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무렵의 일이다. 불혹(不惑)에 들던 때이니,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그러함에도 기억은 생생하고 부끄러움은 선명하다. 나는 그때 교직(1974~1978)을 떠나, 연구소로 옮겨온 지 11년째 되던 해였다. 그러니까 내 자의식 속에 ‘선생으로서의 정체성’은 좀 희미해진 때였다. 그해 입동 무렵 어느 날, 절친한 고향 친구 S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병석에 오래 계셨던 어른이시다. 빈소는 경기도 포천 이동(二東)이다. 고인이 사시던 집에서 조문받고 장례를 모신다고 한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 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는 일은 드물었다. 대개는 집에서 장례를 모셨다. 오후 6시, 서둘러 퇴근하여, 사당동 어디쯤서 빈소에 갈 친구 몇몇이 모였다. 누군가 차를 가지고 나왔다. 간단히 저녁 요기하고 오후 7시가 넘어 출발한다. 어두운 지방도로, 길을 물어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는다. 빈소에 조문하고, 이쪽 방으로 건너오니, 오래 보지 못했던 옛 친구들이 한 방 가득 우르르 몰려 있다. 함께 섞여 앉으니 오랜만의 추억담으로 질박한 언어들이 오간다. 고향 친구, 허물없는 사이 아닌가. 문상객을 위해 술이 들어오고 밥이 들어오고, 그 술과 밥 위로 오래…
2021-06-04 10:30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를 떠나 밤새도록 200㎞를 달려온 미니버스는 캄캄한 마을 쥐로비치에 여행자를 토해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마을에서 뭘 해야 할지, 어디로 걸어야 할지, 당최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그냥 걸어가야 한다면 북극성을 따라가기라도 하겠지만, 오늘 밤은 이곳에서 자야 했다. 불빛이 보이는 나지막한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어둠 속에 걸어오는 사람이 있어 수도원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지금은 수도원을 닫았으니 300m 정도 내려가다가 왼쪽으로 가면 파란색 기차가 보일 거요.” 이 밤중에 파란색 기차는 어떻게 알아볼 것이며, 쥐로비치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마을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볼 심정으로 더듬거리며 두리번거릴 뿐. 그때 갑자기 번쩍 들어온 가로등 불빛 그리고 잠시 후 꺼졌다. “가로등 인심 한 번 각박한 동네군.” 멀리 희미한 조명을 등대 삼아 다시 걸었다. 비포장길을 걸을 때 신발이 내는 소리가 꽤나 요란했다. 그 소리에 동네 개들이 마구 짖기 시작했고 인기척에 공장 같은 곳에서 불이 켜졌다. 그때 아까 행인이 말한 파란기차가 보였다. 객차 두 칸이 숙소로 쓰이는 것 같았다. 여기 아니면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수도원에 머물려고 왔…
2021-06-04 10:30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일반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했고, 알 필요도 없었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국민이 알고 있는 단어들이 많다. 코로나19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 ‘집단면역’, ‘코호트 격리’란 용어는 과거에는 소수의 전문가들이나 사용했지만, 지금은 온 국민이 그 의미를 알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도 마찬가지다. 성폭력·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면서 2018년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이란 표현을 사용한 이후 지금은 대부분의 국민이 일상적으로 성인지 감수성을 사용하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의 의미 성인지 감수성은 영어로 ‘gender sensitivity’인데 과거에는 성별 감수성 혹은 젠더 감수성이라고 하였는데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 성인지 감수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인지 감수성이란 무엇일까? 아직까지 통일된 해석은 없으나 ‘일상생활 속에서 성별에 대한 차별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 ‘성별의 불균형에 따른 유·불리함을 잡아내는 것’, ‘성폭력·성희롱사건에서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은 2018년 4월 대법원 판결에서 최초로 판결문에 등장하였다. 성희롱
2021-06-04 10:30
들어가며 교육현장에서 역량중심 교육과정, 학습주도 프로젝트 학습, 과정중심평가, 학생의 학습 선택권 확대 등의 용어들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용어들의 방향은 다양한 특성을 보이는 모든 학생이 배움에 소외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도록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고, 학생이 주도하는 학습을 강화하기 위함일 것이다. 보편적 설계(Universal Design)는 제품·시설·서비스 등을 이용하는 사람이 성별·나이·장애·언어 등으로 제약을 받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으로 흔히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 ‘범용 디자인’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공공교통기관 등의 손잡이, 일회용품 등이나 도로 설계 등 넓은 분야에서 쓰이는 개념이다. 이러한 보편적 설계를 기반으로 한 학습설계가 가능하다면 모두를 위한 학습복지 실현과 교육형평성 구현이 가능할 것이다. 이에 보편적 학습설계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자 한다. 보편적 학습설계(Universal Design for Learning, UDL) 개념 가. 보편적 학습설계 정의 이학준 등(2017)에 따르면 보편적 학습설계란 보편적 설계의 기본 철학에 해당하는 ①무장애 설계, ②통합 설계, ③모두를 위한 설계를 기반으로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것이
2021-06-04 10:30
아메리칸 항공(American Airlines)이 코로나 백신 접종을 받는 직원에게 휴가와 보너스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 등 수많은 기업이 비슷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회사가 월급으로 모두 지불하면 될 것을 굳이 ‘보너스’로 따로 주는 것도 일종의 인센티브입니다. 뭔가 잘하면 더 혜택(benefit)이 돌아온다는 믿음이 일을 더 열심히 하게 만듭니다. 우리 일상에 이런 인센티브는 수도 없이 작동 중입니다. 외과의사가 손을 깨끗하게 씻는 것은 비용이 거의 들지 않지만, 만약 제대로 씻지 않고 수술을 하면 보이지 않는 큰 비용이 발생합니다. 캘리포니아의 ‘시더스 사이나이 병원’에선 의사들이 손을 씻을 때마다 스타벅스 쿠폰을 지급했습니다. 손을 씻는 의사의 비율이 매우 높아졌고, 수술실 감염 비율은 현저히 낮아졌습니다. 가장 흔한 인센티브 사례입니다. 보험에 가입하면 무료 독감접종 쿠폰을 준다거나, 패스트푸드에서 세트메뉴를 주문하는 것도 사실은 인센티브 때문입니다. 여자친구를 바래다줄 때 담벼락이나 편의점이 아닌 가로등 밑에서 키스를 하려는 이유도 환경적으로 더 로맨틱한 키스를 가능하게 해주는…
2021-06-04 10:30
2015 개정 교육과정 창의적체험활동의 진로활동에서 제시하는 교수·학습방향은 큰 틀에서 다음과 같다. 먼저 학생들이 자신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기회와 자신에게 맞는 진로를 찾아가는 과정을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고 지도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수업시간뿐만 아니라 언제든 학업 및 직업·진로에 대한 활동 계획을 수립하여 흥미·소질·능력에 맞춰 적절한 진로선택 기회를 부여할 수 있도록 교과교사나 진로진학상담교사뿐만 아니라 관련 교원들의 협업으로 학생 개인별·집단별 진로상담이 수행되어야 한다. 1학기에 맡은 수업은 2학년 창의적체험활동 진로수업 4시간이다. 진로수업을 맡게 된 까닭은 시수 배정을 교과별로 나누다 얻게 된 것이다. 사서교사라서 학교도서관에서 수업할 수 있어 진로탐색 기회를 생생하게 얻을 수 있는 수업을 준비했다. 눈에 보이는 대입 성적과는 별개로 학생 개개인의 내적성장을 위한 진로시간과 학교도서관은 그래서 더욱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창체 특성상 시간은 수업시간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교과서나 성취기준이 없어 수업준비에는 늘 애를 먹는다. 학생들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직업을 설명해 줄 수 없을뿐더러 바쁘게 변화하는 직업세계에 대해 학생 스
2021-06-04 10:30
교육정책기획력은 교육활동 중 발생한 문제에 관해 다양한 방법의 해결안을 창의적으로 제시하는 능력으로 교육전문직원에게는 꼭 필요한 역량이다. 그렇다면 교육전문직원의 필수 역량인 ‘기획능력’을 갖추기 위해 수험생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이번 6월호에서는 교사가 기획력을 갖추기 위해 준비해야 할 역량과 실제 교육전문직원 전형 중 기획안 작성에서 필요한 고득점 전략을 수험생의 관점에서 ‘준비-연습-실전’ 과정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교육정책기획 고득점 전략 _ 준비하기 교육전문직 시험 준비를 위해서는 지역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보통 교직·교양, 정책논술, 장학능력, 수업전문성, 교육과정, 현장지원전문성, 교육정책기획 등 다양한 영역의 공부를 해야 한다. 이는 별개의 과목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모두 연계되어 있다. 그래서 공부를 하다 보면 각 영역의 답안을 모두 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교육정책기획 준비를 하는 데 필요한 내용이 논술이나 교직·교양, 장학능력, 면접 등에서 그대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육정책기획 준비과정에서 필요한 내용을 살펴보자. 가. 교육패러다임 이해 먼저 교육전문직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사회
2021-06-04 10:30
“안녕하세요. ○○이 아빠입니다. 얼마 전에 실시한 과학전람회 대회에서 우리 아이가 왜 상을 못 받았는지 알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제가 보기엔 우리 애가 잘한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애들이 상을 받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 엄마입니다. 우리 애가 선생님 과목을 정말 열심히 공부했는데 중간고사 볼 때 긴장을 했는지 잘 못 봤거든요. 그래서 아이가 많이 힘들어해서 그런데 기말고사는 조금 쉽게 출제해 주세요.” “이번 선택과목 조사에서 아이가 물리학Ⅱ를 신청했더라고요. 신청기간이 끝난 것은 알지만, 아이가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서 지금 전학까지 생각하고 있으니 생명과학Ⅱ로 바꿔주세요.” “아이가 과학 경시대회를 깜빡하고 신청하지 못했다네요. 저희 애 신청 좀 해주세요.” “아가씨, 우리 손자가 그 학교 졸업생인데 외국 유학을 가서 너무 보고 싶은데 혹시 졸업앨범을 구매할 수 있나요?” 작년 한 해 내가 받은 학부모들의 전화 중 일부이다. 작년은 코로나로 인해 개학 연기·온라인수업·학사일정 조정 등으로 교사·학부모·학생 모두 처음 겪는 일들이 많았고, 예년보다 더 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학년 초에는 온라인수업과 관련한 문의가 많았고, 내가
2021-06-04 10:30
싱아는 어떻게 생겼을까. 우선 풀일까 나무일까. 열매를 먹는 걸까, 잎이나 줄기를 먹는 걸까. ‘싱아’라는 말에서 시큼한 맛이 날 것 같긴 한데 어떤 맛이 날까. 박완서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초판을 낸 후 이 같은 궁금증이 많았는지 개정판 표지 다음에 싱아 그림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여 놓았다. 마디풀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1m 정도로 줄기가 곧으며, 6~8월에 흰 꽃이 핀다. 산기슭에서 흔히 자라고 어린잎과 줄기를 생으로 먹으면 새콤달콤한 맛이 나서 예전에는 시골 아이들이 즐겨 먹었다. 이 소설은 작가가 자신의 코흘리개 시절부터 스무 살 대학생으로 6·25를 겪기까지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일제 강점기, 해방 후 혼란기, 6·25 발발과 1·4후퇴에 걸쳐 있다.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써 보았다”고 할 정도로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글이다. 작가가 고향 경기 개풍군 박적골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따뜻하게 그려져 있다. 세 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할아버지 등 대가족의 사랑을 담뿍 받은 데다 무엇보다 대자연과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21-06-04 10:30
최근 서울시교육청 산하 서울교육정책연구소가 코로나19에 따른 학력 양극화 실태를 보여주는 보고서를 제시했다. 서울 시내 중학교 382곳의 3년 치 국어·영어·수학성적을 분석한 결과, 코로나19를 겪으며 중위권 학생 비율은 줄고 하위권 비율은 늘었는데 특히 수학교과에서 이런 현상이 심화되었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닥친 코로나19로 인해 수학교과에서의 온라인수업은 사교육시장이 기존부터 개발하던 ‘문제풀이중심’의 에듀테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EBS 강의 이용과 자기 수준에 맞는 문제풀이의 무한반복 등 개인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방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수학적 감각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야기했을 수 있다. 온라인수업 디자인, ‘도구’가 아닌 ‘과제’에 초점 두기 보통 각 학교는 클래스룸, 온라인클래스, 위두랑, 클래스팅 등 자신의 학교가 결정한 플랫폼을 사용하기 때문에 개인이 선택할 여지가 없는 경우가 많다. 초기에는 ‘어떤 플랫폼이 더 나은가’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수학교과는 플랫폼보다 온라인수업을 가능하게 하는 ‘과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라인수업도구를 잘 다룰 수
2021-06-04 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