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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아쉬움의 시간 -마지막 날(남북교육자 상봉 후기)

자고 나니 비가 오고 있었다. 요즈음 매일 비가 온다. 그래도 용케 견학을 할 때에는 비가 멈추게 되어 모두가 신기하다는 말을 한마디씩 하였다. 지난밤에 밤늦게까지 환송연회로 늦은 시간에 돌아와 떠난다는 아쉬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뒤늦게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천둥 번개가 엄청나게 몰아쳤다는데도 전혀 듣지도 못하였다. 창밖을 내다 본 대동강의 물이 장마로 인해 황토 물로 엄청 불어나 있었다. 이번 일기는 북한 방문 교육자들을 위해 견학하기에 너무나 멋진 날씨였다. 오늘도 출발을 하려고 하니 오던 비가 멈추기 시작한다.

우리는 곧장 대동강 주체사상탑을 관람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대동강 구경을 한다고 하여서 기대를 하고 민화협 안내 책임자가 바로 옆 좌석에 앉아 있기에 대동강에 가서 무엇을 관람하느냐고 하였더니 “주체사상탑 밖에 무에 더 있습니까?”한다. 역사적인 유적지와 명승지를 감상해 보리라는 나의 기대는 무참히 멀어지고 말았다. 대동강에 위치해 있는 섬들은 양각도 능라도 쑥섬으로 세 개가 있다고 한다. 주체사상탑으로 가는 길에 5․1 경기장이 있는 능라도와 대동강 다리를 건너기 전에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의 한옥 건물이 아름답게 위치해 있고, 옥류관 뒤쪽으로 모란봉과 을밀대 비류봉 등이 위치해 있다며 안내를 해 준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주체사상탑으로 탑의 규모와 크기가 엄청났다. 탑의 높이가 150m, 봉화의 높이가 20m 세계적으로 알려진 석탑 가운데 가장 높은 탑으로 안내원은 탑의 규모와 탑의 끝부분에 봉화 모양의 조형물을 끌어 올린기법이 국제 발명대회 금상을 수상하였다며 한껏 자랑을 하였지만 나에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계속하여 탑의 구성하고 있는 돌의 개수와 크기와 대형원석의 사용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임을 자랑삼아 안내하고 있었다. 원래는 주체사상탑으로 올라가서 평양시내를 다 내려다 볼 수 있는데 일정이 촉박하여 탑의 아래층만 들어가서 견학을 하였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세계 각 지역에서 보내온 주체사상탑을 찬양하는 유명 인사들이 쓴 글의 원석이 벽면에 부착되어 있고, 들어가는 입구에 거대한 돌문이 원석 그대로 만들어져 있어서 신기했다. 누군가 ‘열려라 참깨’ 하면서 문을 열고 닫아본다. 안내원은 끊임없이 주체사상탑에 대한 안내를 하였지만 나는 주체사상탑에서 능라도 경기장, 옥류관, 인민학습당, 대동강 다리와 연결되어 있는 모란봉쪽의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기에 담기에 바빴다.

민화협 안내원들은 조금은 무관심한 듯 하였지만 질서를 지키지 않고 자유분방한 우리 일행을 보고 다음에 사진을 찍을 시간을 충분히 줄 테니 안내원 가까이서 설명을 잘 듣기를 권유하고 있지만 모두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북한을 여러 번 다녀온 바가 있다는 분이 ‘북한에서는 남쪽 사람들 줄을 세우기보다는 차라리 비둘기 열 마리를 줄 세우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한다는 말을 듣고 실감이 갔다. 함께한 안내원들도 처음보다도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보여주는 듯 하였다. 함께 사진을 찍자고 권유를 하면 포즈도 잡고 처음처럼 독촉을 심하게 하지도 않았다. 주체사상탑 주위에도 3인 군상들이 있었는데, 특히 조선로동당 마크를 형상화한 노동자, 농민, 지식인을 상징하는 망치와 낫과 펜을 들고 서 있는 군상이 너무 멋지게 표현이 되어있어서 이채로웠다. 우리는 서둘러 개선문을 견학하기 위해 주체사상탑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정취를 아쉬움으로 남긴 채 차에 올랐다.

우리가 북한에 와서 통행을 할 때마다 지나다니던 곳이 개선문이다. 개선문 아래로 차가 왕복 4차선으로 다닐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높이는 60m, 정면너비 52.5m, 아치문 높이 27m, 너비 18m로 파리의 개선문 보다는 약간 크게 지었다고 한다. 얼마나 큰 문인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개선문에는 1925와 1945라는 숫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이 숫자는 김일성 수석이 고국을 떠날 때와 광복 후에 돌아온 해를 나타낸다고 한다. 우리 고유의 전통건축양식에 창의적인 기법으로 표현이 된 개선문은 다층석탑의 구조적인 특징을 담고 있으며, 화강석을 나무 다루듯이 하여 장중 우아하고 고품격적인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다. 북한의 조형물을 보면 김일성 수상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관련된 생일, 건축될 당시 김일성 주석의 나이 등 숫자에 의미를 두고 건축이 되어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개선문 바로 옆에는 모란봉 경기장이 위치해 있는데 경기장 앞으로 운동경기를 하는 다양한 형태의 선수상이 조성되어 있어서 육상경기, 탁구, 농구, 배드민턴, 핸드볼 등의 경기장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모란봉 경기장은 김일성 수석이 북한 땅에서 처음 대중들 앞에서 개선연설 한 것을 기념하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또 모란봉을 배경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으나 선수들 모습만 약간 보였지만 주민들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안내하는 안내원은 나이가 지긋한 여자 분이었는데, 입담이 좋아서 듣는 사람들이 모두가 솔깃하도록 하는 재주가 있었다. 개선문과 관련된 안내도 멋지게 잘하였지만, 가까이에 있는 모란봉과 을밀대 부벽루 등에 얽힌 전설과 유서 깊은 사연들을 함께 이야기를 하여 듣는 사람들이 모두가 손뼉을 치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안내원들이 안내를 한 후에는 꼭 김일성 수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훈시나 가르침에 의한다는 말을 안내하는 끝부분에 공식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한방문의 시간이 거의 끝나간다는 아쉬움으로 설명을 들으면서 사진 찍기에 바빴지만 그래도 모란봉에 얽힌 사연이 있는 쪽으로 사진기를 들이대는 것은 아무래도 명승고적에 대한 기대와 그리움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순안 공항으로 돌아온 일행은 처음 이곳에 도착할 때를 회상하고, 매미소리로 한산한 공항이 마치 조용한 읍내의 풍경을 또다시 느끼도록 해 준다. 공항대합실로 들어오니 텔레비전에서 애잔한 노래와 주민계도용 그림이 보였지만 별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없는 듯 하다. 물품판매대에는 북한을 떠나기 전에 유로화나 달러화로 환전한 돈을 모두 쓰고 가려는 듯 많은 물건들을 사고 있었다. 공산품으로는 꿩 털로 만든 부채와 정목으로 만든 나무젓가락 그 외에는 식품류와 한약재, 주류를 주로 많이 사고 있었다.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성 때문인지 어떤 여선생님은 가지고 온 돈을 모두 쓰고 간다며 자랑스레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듯 공항 밖에는 엄청나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공항에서 모든 수속과 절차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안내하던 잘생기고 젊은 신사복 입고 다니던 안내원 딱 한 분만 나와서 서 있었다. 아마 우리 때문에 신경도 많이 쓰고 일정이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심적인 고통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헤어질 때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석별의 아쉬움을 함께 동승한 안내원에게 인사하고자 하였으나 공항에 들어 올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악수를 청하며 그동안 수고가 많으셨다는 인사를 하였더니 싱겁게 피식 웃는다. 통로를 따라 나오면 바로 비행기와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서 우리는 버스를 타는데, 비가 너무 많이 오기 때문에 여자승무원들이 일일이 우산을 들고 교대로 상냥하게 안내를 해주고 있었다. 또한 버스에서 비행기를 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비행기 좌석 때문에 약간의 혼란이 있었지만 모두가 교육자들이기 때문에 서로 양해 하에 좌석이 정리 되었다.

순안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비행하는 고려항공기 안에서 로동신문을 보고 우리나라 노무현 대통령이 8월 28일에서 30일까지 북한 방문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로동신문에 난 내용은 1면 제일 상단에 남북공동으로 발표한 내용 원문만 그대로 게제 되어 있었다. 그 외에는 특별히 논평이라든지 남북한 교류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었다. 북한 로동신문은 6면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내용은 주로 조직생활을 통해 혁명적으로 단련이 될 수 있으며, 자유주의를 비롯한 온갖 낡은 사상을 뿌리 빼고, 집단주의 정신을 키울 수 있음을 강조한다. 조직 생활은 집단주의 정신을 키워주는 훌륭한 학교라며 조직 생활을 강조하는 것을 여러 지면에서 볼 수 있었다. 이번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교육자 상봉 북한 방문을 통해 우리는 실제로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3박 4일 동안 우리가 북한 방문을 통해 보았던 내용이 스크린에 화면이 바뀌듯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 짧은 시간에 강행군이었다. 6.15공동선언실천 남북교육자 상봉모임 북한 방문에서 만경대, 고향집 방문, 모란봉제1중학교 견학 및 남북교육자상봉대회, 백두산 관람, 백두밀영, 삼지연 참관,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 관람, 소년궁전 참관, 5.1경기장 아리랑공연 관람, 주체사상탑 및 개선문 등을 관람하였다. 처음 북한을 방문할 때는 북한의 역사적인 유적지와 명승고적을 두루두루 살펴보아야 하겠다는 기대와는 상당히 먼 것이었지만, 북한주민의 삶의 모습과 그들이 어디에 관심을 두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실제로 목격하게 되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남북교육자 상봉대회를 마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분단된 아름다운 조국산하의 모습을 보았고 그들이 사는 것도 보았다. 가까운 거리에 두고도 같은 나라 내 민족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우리는 체제의 우월성을 따진다든가 남북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의 차이로 민족의 이질감을 논하며 차별성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루 빨리 남북의 모든 부문에서 차이를 해소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변화하는 사회에서 우리 민족이 공동번영의 길로 가야할 것인지 돌아오는 길에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미래의 사회는 지식정보화 사회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이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바르게 사는 것인지 많은 것을 느끼고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진정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북의 어려운 점을 이해하고 도우려고 할 때, 즉 그 도움이  같은 형제와 같은 동족으로 언젠가는 함께 끌어안고 가야할 공존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때 통일은 한발 한발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필자가 3박 4일 동안 북한을 방문하면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점을 필자의 시각으로 진솔하게 기술하려고 노력은 하였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표현력도 부족하여 잘못된 내용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교육현장에서 북한의 실정을 바르게 알고 조금이나마 학생교육에 도움이 되길 간절히 소망하며 장장 4회에 걸친 북한 방문 후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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