보면, 고등학교 3년 동안 녀석은 '무엇을 하고 싶다'든지 '무엇을 해달라'며 아내와 내게 많은 것을 요구하였다. 그럴 때마다 "대학에 합격하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겠다"며 그 순간을 모면해 왔다.

대학 합격이라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고 난 뒤, 녀석은 평소 좋아했던 아이돌 가수와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해 보고 싶어서 머리를 염색했다고 한다. 대학에 합격만 하면 하고픈 것을 모두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공부를 하면서 받은 모든 스트레스를 참았다는 녀석의 말에 왠지 모르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공부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했는지 아이에게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듣고 난 뒤, 문득 우리 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하는지를 물었다.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해소책(음악 감상, 컴퓨터게임, 춤추기, 영화감상, 취침, 여행 등)을 구구절절(句句節節)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아이들 중 몇 명은 연예인의 모습(화장, 의상, 머리스타일)을 따라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하여 녀석의 말에 공감이 갔다.

대학입시로 그간 미뤄왔던 녀석과의 약속을 지켜주고 싶다. 해방감에 들 떠 무절제한 행동을 일삼는 아이들에 비해 녀석의 행동은 얼마나 애교 있는가. 무엇보다 목표를 위해 자신과 싸워 이긴 녀석이 대견스럽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대학입시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여유와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녀석에게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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