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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미국 선생님과 함께한 한국체험-넷째날

 


아침에 호텔로 버스가 와서 우리 일행은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오늘의 일정은 임진각, 비무장지대, 도라산역, 민통선마을이다. 필자를 비롯한 한국 사람들, 매리앤과 쥬디, 그리고 다른 외국인들과 젊은 일본 여성, 여행안내인이 함께 했다. 필자는 임진각에 여러번 갔었다. 매리앤이 미국에서부터 한국에 오면 비무장지대를 꼭 보고싶다고 했을 때 필자는 시큰둥했을 뿐만 아니라 싫었다. 비극의 현장을 관광장소로 생각하는가?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슬프다고 울기만 하고 있다고, 싫다고 싸매고 있다고 비극이 기쁨의 현장의 되는 것도 아니고 나아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오해의 소지를 없앨 뿐 더러 같은 부모를 가진 형제가 총부리를 겨누고 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비극을 오감을 통해 체험케 하는 것이 오히려 분단의 현실을 이해시키고 일깨우는데 더 적절하다. 이는 외국인에게가 아니라 임진각이니 비무장지대니 늘 들어 오히려 귀챦아 외틀어 돌아앉고 싶은, ‘그래서 그게 뭐 어쨋다고’ 하며 위험성과 비극에 대한 생각조차 없고 짜증을 내는 필자같은 내국인에게 현실직시를 위해 더 필요하다.

몹시 가슴 아프긴 하지만 ‘분단’과 정전은 한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 폭탄이 작열하고, 옆에서 사상자들이 속출하는 전쟁은 아니지만 전쟁이 진행중인 현장을 직접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으되 버스 속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피흘리며 죽어간 원혼에게 또한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군인들에게 한가한 사람들의 전쟁체험 장소로 보여주고자 하면 커다란 죄가 되는가? 비극, 일깨워야 할 현실을 가볍게 여길 우려가 있는가? 이러한 시각만이 옳은가?

보안상에 큰 위험만 없다면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에게 특히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전쟁의 고통 속에 지금껏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의 아픔을 절절히 체험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어떠한가?

필자의 부모님도 10대의 어린 나이에 분단선을 넘어 왔다. 어머님은 총알이 사람을 피했지 사람이 총알을 피한 것이 아니라고 당신의 생존을 기적으로 표현하셨다.

빗발치는 총알, 바로 옆집에서 터지는 폭탄과 마주 앉아 이야기 하던 친한 사람들의 죽음, 힘들었지만 피난짐에 얹어서 업고 내려온 네살박이 동생의 굶주림에 의한 허망한 죽음, 인민군에서 탈영하여 식구들을 인솔하고 남한으로 내려온 오빠가 다시 국방군으로 차출되어 전쟁터로 다시 나가게 되었을 때 어린 동생들을 책임지는 가장이 된 10대의 어린 소녀 어머님은 두려움에 날마다 울며 피난민 보호소에 배급을 타러 갔단다. 인민군에서 탈출하여 국방군이 된 외삼촌은 그 때 22세였다. 남한 사람이나 북한 사람이나 얼굴은 모두 같고, 인민군에 이북 사투리를 쓰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 국방군에 남한 사투리를 쓰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며 더군다나 인민군에서 내려온 사람까지 다시 국방군으로 데려가는 마당이니 부대를 잃거나 뒤쳐진 낙오자들은 무조건 죽였다고 하였다.

남과 북의 군인들이 번갈아 올 때마다 쑥대밭이 되었다는 마을들의 한 서린 사연들과 그 일로 지금껏 울분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민통선 마을에서 농사터를 일구기까지 그 땅에 뿌려진 제거되지 않은 포탄과 지뢰에 의한 주민들의 사망과 부상 등. 전쟁의 참혹함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들은 너무도 많다.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을 들어 버스 창밖을 보니 논밭사이로 중무장을 한 채 도보행군을 하는 아들 또래의 군인들이 보였다. 징병검사에서 1등급 판정을 받은 아들을 가진 필자가 무심히 보아넘길 수 있겠는가? 버스가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군인들의 모습이 간간히 보였다. 눈물이 나고 머리가 어지러워 창에 머리를 대고 있으니 매리앤과 쥬디가 위로를 해주었다.

북한이 남한 침공을 위해 파놓았다는 땅굴은 한참을 내려가야 했으므로 나이가 든 쥬디는 많이 힘들어 하였다. 필자는 매리앤의 팔을 잡고, 쥬디는 미국에서 공부를 한다는 일본인 여학생의 도움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까지 다 볼 수 있었다. 북한은 전쟁을 위해 땅굴을 파고 남한은 그 곳을 분단의 현실을 일깨우는 전쟁 체험의 장으로 만들었다. 언젠가는 ‘남한과 북한 사이를 빠르고 쉽게 왕래하는 지름길로 사용될 수 있겠지’하는 희망을 가져보았다.

망원경으로 보는 개성에는 공단이 들어서 있었다. 북한의 술, 호도, 고사리 등 물품들도 남한에서 쉽게 만날 수 있으며, 개성공단 내 의류공장에서 패션쇼를 하였다는 소식도 있었고, 끊어진 철도를 연결하여 일본에서 출발 남한과 북한을 거쳐 러시아나 중국을 통해 유럽으로 이어지는 철도를 놓는다는 구상도 들려온다. 수많은 의심과 회의, 분노와 힘겨루기 속에 두려움과 절망, 희망과 기대를 넘나들며 남과 북은 깊고 간절한 기도 속에 타국에 의해 나누어졌으나 결국은 우리의 힘이 미약하고 결집되지 못하여 지키지 못한 한을 우리자신의 노력으로 풀고자 전진과 후퇴, 다시 전진 등 한 발자욱 한 발자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자신의 문제를 누가 우리의 입장에서 해결해주겠는가? 당사자가 열성을 보여야 남도 관심을 보이고 지원을 한다. 3·1운동과 헤이그 밀사사건,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 등의 거사는 한국은 일본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려는 시도였다. 남북관계에 대한 노력들에 대해 오히려 분단을 더 지속시키는 일이 되지는 않는지, 오히려 상대방에 속는 것은 아닌지 우려와 근심에 귀를 기울이며 다양한 의결표출이 이어져왔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으나 못살고 힘겨운 생활에서도 자손만은 잘되라고 후원을 아끼지 않은 부모세대들의 덕택으로 공부 열심히 하여 의식 수준이 고루 높아진 국민들은 세세한 것은 모를 수 있어도 개별적인 욕심에 의해 흐려지지 않는 한 전체의 흐름을 보는 안목은 있을 것이다.

며칠 전 식사시간에 만난 국제관계 담당 선생님에게 한국의 정치사는 세계의 정치사에서도 연구되어야 할 만큼 큰 진전을 이루지 않았는지를 물어보았다. 36년간의 식민지와 또한 同族相殘의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상처로 집단 간의 증오와 반목이 극심한 상태에서 해방 50여년 만에 정치의 연착륙이 시도되고 있는 사례는 경제의 기적과 더불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닐까? 국민적 시위가 있었어도 여전히 독재의 그늘에서 빈곤하게 살고 있는 나라도 또는 국민적 시위조차도 할 능력이 없으며, 내전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는 나라도 세상에는 많다.

피눈물 나는 가난을 극복하고 이밥과 고깃국을 먹이려고 앞장서서 노력한 분들도, 그러한 와중에 발생한 수많은 억압과 고통에 맞서 목숨걸고 노력하여 이제 밥과 고기가 아니라 세계 속에 우뚝 서는 국가를 향한 질서와 지향점을 마련한 분들 그 모두가 세계정치사에 功過는 논할지라도 자랑할만한 것이지만, 허리띠 졸라매며 자손의 앞날을 위해 희생한 부모세대와 잘 자라 자신의 몫을 착실히 하며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도록 기반이 되어준 현재의 우리들 또한 자랑거리이다.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도라산역에서 사용할 수 없는 차표를 기념품으로 사서들고 일행이 기다리는 버스로 왔다. 필자는 지금 한국 역사의 중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훗날 역사책에 오늘의 이 시기는 어떻게 기록이 될까? 5000년 역사에서 식민지와 분단을 가져온 가장 한심한 조상을 딛고 無보다 더한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의 정상을 향해 나가며 후손의 번영의 기틀을 마련한 자랑스런 조상의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호텔에서 버스를 내리기로 되어있으나 경복궁에서 수문장 교체식이 있다고 하여 중간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급히 달려갔으나 행사는 다 끝나고 몇몇의 재래식 복장의 군인들이 사진을 찍겠다는 관광객들의 모델이 되어주느라 서 있었다. 아싑지만 어찌하랴! 매리앤과 쥬디는 한국 전통군인복장이 신기하다며 환호하며 사진을 함께 찍었다.

저녁시간이 되었으나 호텔로 돌아오기를 거부하고 재래식 시장을 보고 싶다고 하여 남대문시장을 갔다. 매리앤은 50세를 훨씬 넘었으며, 쥬디는 60세를 넘겼다. 그럼에도 그 왕성한 호기심과 체력에 필자는 감탄을 금치 못하였고 개인적으로는 행운으로 여겼다. 필자도 남못지않은 왕성한 호기심과 체력을 지니고 있으며 수많은 주제에 관심이 있는데 이 두 사람 모두 필자와 성향이 같았다. 사물 하나하나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모르면 주변의 누구에게라도 묻고 알려주기를 청하였다. 교수라는 신분이 방해가 된 적은 없었다.

이미 문을 닫은 곳이 많았지만 남대문 골목골목에서 아직 물건을 팔고 있는 상인들이 있어 매리앤은 식탁보를 크기별로 여러 점 샀다. 한극 무늬나 태극기가 그려져 있는 티셔츠도 사려하였으나 크기가 맞는 것이 없어 사지 못하였다. 필자는 한국에서 가져간 아들의 옷을 미국의 세탁기에 넣고 바로 돌렸더니 많이 상하였던 경험을 떠올리며 식탁보를 망에 넣어 세탁하라고 여러 번 주의를 주었다. 한국 제품 나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물건 파는 분들에게도 좋은 물건을 제 값에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쥬디는 자개 명함판, 한국 전통인형, 곱게 수를 놓은 복주머니를 샀다. 수주머니는 딸에게 줄 것이라 하였다. 필자도 자개 명함판이 예뻐서 하나 샀다. 필자가 교환교수를 마치고 세인트루이스 소재 미주리대 총장님과 부총장님께 각각 백제 금동대향로 모형과 조선시대 임금님과 왕비님 인형을 선물로 드렸더니 너무나도 좋아하시며 총장실과 부총장실에 놓고 두고두고 보겠다고 하셨다. 부총장님은 여자분인데 “Gorgeous"를 외치며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그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저녁메뉴를 고르느라 식당가를 누비고 다니다 매리앤과 쥬디가 감자와 떡볶기가 들어있는 닭찜 그림을 보며 맛있어 보이는데 어떤가를 물었다. 필자가 매운데 맛은 있다고 하자 결정하였다. 미국에서 함께한 시간이 퍽 많았기 때문에 식성을 비교적 잘 알고 있었지만 매운기가 염려되었는데 입을 호호 불어가며 아주 맛있다고 하였다. 종업원들이 조각 영어를 하며 ‘맛있냐?’ ‘물을 더 줄까?’ 등을 물으며 친절히 대해 주더니 녹차를 타서 가져왔다. 필자가 미국에 있었던 2005년에 라디오에서 녹차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소개를 하는 것을 들었다. 두 사람도 녹차가 몸에 좋다고 잘 마시며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내일은 경주에 가서 한국 전통 가옥에서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와 절에서 머무는 템플스테이에 참석하기로 하였으므로 숙소로 돌아와 부지런히 짐을 쌌다. 안양과학대 이교수님이 오셔서 경주에서 대전을 거쳐 다시 서울에 와 학회에 참석해야 하는 일행의 일정을 알고 경주와 대전에서 필요한 짐은 가져가고 나머지는 이교수님댁에서 보관해주겠다고 하였다. 비가 많이 왔음에도 밤중에 차를 가지고 와 일부러 짐을 자청하니 필자를 비롯한 두 사람은 매우 고마워하였다. 헤어지기 서운하여 밤 12시가 넘었음에도 더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숙소 주변의 인사동길로 들어섰는데 차를 파는 곳은 문을 닫고, 술을 파는 곳만 몇 군데 문을 열었으므로 호텔로 다시 들어와 아줌마들의 끝도 없는 수다를 떨다가 내일을 위하여 헤어졌다. 지금도 비가 오는 한밤중에 무거운 여행 가방을 들고 가 일행의 짐을 덜어준 이교수님께 매우 감사한다. 미국으로 돌아간 지 9개월이 넘은 두 사람도 이교수님을 다시 보고 싶어하며 근황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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