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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개별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입학 정원은 150명 이하로 하되 로스쿨마다 입학 정원이 차등 배분될 전망이다. 교육부는 1일 개별 로스쿨 입학정원 상한선(150명)과 법학교육위원회 운영 방안 등을 담은 법학전문대학원 설치ㆍ운영에 관한 법률(로스쿨법) 시행령을 입법예고했다. 시행령에 따르면 개별 로스쿨 입학정원은 특정지역이나 소수의 대학에만 로스쿨이 설치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150명 이하로 정해졌다. 교원과 시설, 재정 등 교육 여건과 총 입학정원을 감안, 개별 로스쿨마다 입학 정원이 150명 또는 120명, 100명, 80명, 50명 등으로 차등 배분된다. 로스쿨 설치 대학을 선정, 인가하고 개별 로스쿨의 정원을 정하는 업무를 맡게 될 심의기구인 '법학교육위원회'는 재적위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개별 로스쿨 정원 등을 의결하며 교육부장관이 최종 결정한다. 법학교육위원회는 위원장을 포함한 13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위원 13명은 법조인 4명(판사 1명ㆍ검사 1명ㆍ변호사 2명), 일반 시민(시민단체 등 포함) 4명, 법학교수 4명, 교육 공무원 1명 등이다. 로스쿨 총 정원은 법무장관과 법원행정처장과 협의하고, 법학교수회와 변협의 의견을 수렴한뒤 교육부 장관이 결정토록 돼 있다. 총 정원은 법학계가 3천~4천명을, 국회 교육위는 2천~2천500명을, 시민단체 등은 3천명 이상을, 세계화추진위원회(1995년 당시)는 2천100명을, 서울변회는 700~1천명을 각각 주장하고 있다. 로스쿨 교원 1인당 학생수는 여타 전문대학원 및 대학원대학과 같이 12인으로 하고 시설은 법학전문도서관, 모의법정 등을 갖추도록 했다. 로스쿨법에서는 교원 1인당 학생수를 15인 이하로 정한뒤 시행령에 위임한 바 있다. 로스쿨 석사학위 과정에서 이수해야 할 최소 학점은 90학점으로 정했고 법조윤리, 법률정보의 조사, 법문서의 작성, 모의재판, 실습과정 등의 교과목을 개설해야 한다. 적성 시험은 연 1회 이상 실시하고 적성시험을 시행할 기관은 법학전문대학원협의체와 대학, 정부출연연구기관, 법학적성시험 시행을 목적으로 설립된 법인 중에서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로스쿨은 최초 개원후 4년, 그 이후엔 5년마다 로스쿨 평가위원회의 평가를 받아야 하며 2년 마다 자체 평가보고서를 작성, 평가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 이번 시행령안은 8월 규제개혁위원회 규제심사, 9월 법제처 법제심사 및 차관회의,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9월 28일 공포, 시행될 예정이다.
제주교육박물관 평생학습관이 여름방학을 맞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 천자문 서당'을 1일 열었다. 이날부터 22일까지 제주시 이도2동 제주교육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전통초가에서 열리는 '어린이 천자문 서당'에는 인근 초등학교 4, 5학년 학생 16명이 참가해 천자문을 중심으로 기초 한자를 습득하고, 선인들의 학습방법과 전통예절도 익히게 된다. 서당의 훈장은 고응삼 전 제주동여자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교육박물관에서 천자문 서당을 개설한 1999년부터 줄곧 훈장을 맡아 어린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교재는 '한석봉천자문(韓石峯千字文)'이며, 수업은 월∼금요일 매일 오전 9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 진행된다. 첫날 수업에 참석한 윤동호(10.동광초 4년)군은 "학교 선생님께서 방학 중 천자문 서당이 열린다고 소개하셔서 찾아 왔다"며 "훈장선생님을 따라서 한자를 읽으니까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아 재미도 있고 머리에도 쏙쏙 들어온다"고 말했다. 제주교육박물관 관계자는 "전통식 한문서당을 통해 단순히 천자문 만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선인들의 훌륭한 전통예절도 함께 배울 수 있어 어린이들에게는 더욱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북부교육청 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 지원사업 대상교인 인천한길, 진산, 삼산초등학교 학생 87명은 31일 인천 강화군 길상면 장흥리에 있는 학생수련원 해양탐구수련원에서 갯벌체험학습과 농촌체험활동을 실시했다. 한길초등학교 주관으로 개최된 갯벌체험 활동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정도로 환경·자원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 있으며, 보호해야 할 중요한 자원임을 인식시키고, 신나는 여름방학동안 즐거운 추억과, 농촌체험을 통해 도시에서만 자라나, 농촌에 대한 경험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그저 공허하게만 들리지 모를 신토불이와 우리 농산물의 우수성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지금 피서를 떠난다면 꼭 가봐야 할 곳이 바로 충남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에 자리한 냉풍욕장이다. 서해안고속도로 대천나들목을 빠져나와 36번 국도를 타고 청양방면으로 길을 나선다. 청천저수지를 끼고 2㎞정도 달리다 청보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해 1.8㎞를 달리면 성주산 자락에 들어선 냉풍욕장과 만난다. 필자가 2주전 5일간 떠난 충남여행에서 새로이 다녀온 여행지 중 가장 인상깊었던 곳이 보령 냉풍욕장이다. 보령은 한때 석탄을 채취하던 광산이 모여있던 곳이다. 이제는 폐광이 된 것을 냉풍욕장으로 관광자원화한 것이다. 폐광의 부활은 이곳 주민들에게도 의미가 크다. 연간 20여 만명의 관광객이 냉풍욕장을 다녀가고 있으며, 폐광의 찬바람을 이용해 버섯을 재배해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연간 150억원에 이른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곳의 굴 길이는 5km에 이르는데, 이중 200m 길이의 유도터널이 냉풍욕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매년 4~10월 사이 약 12~14도 정도의 찬바람이 나온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찬바람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풍속은 최고 초속 6m로 에어컨보다 더 시원한 찬바람에 한기가 느껴질 지경이라 여름철 피서지로 더없이 좋은 곳이다. 관리사무실을 겸하고 있는 냉풍욕장 홍보관 역시 에어컨 없이 이곳의 찬바람을 끌어들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고 있다. “이야! 폐광의 바람을 이곳까지 끌어왔네요. 제가 사는 마산까지 이 바람을 가져갈 수 있으면 너무 좋겠네요.” 필자가 그곳에 들어섰을 때 한말이다. 바람이 어찌나 시원한지 푹푹찌는 무더위에 이보다 더 좋은 피서지가 또 있을까 싶었다. 편의시설로 원두막과 파고라, 특산물판매장 등을 갖추고 있다. 한편 이곳의 찬바람을 활용해 양송이버섯을 재배하는 곳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냉풍농원(041-934-8154)을 운영하는 이선구씨의 비닐하우스를 찾았는데, 종균을 뿌리고 약 45~50일 후면 수확이 가능하다고 한다. 재배과정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볏짚을 깔고 그 위에다 버섯종균을 심는다. 그리고 점질토와 사질토를 썩은 흙을 60~65도의 온도에서 10일간 살균한다. 종균을 뿌리고 17~18일 후 흙을 얹는데, 흙의 농도는 7.5ppm에 맞춘다고 한다. 흙을 얹고 23~25일이 지나면 버섯을 수확하게 된다. 60평 정도인 비닐하우스 내부는 항상 17~18도의 온도를 유지하는데, 한동에서 하루에 80상자 정도를 수확한다고 한다. 이 마을 버섯작목반에서 약 200동의 비닐하우스에서 냉풍을 끌어들여 버섯을 재배한다. 그런가하면 하면 이곳에서 생산된 냉풍양송이를 이용해 ‘참바람골 냉풍양송이 된장.고추장(041-934-2463)’을 만드는 곳도 있다. 된장과 고추장에 건조된 양송이를 옹기에 넣어 2년정도 숙성시켜야 상품이 된다. 처음에는 버섯 건조에 실패해서 버리는게 더 많았다고 한다. 버섯은 약 3일간 건조하는데 2kg을 건조하면 120g의 버섯분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된장에는 약 3%의 버섯분말이, 고추장에는 약 5%의 버섯분말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건조하기 이전의 양으로 계산하면 상당히 많은 양이다. 양송이가 재래 된장에 들어가면 불포화지방산이 5배가 더 높아져 건강에 좋으며, 된장의 떫은 맛이 없고 한결 연하고 부드럽다. 문의 : 냉풍욕장 041-934-2463, 냉풍욕장 홍보관 934-3595 추천 맛집 동내동 원평마을의 다정식당에서 내놓는 다슬기된장찌개는 부드럽게 씹히는 다슬기의 쫀득한 맛과 얼큰한 국물이 속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추어탕과 토끼탕도 맛깔스럽게 내놓기로 유명하다. 041-936-9833 추천 숙소 SBS드라마 [쩐의전쟁] 주인공인 박신양과 서주희가 묵었다는 무창포 씨사이드호텔(041-936-8626, www.seasidehotel.co.kr)이 편안한 쉼터로 더없이 좋다. 씨사이드호텔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인증한 우수숙박업소 ‘굿스테이’에 지정되었다. 호텔 로비에서 주인공들의 사인과 촬영장면이 담긴 사진도 만날 수 있다. 박신양이 3일간 묵었다는 301호실에서 내려다보는 바다풍경은 한폭의 풍경화 그 자체다. 실내수영장도 갖추고 있어 아이를 동반한 가족여행이 한결 편안하고 안전하다. 해수사우나와 찜질방, 강당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어 기업체의 세미나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일본의 시골 기타마쓰교육위원회 주최로 지역 주민의 봉사제도인「일일교사」가 정내의 초․중등학교에서 활용되고 있다. 이 사업은 1999년도에「학교교육을 보다 풍부하게 하자」라는 취지에서 시작된 기획이다. 현, 정 직원을 비롯하여, 정년 퇴직한 전 교사, 민간인 등 지역주민이 교육현장에 참가하여 아이들의 풍부한 성장을 돕고 있다. 지도 인사는 43명이 등록하고 있으며, 책 읽어주기, 스포츠, 그림그리기, 다도 등 17개 분야이다. 한 초등학교의 교실에서, 상공회의소 전 전무이사 아카기씨(67세)가 바쁘게 판서를 시작하였다. 매주 1회, 월요일에 있는 2학년을 대상으로 한「책 읽어주기」수업이었다. 판서를 끝내자 2학년 1반 아이들이 들어 왔다. 「셈하기 노래」가 시작되었다. 「“소다”촌의 촌장이 크림소다를 마셨다고 합니다. 계속 10번 먹었다고 합니다…」(‘~었다고 합니다’는 일본말로 ‘소다’라고 한다) 「“소다”는 몇 번 나왔지요?」라고 아카기씨가 질문하자, 아이들은 「18번!」「20번!」이라고 대답한다. 「정답은 22번입니다」라고 아카기씨가 답을 확인하였다. 「맞혔다 -」「틀렸다」라고, 아이들의 환성이 메아리쳤다. 만담에서 말하는「관객을 사로잡는 화법」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에는「종이 연극」을 하고, 맨 마지막에는「책 읽어주기」를 했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아카기씨의 「낭독」의 세계로 점점 빠져들어 갔다. 아카기씨는 일일교사 그룹「이야기 택배」의 이야기꾼이 된지 벌써 6년째가 된다. 「영상문화 속에서 자란 아이들을 독서의 멋진 세계로 끌어 들이고 싶다」라고 생각한 것이 계기이다. 현재 30대부터 70대까지 10명이 등록해 있다. 매월 1회, 연구회를 열어서 회원 상호간에 책 선택에서부터 강좌의 내용, 억양 체크 등을 하고 있다. 아카기씨는 「나이도 들었고, 문장 암기 등 예습 복습이 힘들지만 아이들을 보면 힘이 난다」라고 하며 웃는다. 1.2학년은 일주일에 한 번, 3~6학년은 한 달에 한 번, 수업을 받고 있다. 이 학교 교장은 「아이들의 반응도 점점 좋아지고 있다. 앞으로도 지역의 힘을 빌려서, 더불어 아이들을 키워나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 지역 교육위원회에 의하면, 1959년도 무렵 탄광 전성기의 초등학교 아동수는 3631명이었는데, 폐광과 저출산 고령화 영향으로 해마다 감소하여 금년도는 두 개 초등학교에서 348명으로 줄어들었다. 일일교사는 지역 활력의 원천인 아이들을 지역에서 키우기 위한「지역의 인적자원이」이다. 동교육위원회는 「기획 당초에는 응모자가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지역의 인적자원이 점점 늘어났다. 학교 현장의 필요에 따라 앞으로도 대처할 수 있도록, 귀중한 인재를 늘려 나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 한국의 정경과 정서를 듬뿍 담은 이 동요는 가사 덕분에 한동안 초등학교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즐겨 불렀다. 예전 우리나라 대부분의 시골에는 집 앞으로는 넓은 들판, 집 뒤로는 야트막한 뒷산이 있었고 저녁이면 당연히 집집마다 굴뚝에서 몽글몽글 하얀 연기가 솟아올랐다. 어쩌면 추상회화를 연상케 하는 저녁연기는 어머니 품속과 같지만 이 아름다운 저녁연기는 아쉽게도 지금은 보기 힘들어졌다. 이젠 저녁연기에 대한 추억이 없는 사람이 더 많다. 보온과 소독 효과에 탁월한 기능 발휘 옛날에는 집집마다 굴뚝에서 뿜어내는 하얀 연기로 저녁시간을 알았다. 저녁 무렵이면 굴뚝에서 나온 연기로 마을이 온통 자욱했다. 이러한 굴뚝 연기는 아궁이에 불을 피웠을 때 뽀얀 색을 내며 지붕 위로 솟아오른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기나 소죽을 끓일 때도 고유의 볏짚 냄새와 함께 굴뚝에서는 연기가 난다. 추운 겨울날 바람이 내리 불면 연기가 아궁이로 몰려나와 소죽을 쑤던 눈이 눈물범벅이 되기도 했다. ‘연가(煙家)’라 하면 연기 나는 집이란 뜻이 되겠지만 실제 전통적인 한국 주택의 굴뚝 위에 얹어 놓은 부재의 일종으로 고유한 명사이다. 연가는 진흙으로 빚어 구워낸 조그만 기와집 모양의 도예품으로 벽돌로 높직하게 쌓아올린 네모 굴뚝 위에 한 개 또는 여러 개로 얹어 놓아서 굴뚝 연기가 은은하게 퍼져 나오게 만든 것이다. 말하자면 굴뚝에 씌우는 지붕 구실과 연기의 솟음을 고르게 하는 바람받이도 될 뿐 아니라 그 생김새가 잘 생겨서 굴뚝치레로서도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역할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러한 굴뚝 쌓기에 남달리 정성을 들였다. 또 그 굴뚝이 후원의 조경에 매우 큰 구실을 하고 있는 전통은 한국 독자적인 양식인 온돌방 구조에서 발생된 것이다. 굴뚝은 우리 전통 가옥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구조물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만 굴뚝은 단순히 연기를 집 밖으로 빼내는 구조물이 아니라 우리 건축 문화의 핵심이었다. 서양에도 굴뚝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구들 굴뚝과 서양 굴뚝은 차이점이 많다. 서양의 벽난로는 열기가 연기와 함께 그대로 굴뚝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구들 굴뚝 바로 밑에는 굴뚝개자리가 있어 고래를 통과한 연기가 집안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준다. 굴뚝이 처마 밑에 있기 때문에 굴뚝에서 나온 연기는 집안을 한 바퀴 감싸 돌아나가게 되는데, 이는 집 안팎을 소독하는 효과도 탁월해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굴뚝은 신분과 계층에 따른 굴뚝에 따라서도 모양이나 크기가 다르며, 지역에 따라서도 형태가 달랐다. 보통 굴뚝은 높아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데, 사찰의 굴뚝은 건물에서 떨어져 있는 듯 없는 듯 나지막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굴뚝은 기능의 가치로서도 그렇지만 그 가치를 넘어서 빼어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 겸손하면서 질박한 아름다움과 자연과 어울리는 자연미를 함께 지니며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포옹해 준다. 고장마다 집집마다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면서 푸근한 엄마 품을 느끼게 하는 굴뚝을 둘러보자. 겸손하고 검소한 소박미의 굴뚝치레 옛날 한 집안의 아침은 부엌문을 여는 아낙네의 치맛자락이나 잠시 후에 피어오르는 굴뚝의 하얀 연기에서 시작되었다. 황토색 벽과 초가지붕 위에 뽀얗게 솟아오르는 연기는 봉긋한 산봉우리와 어울려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내기도 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온 우리 민족은 과학이나 생활의 지혜를 이용하면서도 하나라도 손끝의 멋을 놓치지 않았다. 굴뚝을 만드는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궁이를 아무리 잘 만들고 구들을 아무리 잘 놓아도 굴뚝의 높이 조절을 잘못하면 실패작이 되고 만다. 보통 아궁이 맞은편에 굴뚝이 자리 잡았다. 우리가 살던 집들은 대부분 한 아궁이나 혹은 방마다 한 개의 굴뚝을 설치하여 서로 방해받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어릴 때 집 뒤로 가면 붉은 토관으로 처마까지 올려놓은 굴뚝도 있었고, 앞마당의 작은 구멍으로 타고 나오는 연기는 건넌방 아궁이 굴뚝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이처럼 서민들이 살던 집의 굴뚝은 초가의 뒤란이나 모퉁이에 있는 듯 없는 듯 숨겨 만들었다. 크기는 다양하지만 대개 처마의 높이를 넘지 않았다. 그리고 굴뚝의 재료는 주로 돌과 흙, 옹기나 나무 널빤지 같은 것이었다. 모양은 예술적 기교나 장식은 없었으나 생활의 지혜에서 우러난 손의 느낌을 살려 질박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다양한 조형미 뽐내는 상류층의 굴뚝 우리나라의 궁궐에는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궁궐의 후원은 물론이고 적어도 중류층 이상의 조선시대 주택에는 반드시 남향을 향한 밝은 후원이 있기 마련이다. 이 후원에는 으레 집 본채에서 조금 멀리 물러난 곳에 세워진 벽돌 굴뚝이 훤칠하게 세워졌다. 이 벽돌은 서양식의 붉은 벽돌이 아니라 회색 벽돌이며, 이 벽돌을 맵시 있게 쌓기 위하여 벽돌의 면과 네 측면을 모두 매끈하게 갈아서 사용했다. 이같이 네모 모양의 굴뚝은 굵기와 높이의 비례가 매우 쾌적해서 마치 하나의 탑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하나의 정원에 세운 조각 작품 같기도 하다. 이 굴뚝은 하나만 세워질 때도 있지만 주택 구조와 규모에 따라서 여러 개 같은 모양으로 세워지기도 한다. 후원이 넓으면 멀찍이 떨어지게 세워 저녁연기에 알맞은 석양의 정서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 중 최고의 아름다움과 조형성을 지닌 굴뚝은 단연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을 꼽을 수 있다. 이 굴뚝은 보물 제810호로 지정될 만큼 그 조형성과 장식성이 빼어난 것이다. 굴뚝의 기능에 충실하면서 꽃담으로서의 조형미도 살려 한국미를 간직한 유물로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경복궁 교태전 후원에 있는 아미산의 굴뚝은 우람하고도 멋진 굴뚝으로 유명하다. 아미산에는 굴뚝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교태전 방고래에서 지하로 뽑아낸 굴뚝들이 돈대 위에 우뚝 보기 좋게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다. 굴뚝으로서 기능뿐만 아니라 그 형태와 화면의 구성이 아름다워 교태전 후원의 장식물로도 효과를 겸비하고 있다. 교태전은 왕비의 중궁전으로 1394년(태조 3년) 창건되어 여러 차례 소실된 것을 다시 복구하였으며, 이 교태전의 굴뚝은 1865년 대원군의 불호령 아래 어느 명공이 정성을 다하여 쌓아올린 걸작품 중의 하나다. 그러나 1917년 창덕궁 대조전의 화재 후 일본인들이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교태전을 헐어 재목으로 사용하여 이 굴뚝만 남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굴뚝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그 중 궁궐의 굴뚝은 자경전 굴뚝과 같이 건물의 모양을 본뜬 것이 많다. 기와편을 벽돌처럼 쌓으면서 황토를 바른 ‘와편굴뚝’은 양반가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굴뚝이며 지붕 마감재로 기와가 많이 사용되는 사찰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와편굴뚝은 다른 굴뚝에 비해 규모면에서도 웅장함이 있고 투박하면서도 질박한 멋을 지닌다. 대체로 중상류층 건축에 만든 굴뚝의 재료는 검은 벽돌이나 기와, 돌을 주로 사용하였다. 서민의 굴뚝보다는 다양한 문양으로 화려하면서 조화롭게 꾸몄다. 그러나 번잡하거나 조잡하지 않고 본 건축과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도록 자연미를 최대한 살려 만든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지붕의 구성이 수직과 수평적 조화를 이루도록 만든 것처럼 대단한 조화미를 지니고 있다. 규모도 크고 웅장하게 만들었다. 위치는 대지가 넓고 크기 때문에 집이나 방과 가능한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지역마다 고유한 특색 가지고 있어 조그마한 집이면 후원 양지바른 곳에 아담하게 장독대가 자리를 잡고, 큰집 후원이면 으레 장대석으로 쌓은 돈대 위에 모란꽃나무와 괴석들이 곁들여 지고 훤칠한 굴뚝들이 자리를 잡는다. 이렇게 굴뚝은 굴뚝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원치레로도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다사로운 입김을 하늘 높이 내뿜는다. 이러한 굴뚝은 지방마다 고유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서양식 화독 굴뚝이나 화이어 프레스의 굴뚝처럼 추녀 가까이에 붙여 세우는 경우도 많지만 기와집 추녀의 곡선에서 구저분한 것을 떼어 놓기라도 하듯이 굴뚝은 멀찌감치 후원 돈대까지 땅 밑으로 연장해서 적당한 거리에 자리 잡아 모양 나게 세우기도 했다. 추운 지방은 굴뚝이 높고 아래지방으로 내려오면서 그 높이는 점차 낮아지는 양상을 보이며 우리나라 전통건축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능을 한다. 경기 중부지역에는 안방, 사랑방, 건넌방 등 각 방마다 아궁이와 반대편에 굴뚝을 설치했다. 서민가옥에는 통나무 한가운데를 파내어 만든 나무통 굴뚝과 깨진 항아리를 엎어서 사용한다. 강원 영동지역에는 안채에 한 개, 사랑채에 한 개가 대부분이다. 모양은 통나무 가운데를 파서 만든 예도 있고, 판자를 짜서 만들거나 돌로 축조하고, 그 아래에 밑 빠진 항아리를 엎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강원 영서지역에는 판자, 흙, 벽돌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한다. 굴뚝 아래 부위에 흙을 덧바르고, 굴뚝 높이도 처마까지 올라가 보온에 상당히 신경 쓰는 것이 특징이다. 경남지역에는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굴뚝을 처리한다. 부엌에서 때는 아궁이의 불이 안방 구들을 돌아 댓돌 정면에 작게 뚫어놓은 구멍으로 연기를 내뿜도록 설치했다. 그리고 충북지역에는 윗방 뒤나 사랑방 뒤에 굴뚝이 위치한다. 대개 규모가 크고, 제대로 갖춘 것과 높이가 낮은 자그마한 보조 굴뚝이 있다. 큰 굴뚝의 경우는 가운데를 파낸 통나무를 연기 통로로 세우고, 밑은 넘어지지 않게 흙돌담으로 받쳐 쌓고 겉은 보온을 위해 짚으로 둘러 사용한다. 보조굴뚝은 흙담으로 쌓아 올린다.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작품인 굴뚝 세상에 민족도 많고 나라도 많지만 한국 사람처럼 굴뚝치레에 세심하게 마음을 쓰고 또 큰 돈을 들이는 민족은 드물 것이다. 굴뚝 기단은 으레 상아빛의 화강석을 곱게 다듬어 받치기도 하고, 사람의 눈높이에 알맞은 부위에는 백회와 회색 벽돌, 때로는 주황색 벽돌로 길상문자(吉祥文字)나 장생류(長生類)의 도안을 모자이크해서 굴뚝 하나가 그대로 작품으로 보이도록 하기도 했다. 이러한 독특하고 고유한 아름다움의 자취인 굴뚝도 서양식 건축에 밀려서 하나하나 그 명작이 자취를 잃어가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굴뚝은 고향이다. 굴뚝에 관한 이야기는 굴뚝의 느낌을 확실하게 한다. 옛날 글자를 모르던 시절에 시집간 딸이 ‘굴뚝과 참새’를 그린 편지를 친정어머님께 보내 “가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은데 참새같이 바빠서 못 간다”고 표현했다는 이야기는 굴뚝이 말하는 사람의 심정을 잘 나타낸 것이다. 왜 굴뚝을 이런 의미로 사용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굴뚝은 우리에게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이름임에는 틀림없다. 굴뚝은 고향을 그리는 마음과 함께 언제까지 남아있을 것이다.
안개 속에 숨은 신비한 고층습원 대암산은 해발 1304m의 높은 산으로 강원도 양구군과 인제군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큰 바위산인 대암산은 산자락에서부터 정상까지 바위들로 이루어진 험한 산이다. 큰 바위가 품었던 지하수가 솟아나 넘쳐흘러 정상의 남서쪽 사면인 1180m의 구릉지대에 만든 것이 용늪이다. 높은 두 봉우리 사이에 여인의 가슴처럼 약 9200평 크기의 넓은 풀밭이 있는데, 이곳이 고층습원인 용늪이다. 용늪을 적시고 내린 산성의 젖줄은 인북천을 이룬 다음 소양강에 몸을 합친다. 일 년의 절반이 안개에 쌓인 용늪은 그 자체가 신비스러움을 더한다. 이곳은 연중 온도차가 크고 안개일수가 많아 습도가 높고 표층수의 증발량이 낮아 자연스럽게 늪이 형성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예전부터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신령스런 곳으로 취급을 받아온 이곳은 가뭄이 들면 ‘용연기우제’를 하늘에 드렸다. 양구 지방 민요인 돌산령 타령에 따르면 용늪은 이곳 사람들의 삶의 장소였다. ‘문바위 용늪에 얼레지 돋거든 우리 나 삼동서 나물 가세….’ 대암산을 문바위로 표현하고, 용늪 주변에는 얼레지 같은 산나물이 많이 자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대암산에는 많은 산나물들이 나고 있지만, 군사보호지역이라 일반 사람들의 접근은 어렵다. 용늪은 희귀식물이 많이 자라고, 늪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곳이다. 그래서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용늪은 금단의 땅이면서 동시에 꼭 가보아야 하는 희망의 땅이다. 비무장지대 학술조사 통해 알려져 근래에 많은 산지늪이 발견되기 전까지 용늪은 휴전선 아래쪽에 위치한 유일한 고층습원이었다. 고층습원은 물이끼와 사초류의 번성으로 지하수위가 평지보다 높아진 상태를 말한다. 일본의 야마사키 박사는 우리나라는 기후 조건이 맞지 않아 고층습원이 만들어지기 어렵다고 했지만, 1966년 한국자연보존연구회와 미국의 스미소니언연구소가 공동으로 실시한 비무장지대 학술조사에서 용늪이 세상에 알려졌다. 함경북도의 대택, 백두산의 장지와 오십리지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발견된 용늪은 발견 그 자체로 큰 흥분을 일으켰다. 이끼의 사체가 쌓여 만들어진 이탄층의 높이는 1~1.8m로 나타났고, 이를 토대로 추정된 나이는 약 5천 살이다. 또 이탄층에는 이곳에 살았던 식물의 꽃가루가 차곡차곡 쌓여 있어 이를 추출하여 분석하면 수천 년 동안의 기후변화와 식물의 천이과정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층습원을 특별히 ‘자연의 고문서’, ‘타임캡슐’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화분을 추출하여 분석한 결과 이탄층의 밑바닥에는 포자, 그 보다 1천년이 더 쌓인 지층에서는 신갈나무의 꽃가루 그리고 2천년이 지난 지층의 윗부분에서는 소나무 화분이 조사되었다. 용늪을 품고 있는 대암산은 식물구계 상 아주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만주 구계, 우수리 구계, 중국 구계의 북방 식물들이 남하하다가 남방계 식물과 만나는 곳이 대암산이다. 즉, 이곳에서는 북방계와 남방계 식물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남측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고층습원인 용늪은 그 희소성과 그 곳에 살고 있는 여러 희귀 곤충과 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천연기념물 제246호(1973년)와 자연생태계보호구역(1989년)으로 지정됐다. 또 우리나라가 람사협약에 가입하면서 용늪은 우리나라 제1호 람사습지이자 습지보호지역(1999년 지정)으로 보호받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근래에는 도솔산을 기점으로 대우산과 대암산을 엮어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처럼 대암산 용늪에는 많은 수식어가 붙어 있다. 꾸미는 말이 많다는 것은 용늪의 값어치가 높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렇게 소중한 용늪이 사람들의 무지에 의해 몸살을 앓고 있다. 늪의 한쪽 자락에 작전도로가 지나가면서 많은 토사가 흘러 늪이 육상화 되고, 1970년대에 체력단련을 위해 스케이트장을 만들면서 용늪의 일부가 갈라졌다. 또 곳곳에 파 놓은 배수구를 통해 늪의 수분이 빠르게 유출되면서 급격히 파괴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때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었지만, 만들어진 생채기는 아직도 둑의 형태로 남아 있으며 그 둑에는 탐방로가 설치되어 있다. 남과 북의 식물이 공존하는 산림 9부 능선에서 시작되는 용늪의 상부는 작전도로와 인접하고 있고, 그 외의 지역은 산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림을 이루는 나무 중 대부분은 신갈나무와 철쭉으로 되어 있고, 그 외에 개회나무, 백당나무, 함박꽃나무, 갈매나무, 병꽃나무, 미역줄나무, 딱총나무, 물푸레나무, 사스레나무, 고로쇠나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늪에는 쥐오줌풀, 처녀치마, 박새, 세잎종덩굴, 곰취, 좁쌀풀, 산오이풀, 개시호, 갈미사초, 대택사초, 물레나물, 터리풀, 물매화, 동의나물, 비로용담, 네 갈래로 벌어진 꽃 모양이 고깃배의 닻을 닮은 닻꽃, 끈끈이주걱, 금강초롱꽃, 제비동자꽃, 기생꽃이 자라고 있다. 수로와 물웅덩이 주변에는 물이끼, 갈미사초, 대택사초, 쇠털골이 자라고 있으며, 물웅덩이에는 조름나물, 개통발이 나타난다. 환경부 조사에 따르면 용늪에는 순수한 습원식물 22종류를 비롯하여 112종류의 식물이 있는데 여러 종류의 사초류와 물 주변에서 나타나는 왕미꾸리꽝이, 골풀, 달뿌리풀도 살고 있다. 이 중 숲속에서 자라는 함박꽃나무는 옥란 또는 천녀화로 불리는 북측의 국화이다. 6월에 피는 꽃잎은 6~9개이며 수술은 붉은빛이 돌고 꽃밥은 밝은 홍색이다. 용담과에 속하는 비로용담은 용의 쓸개인 것처럼 뿌리가 아주 쓴 맛을 낸다. 꽃은 여름에 가지 끝에 하나씩 달리는데, 벽자색으로 북측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다. 금강초롱은 한국특산종으로 8∼9월에 자주색 꽃이 피는데 종 모양이고, 줄기 위에 1∼2개가 붙거나 또는 짧은 가지 끝에 달린다. 백색 꽃이 피는 것을 특히 흰금강초롱이라고 한다. 북통발은 일명 개통발이라고 하는데 일반 통발과는 달리 먹이를 잡기 위해 벌레잡이 통을 매단 줄기를 땅속으로 길게 뻗는다. 지금까지 북통발은 대암산 용늪과 칠보산 습지에서만 기록된 매우 희귀한 식물이다. 용늪에는 앞의 여러 종류의 식물뿐만 아니라 복숭아순나방 등 224종류의 곤충이 서식하고,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새들도 많다. 군사시설로 제 기능 잃은 작은용늪 용늪을 오르는 길은 3갈래로 모두 해당기관(양구군청)의 허락을 받아야 출입할 수 있다. 하나는 돌산령 고갯길에서 군 작전도로를 따라 가고, 다른 하나는 광치고갯길에서 등산로와 임도를 따라 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양구생태식물원에서 등산로를 따라 가는 길이다. 용늪은 자연보호지역과 군사보호지역 안에 위치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다. 그래서 용늪과 대암산 정상으로 갈라지는 부분에 출입금지 안내판과 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초소에서 용늪으로 내려가는 길은 목재로 이루어진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이 탐방로는 용늪의 중심부까지 연결되어 있다. 용늪은 큰용늪과 작은용늪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큰용늪보다 위쪽에 위치한 작은용늪은 막사에서 흘려 내려온 토사에 의해 제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큰용늪은 폭 225m, 길이 297m의 달걀 모양이며, 늪 가운데는 폭 8m의 연못이 2개 있다. 이 연못은 매우 찬 산성의 물로 이루어져 있어 물고기는 살지 않지만, 여러 종류의 미생물들이 살고 있다. 물벼룩과 장구말이 살고, 이를 먹이로 살아가는 도룡뇽과 물두꺼비 및 개구리 등이 살고 있다. 비 내리는 9월 어느 날에 만난 용늪은 비안개에 쌓여 한치 앞도 내다 볼 수가 없었다. 일 년 중 절반이 안개로 쌓인다는 이곳에 비바람까지 불어대니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도 힘이 들었다. 다행히도 탐방로 주변에 물매화와 솔체꽃이 색깔의 대조를 이루면서 손짓을 하니, 금단의 땅 용늪에 오른 것 자체로 만족스러웠다. 전체 배경을 사진에 담지는 못했지만, 용늪으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 주위에서 진범, 눈개승마, 닻꽃, 만주송이풀을 만날 수 있었다. 작전도로를 되돌아 내려오면서 만난 길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금강초롱과 흰금강초롱은 그 자체가 등불이었다. 용늪은 일반인의 출입 통제 지역이라 이곳의 식물을 옮겨 심어 가꾼 곳이 바로 양구생태식물원이다. 양구군 동면 원당리에 위치한 식물원은 2004년에 개장했으며 400여종의 고산 식물들이 있다. 이곳의 학습장은 온실, 암석원, 수생습지식물원, 음지식물원, 약초원, 잣나무림, 천연보존림, 자생식물원, 야외학습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는 대암산과 용늪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심어 두었을 뿐 아니라, 지리산과 금강산의 고산지역에서 자라는 칼잎용담, 개느삼, 깽깽이풀, 산꼬리풀, 둥근잎꿩의비름, 제비동자꽃, 금마타리, 하늘매발톱, 좁은잎구절초, 솔체꽃, 병조희풀, 솜다리, 노랑무늬붓꽃 등도 만날 수 있다. 대암산의 남서쪽 계곡에 위치한 이곳은 자연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 자연친화적 식물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한반도 정중앙에서 용이 승천하다 끈적끈적한 용늪은 생물체뿐만 아니라 사람이 만든 피조물까지도 빨아들이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피의 능선으로 불리는 도솔산 전투를 살피던 미군 헬기가 포연 속에 훤하게 보이는 초록의 들판을 잔디밭으로 생각하고 헬기를 내리게 된다. 용늪에 내린 헬기는 늪에 빠지게 되고, 결국 탑승자들이 걸어서 산을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처럼 늪은 한 번 빠지면 헤쳐 나오기 힘든 곳이다. 용늪의 북동쪽 지역에는 움푹 파인 모습을 하고 있는 양구군 해안면이 있다. 일명 해안분지로 불리는 이곳은 23㎢ 넓이의 분지 전체가 해안면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운석이 떨어져 분지가 만들어졌다는 설과 차별침식작용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지만, 근래에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 모양이 사발 모양이라 한국전쟁 중에는 ‘펀치볼’이라는 애명을 얻기도 하였다. 해안(亥安)이란 돼지가 마을을 편안하게 했다는 뜻을 지니는데, 움푹 파여 습한 곳이라 예전에는 뱀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한 도사가 집집마다 돼지를 키우라고 하여 길렀더니 뱀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의 이름도 해안이 되었다고 한다. 해안면으로 가는 길은 인제·원통을 거쳐 가는 길과 양구읍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돌산령을 넘어 갈 수 있다. 돌산령에서 만나는 아침의 해안분지는 구름이 가득 찬 그릇의 모습이라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비온 후 날씨가 맑아질 때, 분지를 이루는 산봉우리에만 구름이 걸리고, 분지에는 햇빛이 내려쬐는 모습을 보여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처럼 대암산과 도솔산 및 대우산에 쌓인 해안분지는 풍광이 아름답고, 다양한 생물들의 삶의 터전이 되고 있다. 새끼를 낳는 생물들의 모태는 배꼽이다. 배꼽은 생명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인데, 한반도의 배꼽이 바로 용늪이 위치하는 양구군이다. 양구군 남면 도촌리 산48번지는 동경 128도, 북위 38도로 한반도 정중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독도와 마라도를 포함하면 나라의 중심은 양구이고, 육지 자체만 따지면 경기도 포천이 중앙이 된다. 한반도 중앙에 위치한 양구에 용이 승천한 용늪이 있다는 것은 우연히 아닐 것이다. 남과 북의 식물이 만나는 대암산 용늪, 국토의 정중앙에서 서로가 합쳐 하나가 되라는 메시지를 승천하는 용이 전달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용늪은 금단의 땅이면서도 동시에 희망의 땅인 것이다.
학문으로 대를 이어오고 있는 집안은 스위스의 세계적인 언어학자인 소쉬르 가문을 들 수 있다. 소쉬르 가문은 5대째 학자를 배출한 세계적인 학문의 명가이다. 소쉬르의 조부 니콜라스 데오도르는 즈네브 대학의 지리학과 광물학 교수를 지냈고, 부친 앙리는 지질학자로 미국과 멕시코를 탐험하기도 했다. 소쉬르는 세계적인 언어학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산 윤선도 가문이 실용적인 학문을 연구하는 가풍을 대대로 이어왔다. 양반가문이지만 공재 윤두서(1668~1715)에서 시작해 그 아들 윤덕희 - 윤용에 이르는 3대 화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양반들은 책을 읽고 벼슬을 해야 성공하는 시대에 이와 거리가 먼 그림에 몰두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 아들이 3대에 걸쳐 화가가 된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진화론 처음 제기한 다윈의 祖父 할아버지가 연구했던 학문을 손자가 물려받아 연구하고 또 그 손자의 후손들이 그 연구를 완성했다면 그 가문은 세상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 집안이 인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규명한 ‘진화론’을 내놓은 찰스 다윈(1809~1882)의 가문이다.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은 진화론에 대해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인물이다. 그 손자인 찰스가 할아버지를 이어 본격적으로 연구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진화론을 내놓았다. 이는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기독교의 창조론을 뒤엎는 획기적인 가설이었다. 찰스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1731~1802)은 과학자이자 의사, 발명가, 시인이었다. 그는 18세기 중엽 당시 영국에서 매우 유명한 의사였다. 1756년부터 영국 리치필드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불치병 환자를 구해 일약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 생태에 대한 방대한 내용을 담아 진화론을 제기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에라스무스가 처음으로 진화에 관한 관념을 피력했을 때는 1770년이다. 그는 그가 타고 다니던 마차에 라틴어로 ‘E Conchis omnia’를 붙이고 다녔다. ‘모든 것은 조개로부터 왔다’는 뜻이다. 즉, 만물이 조개로부터 탄생했다는 의미로 진화론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이지만, 그는 진화론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어 마차에 살짝 그려 넣고 다녔다. 그러다 혹시 부자들이 이를 알아챌까봐 이를 지우고 책의 표지에다 새겨 넣었다. 부자들은 대부분 기독교도들이어서 창조주인 하느님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조개에서 만물이 탄생했다고 한다면 경악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의사인 그에게 치명적이다. 하느님을 불신하는 사람에게 아무도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가 유명한 명의였듯이 아들인 로버트 역시 의사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 역시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진료를 해주었다. 찰스는 아버지와 동행하면서 가난한 환자들을 접하며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배려하는지,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하면서 진료를 어떻게 하는지를 보며 철이 들어갔다. 조부의 책 통해 자연학자 꿈 키워 어린 시절 다윈의 관심은 자연사에 쏠려 있었다. 아버지가 틈틈이 가르쳐준 동식물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주된 관심으로 변해간 것이다. 찰스는 당시 화제가 된 길버트 화이트의 〈셀본의 자연사〉를 읽으면서 자연에 대한 관심에 점점 빠져들었다. 찰스는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의학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당시에는 마취제 없이 수술을 했고 찰스는 아버지를 따라 왕진을 갔다 수술하는 광경을 보고 너무 끔찍해 의사에 대한 매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한다. 반면 여행과 자연학에 대한 독서를 열심히 했다. 특히 독서로 자연사에 대한 관심을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고민은 깊어갔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에게 의학을 포기하고 목사가 될 것을 권유했다. 아버지의 생각으로는 당시 곤충 수집을 하는 목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사에 관심이 많은 찰스의 적성을 살리면서 직업인으로 살기에는 목사가 안성맞춤이었다. 자연학자로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목사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관심분야인 자연사도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찰스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19살에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과로 옮겼다. 찰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이 대학의 교수로 식물학자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와 지질학자인 애덤 세지윅이라는 두 신부 과학자를 알게 되었다. 이들에게서 동·식물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우면서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이들과의 만남으로 그는 신부 과학자라는 인생의 목표에서 자연학자로서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잡았다. 다윈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의외로 쉽게 다가왔다. 헨슬로가 찰스에게 세계를 항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것이다. 당시 영국 군함 비글호가 해안조사를 위해 태평양과 인도양을 항해하는데, 여기에 승선해 자연관찰을 하라는 제안이었다. 찰스는 5년 동안 항해하면서 진화론을 규명할 역사적인 단서를 얻게 된다. 빌 게이츠가 폴 앨런과 스티브 발머를 만난 경우처럼 찰스 다윈도 친구와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도약하게 했다. 아들을 목사로 만들어야겠다는 아버지는 처음에 아들의 여행을 반대했지만 아들이 여행을 통해 과학적인 발견을 접목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허락했다. 찰스는 18살 때에 할아버지가 쓴 〈주노미아〉를 읽고 크게 감탄했다. 28살 때에는 노트에 자기 생각들을 기록하면서 자기가 할아버지를 이어 진화론을 연구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할아버지 에라스무스가 1794년에 출간한 〈주노미아〉는 그의 손자가 1859년에 출판한 〈종의 기원〉보다 65년 앞서 진화가설을 제기한 것이다.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출판되었고 독일어, 프랑스어, 이태리어로 번역됐다. 에라스무스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식물과 동물들은 원시의 바다에서 자연적인 생명력에 의해 발생한 극도로 미세한 현미경적인 존재들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아버지의 후원으로 연구 완성 다윈이 5년 동안의 항해에서 돌아온 것은 28살인 1837년이다. 다윈은 이때부터 〈종의 기원〉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미뤄야 했다. 결혼을 하면 장기간 여행을 할 수 없을뿐더러 생계비를 벌기 위해 대학교수 같은 직업을 구하든지 근검절약하며 근근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혼이 부담스러웠던 그는 고민 끝에 아버지에게 결혼문제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매년 수입이 1만 파운드이고 재산이 10만 파운드가 된다면서 전폭적으로 후원해주겠다고 말한다. 재력가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는 평생 돈 걱정 없이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결국 연구를 시작한 지 20년만인 50세 때에 세계사를 뒤흔든 연구 성과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찰스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교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돈에 대한 활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돈을 모으지만 그 돈을 쓸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모으는 데 열중한다. 그래서 나중에 죽음에 임박해서는 가족끼리 돈에 대한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는 돈을 왜 모으는지에 대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녀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돈은 가문의 악의 화신으로 변한다. 찰스와 아버지 로버트는 돈 문제로 부자 간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아버지는 모아둔 돈을 아들이 연구에 전념하게끔 전폭적으로 후원해주었다. 아버지는 의사와 재테크를 통해 모아둔 재산을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고 가문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뒤흔든 진화론 연구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로버트는 재력가인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 어떻게 돈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부자아빠들이 다윈의 아버지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을 쌓아놓고도 자녀들에 게 무관심한 부모들은 얼마든지 많다. 발명왕으로 갑부가 된 에디슨은 자녀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아 세 자녀들이 모두 가난뱅이로 살아야 했다. 또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억만장자였던 피카소는 화가인 아버지가 그를 위대한 화가로 만드는 데 헌신했지만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피카소)을 따르면서 아버지를 ‘배신’한다. 더욱이 여성편력(7명의 여성과 동거)이 심했던 그는 아들과 손자들을 방치해 결국 장남은 알코올 중독으로 자살하고 손자도 자살하는 비운의 가정으로 만들었다. 손녀에 의해 빛을 본 〈종의 기원〉 다윈 가문이 진화론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대를 거듭하면서 진화론 연구를 진행해왔다는 점이다. 할아버지가 진화론 연구에 첫 깃발을 들었다. 할아버지는 무엇보다 후손들에게 자연과학에 매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찰스의 아버지 또한 평생 아들이 진화론을 규명할 수 있도록 연구를 뒷받침하는 등 인생 스승으로서 멘토 역할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찰스의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공동으로 연구를 했다. 찰스의 손녀는 할아버지가 쓴 자서전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애썼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독교에서는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150년 전에는 자칫 진화론을 주장했다가 가문이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찰스는 이와 관련된 민감한 내용은 빼고 자서전을 출간했었는데, 그의 손녀가 온전한 자서전을 내 할아버지의 연구업적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진화론은 당시 서구사회에서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지동설처럼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경우도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갈릴레이가 천문학자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에서 그를 전속학자로 모셔와 연구를 후원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세계적 대문호인 괴테도 바이마르 영주인 아우구스트 공작이 평생 후원자가 되었기에 마음 놓고 일생을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학자나 예술가들이 자신의 후원자를 만난다는 것은 생업에 신경 쓰지 않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찰스 다윈은 다름 아닌 부자아빠가 평생 후원자였기 때문에 진화론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찰스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을 출간했다.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는 진화론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진화론을 주장한 그의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진화론은 다윈 가문이 할아버지와 손자, 손자의 손자까지 5대가 매달려 연구해온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절묘한 가학과 가업의 가문 결합 그런데 다윈 가문이 진화론을 통해 가학을 대물림했다면 다윈의 처가는 가업을 대물림한 집안이다. 다윈의 처가는 지금도 도자기회사로 유명한 웨지우드 가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다윈의 처가가 다름 아닌 그의 외가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처갓집을 둔 것이다. 이는 다윈의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인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에라스무스는 1776년경에 당대의 과학자와 자연주의 철학자들의 사교 클럽을 만들었다. 이 모임에는 18세기 영국에서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다 모였다. 회원으로는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왓트, 산소를 발견한 조셉 프리스틀리, 위대한 도예가 조시아 웨지우드 등이 있었다. 미국 사람으로서는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된 토마스 제퍼슨과 벤자민 플랭크린 등도 포함돼 있다. 웨지우드 가문은 25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다. 조시아 웨지우드는 에라스무스 다윈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다. 에리스무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에든버러 대학에서 고전문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반면 조시아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고 열다섯 살에 형에게 도제교육을 받아 도기장이 되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처럼 조시아도 과학과 발명에 푹 빠져 있었고 정치적 견해와 사상에서도 서로 통했다. 조시아는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한 덕분에 사업을 크게 번성시켜 한때 유럽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를 둔 도자기공장이 됐다. 또 영국여왕이 찻잔세트를 주문하면서 웨지우드는 ‘황실도공’의 직위에 올랐다. 이들의 우정은 결국 양가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인연으로 웨지우드 가문은 두 번에 걸쳐 다윈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게 된다. 찰스 다윈의 어머니가 웨지우드 가문이고 아내 역시 이 가문의 딸로 다윈은 외사촌과 결혼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다윈 가문과 웨지우드 가문은 절묘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윈 가문은 정신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가학(진화론)으로 명가를 이루었고, 웨지우드 가문은 먹고사는 가업(도자기)을 통해 세계적인 명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대졸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등 갈수록 먹고살기가 힘들어지고 있어 우리나라도 ‘가업’ 문화가 이미 불기 시작했다. 음식점에 가도 2대가 일하는 광경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가업만들기가 유행처럼 붐을 이룰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가업과 함께 대대로 내려오는 가학(家學)이 있다면 더 격이 높아질 것이다. 같은 학문을 가족들이 공유하고 또 대를 이으면서 연구할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좋은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밥’만으로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밥과 함께 정신적인 양식이 필요한 것이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이 가업이라면, 정신적인 양식은 가학이라고 할 수 있다. 끝 - 이번호를 끝으로 세계 명문가의 교육철학 연재를 마칩니다.
“아름다운 화포습지 사랑으로 보호해요” 2008년 10월 경상남도에서 제10차 람사총회가 개최된다. 160개국 정부대표와 국제기구, NGO 관계자가 참석해 환경올림픽이라 불리는 람사총회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됨에 따라 환경교육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에 경남도교육청에서는 올해 습지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습지교육 문화 확산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안군 가야초(교장 이재영)를 비롯해 창원시 화양초(교장 배철), 창녕군 창녕중(교장 김태인), 김해시 한림초(교장 박금남) 등 4개교를 습지시범학교로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그 중 화포습지 보호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한림초를 찾았다. 교육공동체 하나로 묶는 체험 활동 화포습지는 낙동강으로 흐르는 화포천을 따라 길게 형성된 하천형 습지로 습지의 중앙부가 한림면 일대에 형성돼 있다. 2007년 말 습지보호구역 선정을 추진 중이며 136종의 식물, 116종의 곤충류, 17종의 어류와 멸종 위기의 조류 등 다양한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는 귀중한 자연유산이다. 시범학교로 지정되기 전부터 매달 화포천 주변에 대한 정화 활동을 해온 한림초는 작년부터 화포습지 살리기 계획을 추진 중이었다. 이 같은 활동의 결과로 한림면내 4개 초등학교 중 한림초가 ‘화포습지 사랑 체험활동을 통한 습지보전 실천의식의 생활화’ 습지교육 시범학교로 선정될 수 있었다. 박금남 교장은 “평소 습지에 대한 관심을 기울인 것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며 “대표가 된 만큼 습지교육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림초가 시범학교를 운영하면서 가장 큰 비중을 두는 것은 지역 민·관·기업의 동참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비록 학생들이 매달 정화활동을 펼치고는 있지만 역부족일 수밖에 없고, 지역주민들도 화포습지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림초에서는 화포예술제 개최, 교사·학생·학부모·지역 주민·습지 관련 전문가로 구성된 화포지킴이 조직·운영,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습지 관련 강연회 등의 행사와 홍보를 위해 환경보전 홍보 통신문 제작, 홈페이지 구축 등에 힘쓰고 있다. 특히 지난 6월 17일 열린 ‘화포습지 사랑 가족 체험 한마당’은 지역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학부모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일요일에 개최한 이번 행사는 학생과 학부모를 비롯해 지역 주민 120여명이 참가해 보트 탐사, 곤충 및 식물 관찰·채집, 풀을 이용한 곤충 만들기, 화포습지 백일장, OX 퀴즈 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이 중에서도 보트탐사는 쌍안경이나 사진으로만 보던 화포습지의 식물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돼 큰 호응을 받았다. 5학년 정순호 군의 학부모 이남진 씨는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참석했는데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고 그동안 무심했던 화포습지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게 된 계기가 됐다”며 “앞으로 아이와 함께 습지 보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 군도 “엄마랑 같이 오니 너무 좋고, 습지 주변에 있는 풀들을 더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즐거워했다. 한국토지공사와 자매결연 맺어 한림초는 이런 활동 외에도 학생들이 환경보호 체험을 경험할 수 있도록 부산 이기대공원 일대의 생태기행에 참가해 바닷가 야생화, 해양생물 관찰 등을 하고 낙동강 시범지역 관리단 주체의 봉암갯벌 도요탐조대회에도 참석했다. 이 같은 학교의 노력이 알려지면서 지난 4월엔 한국토지공사 경남지역본부(이하 토지공사)와 2008람사총회의 성공적 개최와 화포습지 보전활동을 위한 자매결연을 맺었다. 토지공사는 한림초의 습지시범학교 운영을 위해 연간 1000만원을 지원하고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을 위해 매년 800만원의 장학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또 한림초에서 개최하는 각종 행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토지공사 조수제 업무지원팀 차장은 “직원들이 학교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면서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며 “앞으로도 한림초의 행사에 꼭 참여해 학교 중심의 습지보전에 작은 힘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재평 교감은 “토지공사의 지원으로 고무보트, 쌍안경, 현미경 등 습지탐사에 필요한 장비를 갖출 수 있었다”며 “특히 고무보트를 통한 화포습지 탐사가 가능해져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주변 학교 학생들의 습지교육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고마워했다. 교사들의 자발적 참여가 원동력 한림초의 습지교육과 환경보호 운동은 지역 언론에서도 높은 관심을 보일만큼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런 결과는 무엇보다 한림초 교사들의 부단한 노력이 밑바탕이 됐다. 습지에 대한 이해를 위해 학교 자체 연수를 실시하고, 수업 자료와 홈페이지 자료 구축을 위한 사진을 찍기 위해 직접 수백만원대의 카메라를 구입해 휴일마다 화포습지를 찾는 교사들도 있다. 지난 5월엔 생태보전 시민단체인 ‘사단법인 초록빛깔 사람들(대표 김의부)’과 화포습지 보전 협정을 맺고 자연교육용 기자재·전문 강사·관련 자료 등을 지원받고 있다. 또 ‘김해 생태보전 교사 모임’과도 연계해 습지 연구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 이 모임의 최진호 교사(김해 활천초)는 “한림초 선생님들의 적극적인 열정이 대단하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습지보호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김외규 교사는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학부모에게 알리기 위한 노력들이 조금씩 효과를 보고 있는 것 같다”며 “앞으로는 한림면이 아닌 김해시민 전체가 앞장서서 지역 환경을 보호하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한림초는 앞으로도 습지 체험 학습자료센터 구축, 자연생태학습장 조성, 습지체험 학습지 〈나의 사랑 화포〉 제작, 관찰탐구대회 및 습지 관련 전시회 개최 등 다양한 활동을 계속할 예정이다. 방학을 이용해 김해시 학교 학생이 참여하는 습지체험 캠프도 준비 중이다. 박 교장은 “학생과 환경을 사랑하는 우리 선생님들이 계속 노력하기 때문에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지켜봐 달라”고 당부했다.
Q1. 해외유학으로 인한 유학휴직과 재외국민교육기관의 고용으로 인한 고용휴직의 사유가 중복될 때 어느 휴직을 적용해야 하는지요? A1. 「교육공무원법」 제44조 제1항 제5호 내지 제10호에 의한 휴직은 본인의 휴직신청에 의해 임용권자가 당해 기관의 업무형편 및 인력사정 등을 고려하여 휴직 여부를 결정하는 사항이므로 동 사안은 휴직하고자 하는 자가 먼저 휴직사유를 결정하여 신청하면 해당 호의 휴직사유에 대해 인사권자가 그 타당성 여부 등을 검토해 결정하게 됩니다. A2. 현재 해외유학을 사유로 유학휴직 중인데 휴직기간 만료 시 복직 후 곧바로 국제기구 또는 외국기관에 임시로 고용될 경우 고용휴직이 가능한지요? Q2. 해외유학휴직은 타 휴직과 달리 휴직 기간 중에도 보수의 50%를 지급하고 경력평정에서도 5할을 인정하는 등 공무원의 능력향상과 행정발전을 도모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므로 국가가 직접 훈련계획을 수립·시행하는 특별훈련파견에 준하여 특별 관리하도록 한 「해외연수를위한휴직처리지침」에 따라 휴직기간 만료 후에는 즉시 직무에 복귀해 관련 훈련분야에서 근무해야 합니다. 해외유학 휴직 기간 만료 후 다시 국제기구나 외국기관에 고용된 것을 사유로 휴직하는 것은 유학휴직을 허가한 본래의 취지와 상반되지만 해당 교원의 청원휴직으로써 신청한 고용휴직의 허가여부는 인사권자가 최종 결정하게 됩니다. 참고로 해외 어학연수 목적의 휴직은 재직 기간 중 총 2회까지 가능하되, 동일 목적의 휴직은 복직 후 5년 경과된 자에 한해 신청할 수 있습니다. Q3. 최초에 「교육공무원법」에 의해 고용휴직을 신청해 휴직 중에 있는 교원이 외국에 체류하면서 고용휴직을 해외유학휴직으로 변경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A3. 「국가공무원법」 제71조 제2항 제1호(국제기구·외국기관에 임시고용)의 사유로 현재 휴직 중에 있는 공무원에 대해 휴직사유를 동조 동항 제2호(해외유학)의 사유로 변경하여 휴직을 명하는 것은 복직 등 다른 임용행위 없이 휴직 중인 자에게 다시 휴직이라는 이중 인사발령을 명하게 되는 것으로 인사발령 절차상에 문제가 있습니다. 휴직사유가 소멸되면 직무에 복귀할 것이 예상되는 점 등 휴직자 복귀 시의 인사처리 취지에 비추어 볼 때 복직 절차를 거친 후 다시 다른 사유로 휴직을 명할 수 있으나(복직된 날에 동일자로 다른 사유로의 휴직을 명할 수 없음) 휴직 중인 자를 휴직사유만 변경해 휴직을 명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 교사의 전문성 신장을 위한 자기장학의 구체적인 방법을 쓰고, 교내 자율장학의 활성화 방안에 대해 논술하시오. 1. 序論 교직은 미성숙자의 정신 영역을 다루는 전문직이다. 전문직은 자율성과 책임성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지적능력을 갖고 봉사하는 직업윤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학부모와 학생의 교사폭력 행위나, 교사평가제 도입 및 부적격 교사 퇴출 등의 문제제기로 교직사회가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 교권과 신뢰 회복을 위해서는 자기장학을 통한 전문성 확보가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즉, 외부의 간섭이나 통제 없이 교사 스스로 자기발전을 위한 계획에 따라 실천하고, 그 결과에 따른 자기반성과 수정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성장과 자기발전을 이루는 자기장학이 요청된다. 2. 自己奬學의 具體的 方法 자기장학이란 교사 개인이 스스로 장학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나, 장학과정에서 장학사나 교장 또는 경험이 많고 능력 있는 동료교사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자기장학의 방법으로는 우선, 자신의 수업을 녹음 또는 녹화하여 분석 및 평가하거나, 학생들의 의견조사, 교육전문가나 장학담당자들과의 면담을 통한 지도·조언 및 정보를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다음으로 교양 및 전공서적 등의 정보자료 활동, 야간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의 수강을 통한 전문성 신장이 있으며, 기타 각종 연수, 교과연구회, 학술발표회, 강연회 연구·시범수업 공개 그리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등 방송매체가 제공하는 교원연수와 관련된 프로그램 시청 등이 있다. 3. 校內 自律奬學의 活性化 方案 교내 자율장학은 교사의 교육지도 능력을 신장시키는데 주안점을 두며, 학교장을 비롯한 전 교원이 장학담당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참여하기 때문에 감독적 의미보다는 교사의 능력 개발이라는 차원에서 협동적 장학의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교내 자율장학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우선, 장학에 대한 올바른 목적의식이 필요하다. 장학담당자와 교사의 경우 교사의 성장발달, 특히 교수·학습의 개선에 장학의 기본목적을 두고 상호신뢰의 분위기에서 장학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목적성의 원리). 둘째, 학교장학은 교사의 실제적 문제해결과 필요에 부응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장학담당자는 교사 개인 및 학교의 필요를 잘 파악하고, 실질적 지도를 위해 사전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필요성의 원리). 셋째, 교사는 적극적이고 능동적 자세로 문제해결에 참여해야 하며, 장학담당자도 교사의 문제해결에 조력자이자 봉사자라는 생각으로 장학에 임해야 한다(협력성의 원리). 넷째, 교사의 성장·발달이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장학지도자는 그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지도·조언할 때 권위와 신뢰가 뒤따르게 된다(전문성의 원리). 끝으로 교내장학의 결과는 교사의 성장·발달, 더 나아가 전 교수·학습 상태의 개선향상에 기여해야 한다. 그러므로 임상장학이나 자기장학, 동료장학, 약식장학, 선택적 장학 등의 방법을 활용하여 교내장학의 목적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효과의 원리). 4. 結論 교내장학은 교사, 수업, 학생과 가까이 있어서 학교현장의 여러 과제들을 직접 그 속에서 같이 고민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함으로써 현장교육을 실천하는데 직결되고, 장학활동을 교직원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수행한다는 면에서 효율성이 높은 장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장학에 효과적인 교내 자율장학 활성화를 위해 장학담당자들의 전문성 신장과 더불어 교사들의 적극적인 문제해결 자세가 요청되고, 이를 위한 전문적 풍토 조성과 여건개선이 필요할 것이다. ※ 참고자료 교내 자율장학의 활성화 1. 교내 자율장학의 의미 가. 일반적으로 장학은 교수·학습의 효율화를 목적으로 교사의 전문성 신장, 교육과정 운영 및 학교경영의 합리화를 위해 제공되는 지도, 조언, 조정, 정보 제공, 자원봉사 등 일련의 전문적·기능적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나. 교내 자율장학은 단위학교에서 교육활동(특히 교수·학습 활동)의 개선을 위하여 자율적으로 교장·교감을 중심으로 하여 전체 교직원들이 공동으로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다. 따라서 교내 자율장학은 단위학교 내에 있는 교원들이 학교교육 활동의 개선을 위하며, 또한 교원들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활동들을 ‘스스로 계획(결정)하고, 계획한 것을 스스로 실천해 보고, 실천한 결과를 스스로 평가해 보고, 미래에 보다 나은 계획과 실천을 위한 각오와 의지를 새롭게 하자’는 일련의 순환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라. 교내 자율장학은 학교 중심성, 자율성, 협력성, 다양성, 계속성, 자기 발전성을 그 개념적 특징으로 갖는다. 교내 자율장학에서 다를 수 있는 영역은 크게 교사의 전문적 발달영역, 학교의 조직적 발달영역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장학의 수혜자인 교사들의 다양한 요구나 필요, 교사들의 경험이나 특성을 고려하여 수업장학, 동료장학, 약식장학, 자체연수 등 다양한 방법이 활용될 수 있다. 마. ‘수업방법에는 왕도가 없다’라는 말이 있지만, 학교교육의 생명은 수업이고 교육의 질을 늘이기 위해서는 수업의 효과를 높여야 하고, 수업의 효과를 높이려면 장학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점에서 교내 자율장학의 활성화는 매우 중요한 활동이다. 2. 교내 자율장학의 문제점 가. 장학력이 매우 약화되었다는 지적이다. 교내 자율장학을 이끌어갈 교장·교감 역시 지위에서 나오는 강력한 힘도 없고, 수업장학을 한다고 해도 수업계획, 수업참관 및 분석, 평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전문적인 지도·조언을 해주는 경우가 별로 없다. 결국 교수·학습 개선이라는 측면에서는 장학적 방임상태라는 것이다. 나. 장학에 대한 산뜻한 기술, 방법이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새교육이 도입된 이래 수없이 학습이론, 수업형태, 방법, 체제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해왔으나, 장학에 관한 이론이나 장학기술, 방법들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많은 교육학자나 장학직, 교장·교감들도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지나쳐 버렸다. 따라서 장학을 담당한 전문직이면서도 전문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감마저 없는 듯싶다. 앞으로는 학교현장에서 객관성, 과학성, 타당성에 바탕을 둔 장학기술, 방법을 연구 개발해서 발전시켜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 장학에 대한 교사들의 부정적인 거부감이 문제다. 교수·학습에서 교사와 학생의 생동감 있는 상호작용이 중요한 것처럼 장학의 출발은 장학담당자와 교사의 원만한 상호작용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장학담당자는 ‘도와주겠다’고 하고 ‘도와 줄 것이 있다’고 하는데 교사는 도움이 필요 없고, 또 도와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원만한 장학이 이루어질 수 없다. 교사가 장학에 대한 거부감을 지우고 교직을 담당한 전문인으로서 성장해야겠다는 동기유발을 할 수 있도록 현장에서 분위기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 시급하다. 라. 장학의 획일성에도 문제가 있다. 학교마다 교원 구성이 다르고 지역 특성이 다른데도 거의 비슷한 방법이나 형태의 자율장학을 하고 있다. 교내 자율장학 형태를 보면 대개 일정을 정해서 학년 단위로 전원 공개를 하거나, 몇 개 반을 선정해서 수업공개를 하고, 오후에 모여 형식적인 평가 반성회를 갖는 예가 많다. 수업공개는 교과별 또는 수업형태별로 다양한 방법으로 정해서 계획 단계에서부터 상호의견 교환을 통해 수업안을 작성하여 공개하게 하고, 과학적이고 타당성 있는 분석 도구를 가지고 분야별로 분석한 다음 평가협의회에 참석하여 진지하게 조언함으로써 수업자는 물론이고 많은 참관 동료들이 한 수 배워가는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한다. 3. 교내 자율장학의 방법 가. 임상장학의 방법 임상장학은 수업계획에 관하여 교사가 계획협의자(수업연구에 전문적 조예가 있는 자)와 수업을 설계 계획하고 수업을 관찰하며, 관찰 자료를 분석하고, 교사에게 관찰 결과에 관한 피드백을 제공함으로써 수업개선을 도모하고자 설계된 정밀하고 집중적인 장학방법이라 할 수 있다. 나. 동료장학의 방법 동료장학은 일반적으로 두 명 이상의 동료교사가 수업을 관찰하고, 그 결과에 대하여 피드백을 제공해주며, 공통되는 전문적 관심에 대하여 토의하고 조언함으로서 자신들의 전문적 성장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으로 일선 학교에서 교사의도에 따라 부담 없이 수시로 할 수 있는 좋은 장학방법이다. 다. 자기장학의 방법 자기장학은 한 교사가 혼자 독립적으로 자신의 전문적 성장을 위하여 녹음기나 기타 기재를 이용하거나 또는 학생들의 수업반응과 대화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수업과정을 확인하며 연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라. 교내연수의 방법 이는 현재 각 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교사의 수업기술 향상발전을 목적으로 전 교원 또는 동학년 교사, 교과별 교사를 대상으로 공개 수업을 하고, 서로 연구 협의하는 과정을 통하여 수업의 질을 향상시키는 효과적 연수방법이다. 이 방법은 교단 경력이 낮은 교사의 경우 발전된 수업을 참관함으로써 수업기술을 쉽게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마. 요청장학의 방법 서울에서 이미 실시해온 방법으로 특정과목 장학인사를 초청해서 수업을 공개하고, 관찰 결과를 협의하는 과정을 통하여 수업의 질을 향상시키자는 연수방법이다. 바. 마이크로 티칭 마이크로 티칭은 한 교사가 수업한 것을 필름으로 영상화하여 수업절차, 수업방법, 학습내용, 자료 활용 등을 장학담당자와 함께 영상을 보면서 피드백을 받아보는 방법이다. 최근 들어 열린 수업이 확산되면서 이 방법의 장학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방법은 장학담당자와 수업자, 참관교사들이 함께 수업을 분석해 보는 데 편리한 이점이 있다. 사. 전통장학(약식 장학) 전통적 장학은 임상장학이나 마이크로티칭 같은 완전한 장학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전통적인 교실 방문 장학을 보완한 것이다. 현재와 같이 교장·교감이 예고 없이 교실을 방문하여 관찰하고 피드백 노트를 교사에게 보내거나 직접 피드백을 주는 방법이다. 교장·교감의 시간이 부족하고 교사 수는 많은 상황에서 사용하는 방법으로 교장·교감이 유능하다면 짧은 시간에도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4. 교내 자율장학의 방향 가. 교장, 교감, 교사 전원이 상호 장학하는 풍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하는 사람들이 장학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교육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적극 참여하는 학교풍토로 바뀌어야 한다. 전 교원이 수업개선에 민주적이고 상호 협조적이며, 권위의식을 버리고 상호 배우겠다는 자세로 활동하는 학교로 운영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장의 학교운영방침에 획기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나. 장학의 개별화, 다양화, 민주화의 방향이 요구된다. 장학은 결국 필사를 위한 것으로 교사의 교수기술 수준, 교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교사의 장학적 필요는 모두 다르다. 교내장학은 일정한 시기가 있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 자연스런 시기에 개별적으로 하기도 하고, 장학의 형태도 획일적인 장학방법보다 교과의 본질 또는 교사의 필요에 따라 달리하는 등 다양한 장학형태를 취하며, 또한 교사의 권위와 자존심을 고려해서 민주적으로 이루어지게 한다. 다. 장학에 대한 교사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교사의 잠재능력은 무한이다. 그 무한의 능력을 최고도로 개발하려는 교사 자신의 의식개혁이 앞서야 한다. 교사의 장학에 대한 수용 자세에 있어 자기가 맡은 교육에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자 하는 의식을 갖게 될 때, 자기의 수업개선을 위하여 항시 연구하고 배우겠다는 자기 연찬에 힘쓰는 자세를 갖게 될 것이다. 라. 협동적 분위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기술의 향상과 전문적 성장을 위하여 교사 상호 협력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교사들은 교장보다는 동료들끼리 더 잘 통하며 격의 없이 지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 동료 교사가 상호 간에 장학적 기능을 발휘 할 수 있는 장학체제와 장학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며 이런 분위기가 이루어진 학교는 수업의 질이 높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경제교육의 범주 경제교육의 관점을 크게 나누면 민주시민으로서 알아야 할 기본적인 소양과 경제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범주에 속하는 것은 예를 들어 한미 FTA체결과 이것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나 인플레이션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 IMF경제 위기는 무엇을 의미하고 이를 극복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등 매우 다양하다.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것은 재택(財宅)이란 무엇이고 재택의 기본 원리는 무엇인가, 직업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고 직장 선택 시 어떤 점을 중요시해야 하나 등과 같이 개개인이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질문들이다. 최근에 미국을 중심으로 경제교육에서 개인의 금융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돈이란 것은 매우 중요하며 이런 이재(理財) 관리가 왜 중요한지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고 있다. 또 다른 분야로는 주로 어린이들을 상대로 어떤 경제교육이 중요한지에 대한 관심이다. 어린이들에 대한 경제교육은 환율의 이해, 국제무역의 이해 등 세계화와 관련된 분야도 있고, 경제적으로 좋은 습관을 기르기 위해 저축, 합리적인 투자, 그리고 시장에서의 의사결정 등을 중요시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적으로 많은 기관에서 방학 기간 중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경제교육을 실시하기도 한다.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경제교육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행할 수 있다. 특히 현실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경제적 이슈를 중심으로 경제교육을 할 수도 있고, 체험을 통해서 배울 수도 있다. 다양한 경제교육의 방식이 있으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경제는 암기하는 분야가 아니고 이해가 요구되는 과목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환율이 오르면 좋은지 나쁜지가 문제가 아니고 환율인상의 파급효과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나타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다. 다시 말하면 경제학에서는 특정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 이것이 좋고 나쁨은 별 논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경제학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현상이 왜 발생하느냐에 대한 원인 규명이 더 중요하다. 경제의 ‘인과관계’ 배우면 창의력 높아져 이는 경제교육에서도 중요시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수많은 경제현상이 발생할 경우 이것이 미치는 파급 효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경제학에서 중요시되는 점은 인과관계이다. 어떤 현상이 발생했을 때 이에는 원인을 주는 변수(독립변수)와 원인을 받는 변수(종속변수)가 있기 마련이다. 어떠한 변수가 독립변수이고 어느 변수가 종속변수인지를 알아야만 경제 원리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소득이 높을수록 소비가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자. 이 경우 어느 것이 독립변수이고 종속변수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소득 → 소비’인지 ‘소비 → 소득’인지가 중요하다. 그 이유는 내가 보다 높은 소비를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때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소득이 높은 사람이 소비를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인지, 또는 소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소득이 높은 경향이 있다는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만약 후자가 사실이라면 사람들은 소득수준과 관계없이 높은 소비를 하는 것이 미덕으로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전자가 사실이라면 이는 단지 소비를 많이 하는 것은 소득의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득이 없이 소비수준만 높이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학을 잘 하는 경우 이것이 학생들의 창의적이고 조직적인 사고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경제학에서는 인과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학은 사회과학 중 가장 정밀한 과학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학문이 논리적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경제학은 경제학자나 경제학도의 전유물이 아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지고 있고 논리가 정연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것이 경제학이다. 이런 면에서 현재 많은 기관에서 일종의 인기상품화되어 있는 어린이 경제 수업은 그 방식이 보다 합리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의 경제교육이란 다소의 경제지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어린이들에게 경제지식을 가르칠 때는 경제지식 못지않게 경제현상이 발생한 이유를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방향으로 경제교육에 대한 제도가 정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장기적·동태적 관점으로 경제 바라봐야 최근 들어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많은 분야가 한미 FTA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중심으로 경제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논의하면 다음과 같다. 이를 어린이들에게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식이 필요하다. 첫째는 국가 간 협약의 역사이다. 즉, 과거에는 WTO에서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한 협약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것이 양국 간 협약으로 발전한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두 번째 이슈는 과연 한미 FTA가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이해이다. 바람직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국가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그 기준으로 삼기로 하자. 이 경우 한미 FTA에 의해 수혜를 받는 업종은 무엇이며 피해를 입는 업종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세 번째는 단기 또는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 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다를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이해이다. 이를 소위 동태분석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이해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양국 간의 협약은 협약을 맺는 순서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취약분야 또는 비교우위분야가 해당 국가에 따라 달리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 일본, 중국 간의 양자 간 협약은 한국이 어느 국가와 먼저 협약을 하느냐에 따라 국가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런 분석을 할 경우 필요한 자료는 방대한데 특히 양국 간 무역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고 협약 타결 후에는 어떤 모습을 보일지에 대한 추정이 요구된다. 이러한 동태분석은 분석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나 우리나라가 처한 입장이나 비교우위를 살펴보는 데는 매우 적절한 방법이다. 네 번째로 한미 FTA를 체결하는 경우 한국이 해야 될 과제는 무엇이고 향후의 전망은 어떠한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정책이든 실시되면 그 효과가 발생하는데 한미 FTA는 어떠한 점이 예측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경제정책에 대한 예측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예측은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리 나타난다. 이 질문을 다시 적어보면 한미 FTA를 앞두고 한국이 해야 될 일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우선 취약분야를 선별하고 이 분야에 대한 지원을 어떠한 방식으로 할 것이며 이러한 지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재원을 마련할 것인가 등에 대한 답변인 셈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미 FTA도 단순히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식의 흑백논리를 벗어나서 동태적이고 중장기적 측면에서 그 효과를 가늠해보는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경제교육에는 개인적인 경제적 관심사도 포함되며 최근 들어 이러한 점들이 오히려 더 중요시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곳에서는 이러한 개인적 관심사에는 어떠한 점들이 포함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개인적인 경제적 관심사 사례 제1주제 - 나에 대한 이해와 행복 관련 사항 1) 삶과 직업 관련 주제 (1) 행복한 삶 (2) 삶과 일 (3) 일과 직업의 세계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 (4) 진로와 직업 2) 나의 이해 관련 주제 (1) 나의 이해와 진로 (2) 적성과 직업 (3) 흥미, 성격 및 가치관 (4) 신체적 조건과 환경 3) 합리적인 진로 계획 (1) 진로 계획의 중요성 (2) 진로 의사 결정 프로그램 (3) 진로 계획 세우기 (4) 진로 상담 (5) 진로 정보의 종류 및 내용 (6) 가족 간의 의사 결정 제2주제 - 변화하는 직업과 나의 선택 1) 변화 하는 직업 세계 (1) 산업 구조의 변화 (2) 직업의 종류와 선호도 (3) 미래 산업 사회와 직업의 변화 2) 대내외 환경의 변화와 직업의 선택 (1) 대내외 환경의 변화 (2) 기업 문화 (3) 직업 선택 시 고려해야 할 사항 (4) 적성과 직업 선택 (5) 좋은 직장의 개념 제3주제 - 취업의 준비 1) 취업의 준비 (1) 채용의 변화 (2) 취업 정보의 수집 (3) 이력서 및 입사 지원서 작성 요령 (4) 인·적성 검사 2) 면접 (1) 면접의 이해 (2) 면접의 종류 (3) 면접의 평가 요소 (4) 면접 전 준비 (5) 면접의 실제 (6) 면접 대비 이미지 메이킹 개인적인 경제적 관심사의 예는 재테크, 직장의 선별, 노후 준비 등 수없이 많다. 이곳에서는 나에 대한 이해와 행복 관련 사항, 변화하는 직업과 나의 선택, 취업의 준비로 나누어 설명하기로 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경제교육이 왜 필요하며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이들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경제전문가가 교육 담당해야 첫째, 경제교육의 관심사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둘째, 경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경제교육을 하도록 제도가 정비되어야 한다. 셋째, 경제 이슈를 분석할 때는 장기적, 동태적 관점에 파악해야 한다. 넷째, 개인적인 경제적 관심사의 예는 재테크, 직장의 선별, 노후 준비 등 수없이 많다. 이곳에서는 나에 대한 이해와 행복 관련 사항, 변화하는 직업과 나의 선택, 취업의 준비로 나누어 주요 교과내용을 열거하였다.
현재 초등학교의 경제교육은 사회과의 경우 한 단원 수준이며 실과, 도덕과 등의 교과에서 극히 일부의 경제교육요소를 지도하게 되어 경제교육 필요성이 증대하고 있음에도 초등학생들의 경제교육에 대한 수용 비율이 낮다. 이에 경제교육의 대부분이 학부모와 교사가 들려주는 상식수준의 이야기나 경제상황을 보도하는 방송 및 정보매체의 간접적인 시사 등에서 접하는 실정이다. 초등학생은 주로 소비자의 위치에 있지만, 시대에 따라서 경제 활동 모습이 다르듯이 이에 따른 소비자의 모습도 변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초등학교 학생들은 경제능력이 없기 때문에 독립된 경제주체라기보다 가계의 의존자로 생각되어 경제주체로서 아동의 역할은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의 핵가족 형태와 가정 내 자녀 수의 감소로 자녀의 지위가 높아졌고, 경제 성장으로 인한 가계의 소득 수준의 향상은 자녀의 자유재량 소비액을 증가시켜 초등학교 학생들도 독립된 소비자로서의 경제 주체로 그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초등학생들의 소비 습관이 향후 성인이 되어서의 소비 행동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다고 생각할 때 올바른 경제교육이 초등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할 중요한 과제라 생각한다. 경제교육은 인간의 생애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 교육의 한 영역이다. 초등학교부터 효과적인 경제교육 프로그램에 투자를 계속해 나가면 결국 장기적으로 모든 국민에게 경제교육을 확대하는 효과가 있다. 초등학교부터 시작되는 올바른 경제교육은 학생들에게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경제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의사결정능력을 수행할 수 있게 할 수업장면에서의 문제해결 능력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정돈된 경제생활의 윤리의식을 지닌 행위자로의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복잡한 경제 현상 속에서 책임 있는 경제 주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능력을 갖도록 필요한 지식과 경험이 교육적으로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육과정 운영의 범위에서 올바른 경제교육을 전개해야 할 실제의 내용과 지도의 방향을 제시하고, 현행의 경제교육 방법을 분석하여 학생들이 직접 피부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경제교육 프로그램과 지도방법의 실제를 초등학교의 경제교육을 중심으로 전개해 보고자 한다. 초등학교의 경제교육 교육과정 초등학교 경제교육 관련의 교육과정 내용을 찾아보면 경제교육 지도요소가 가장 중요하게 제시되어 수업 현장에서 지도하도록 요구되는 교과는 사회과 교과이다. 사회과 교육에서는 3, 4, 5, 6학년에 고루 배열되었으나 사회과 내용의 비중과 학생들 경험의 범위에 따라 각각 다르다. 3학년은 고장사회의 기초적인 경제생활 중심이며, 4학년은 시·도 단위의 지역 경제생활의 중심으로, 5학년은 거시경제의 개념들로 우리나라의 경제생활을, 6학년은 세계경제의 모습 등을 알아보게 되어 있다. 사회과 외에 도덕과와 실과 등의 교과에 경제교육 관련 지도요소들이 제시되어 수업에 적용하게 되어 있다. 도덕과는 경제생활에서의 올바른 경제 윤리의식 형성에 주안을 두고 있으며 실과에서는 경제생활의 이해와 실제 운영의 측면에서 직업의 중요성과 진로지도의 참고자료로서 활용을 기대하고 있다. 초등학교의 7차 교육과정에 제시된 도덕, 사회, 실과 등 범 교과에서 지도하여야 할 경제교육 관련의 주요 지도 내용과 지도 요소들을 관련 교과 단원과 주제를 분석하면 표 1과 같다.(표는 새교육을 참조해주십시오.) 초등학교 경제교육 내용은 주로 3, 4, 5, 6학년의 교과에 집중되고 있으며 지역 확대법에 따라 우리 마을, 우리 고장, 우리 지역(시·도), 우리나라, 세계(국제)경제의 공간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에 따라 초등 2학년에서는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마을의 경제생활, 3학년에서는 자기 주변 고장을 중심으로 한 경제생활, 4학년에서는 ‘시·도의 환경과 자원, 경제발전’, 5학년에서는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과 국제무역’, ‘정보화 시대의 생활’, 6학년에서는 ‘경제발전으로 인한 근대화의 과정과 직업의 중요성’ 등에 대하여 공부하게 되어 있다. 초등 경제교육의 방향과 지도법 (가) 경제교육의 방향 경제교육은 경제현상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원리와 그 상호 관련성을 깨닫게 하고 유능한 민주시민의 자질을 양성하여 사회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능력을 육성하는 데 있다. 따라서 초등학교에서의 경제교육은 학생들에게 합리적인 경제생활을 도와주기 위한 초보적인 훈련의 과정으로 습득한 경제의 이론을 학생들이 접하고 있는 경제문제와 환경을 올바로 파악하여 이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경제생활의 지혜를 갖게 함으로써 다양한 경제문제의 해결능력을 함양하려는 데 있다. 제7차 교육과정에서 경제교육은 시장경제체제의 시민성 함양을 기본방향으로 삼고 합리적인 의사결정 능력과 경제적 소양을 지닌 민주시민 육성과 건전한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육성을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초등학교 경제교육의 방향은 생활경제의 바른 이해로 경제문제 해결능력과 경제문제에 대한 바른 의사결정 능력의 함양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이에 경제교육의 목표는 학생들에게 밝고 건전한 경제적 사고력의 배양과 합리적 의사결정 능력의 함양을 통한 경제적 시민성을 육성하는데 있다. (나) 초등학교 경제교육의 지도 방법 학생들의 경제교육에 대한 관심도에 대하여 조사한 KDI경제정보센터 경제교육협의회(2007.6)의 자료에 의하면 사회과 영역의 정치, 역사, 경제 관련 단원을 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경제 단원의 교과 내용이 가장 이론적이고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고 흥미도 역시 매우 낮다. 초등학교 사회과 경제영역의 관련단원 지도내용도 학생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경제용어와 개념들이 있어 학습흥미가 낮은 편이다. 사회과 수업에서 경제교육을 강의중심이나 기존의 시청각자료 를 활용한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면 학생들의 수업 참여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본교에서 실천하고 있는 경제교육의 실제 사례와 서울시초등사회교과연구회 회원들의 경제교육활성화 토론에서 정리된 자료들을 근거로 지도의 실제를 논의코자 한다. 사회과, 도덕, 실과 등의 교과에서의 경제교육은 설명식 교수방법이지만 학생들의 실제 경제생활의 문제를 중심으로 교재의 내용과 관련지어 다양한 시청각 자료와 연구 기관에서 개발한 웹자료를 활용한 수업은 초등학생들의 경제교육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저학년에서는 놀이와 역할극 등 흥미 중심으로 생활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장면들을 체험케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가게놀이나 시장놀이 등을 교사의 치밀한 자료 준비와 수업계획에 따라 지도하면 학생들의 수업참여도가 높아진다. 3, 4학년은 경제교육의 주요 내용 요소를 설명할 수 있는 시청각 자료를 미리 확보하고 학생들이 살고 있는 고장과 지역사회에서 수집할 수 있는 경제 관련 자료를 적절하게 제공하여 시·도 지역 경제구조와 경제활동의 모습을 바르게 이해시켜야 한다. 또한 가정의 경제생활에 대한 이해는 가정에서 활용하는 가계부나 어머니의 가정살림 경험 자료를 중심으로 조사학습의 형태가 바람직하다. 4학년 경제 단원의 특징은 경제생활의 개략적인 이해와 가정경제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므로 학생들이 경험한 용돈 사용 등에 대한 실제 사례를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 6학년은 우리나라 경제생활의 특징을 바르게 이해하고 국가경제의 중요성과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갖게 하고 자신의 진로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따라서 5, 6학년의 경제교육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웹 사이트를 안내하고 관련 자료를 활용한 탐구식 수업과정을 적용하여 당면한 경제문제에 대한 현명한 의사결정력을 내릴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 효율적인 초등학교 경제교육 방안 경제교육이 실효성을 갖게 하려면 경제교육에 효과적인 학습형태와 지도 방법을 적용하여야 한다. 전통적인 지식 전달 위주의 교육방법이나 교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탈피하여 학습자 스스로 경제문제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학습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다양한 ICT를 활용한 최신의 경제교육 정보를 검색 및 수집하여, 학년 수준에 맞게 재구성하고 교재 내용과 관련한 학습활동 자료를 학생들이 분석·종합의 과정을 거쳐 경제 지식과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 능력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경제관련 단원의 수업은 교과의 특성을 살려 학습자 중심의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을 활용한 수업기법에 속하는 토의학습, 역할학습, 모의학습 등을 적용하는 것이 좋다. 최근에 한국은행 등 경제 단체나 KDI 등에서 개발한 최신의 경제교육 자료들을 학생들의 수준에 맞게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관련 교과별로 산발적으로 지도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경제교육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시키는 데 다소 효율성이 떨어진다. 이에 경제교육 관련단원의 내용들을 근거로 초등학생들에게 소비, 생산, 유통 및 금융 등의 경제영역에 대한 수업자료를 개발 보급한 KDI의 ‘어린이 생활경제 프로그램’을 학교 여건과 학생들의 해결 능력, 교사의 수업 준비도를 고려하여 적용하여 볼 것을 제안한다. 학교 재량활동 시간을 활용하여 지도할 수 있도록 학생들의 생활경제 중심으로 개발한 교사용 지침서, 학생용 워크북, 웹자료 등은 6차시 분량으로 경제교육에 관심 있는 교사들에게 유용한 지도 자료라 할 수 있다. 지속적인 커리큘럼 개발 필요 초등학교에서의 경제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부딪히게 되는 경제문제를 바르게 이해하고 의사 결정 과정에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분석 능력과 응용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국가 차원에서 보더라도 체계적인 경제교육을 받은 국민은 경제 흐름을 원활히 하고 중요한 경제정책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합리적인 경제생활에 솔선함으로써 국가경제 발전에 도움을 준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초등학교에서의 경제교육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경제교육 관련기관의 도움이 필요하다. 다음으로는 다양한 자료를 활용한 교육이 필요하다. 경제교육은 교실과 교과서를 벗어나 실제 활용을 전제로 실시되어야 한다. 또한 경제교육은 시대적 상황에 맞는 교육이어야 한다. 다양한 교육 자료의 개발 보급은 현장의 경제교육을 풍성하게 한다. 셋째, 교사들의 경제교육 연수가 강화되어야 한다. “경제는 어렵다”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경제교육의 성패는 교육과정 내용보다는 교사의 관심과 지도방법에 더 크게 좌우된다. 따라서 경제교육에 대한 교사 재교육이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재교육 방법은 학교 내의 자율 연수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지만 경제 단체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넷째, 지속성과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개발해야 한다. 경제교육은 똑똑한 소비자, 혁신적인 생산자, 합리적인 경제인을 키우는 교육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행을 통해 습관화하도록 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습관화 교육을 위해서는 지속적이며, 체계적인 경제교육의 다양한 커리큘럼의 개발 및 보급이 필요하다. 끝으로 체계적인 경제교육을 위하여 배당시간의 확보와 독립교과의 운영 등이 요구되나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따라서 초등학생들 중에서 경제교육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나 5, 6학년 학생들에게 재량활동의 일부 시간을 할애, 지도하거나 계발활동 중 부서운영으로 체계적인 경제교육을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도를 담당한 교사들의 의지이며 경제교육여건 조성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학교경영자와 교육정책가들이다. 학생교육을 담당한 우리들 모두가 경제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학교여건에 적합한 실천과 추진에 최선을 다한다면 초등학교에서의 경제교육은 활성화될 것이다.
최근 호주 연방 교육부는 각 학교의 예산액을 동결하는 대신 맡은 학생들의 성적을 올린 교사에게 금일봉 형식의 성과급제 지원금을 편성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기존의 교육부 예산 가운데 학교별로 5만 호주 달러(약 4천만 원)를 교사들을 위한 개별 보너스로 편성하여 ‘베스트 교사들’에게 직접 나누어 주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교육부가 추진 중인 교사 성과급제가 정착될 경우 학생들의 영어 쓰기와 읽기, 수학 점수를 향상시킨 교사들은 이른바 실력 있는 교사로 인정받아 기본 급여 외에 과외 수당을 지급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의 성적 평가에 준한 성과급제가 자리를 잡게 되면 전국의 모든 학교 교사들의 자질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강한 동기부여가 될 것이라는 게 정부의 예상이다. 교사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학생들의 영어, 수학 점수를 올리지 못하는 ‘무능한 교사’는 5만 달러의 인센티브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같은 학교의 ‘유능한’ 동료 교사들보다 결국 낮은 급여를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연방 교육부가 이 같은 방침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교사들의 기본 자질에 대한 불신이 갈수록 깊어지는 교육 현실에 대한 현실적 개선책 강구에 기인한다. 학부모와 학생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실력 없는 교사들, 즉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엉터리 교사’들로 인해 호주 교육의 질이 나날이 떨어지면서 급기야 일정 수준 이상의 학년에 도달해도 여전히 읽고 쓰고, 기본적인 수셈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 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일례로 지난 해 한 사립 초등학교에서는 학부모 중 하나가 자신의 아이가 5학년임에도 여전히 쓰고 읽기와 수셈을 못한다며 학교 측에 항의, 학비를 되돌려받은 사례가 있었다. 공립학교와 달리 수업료를 받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립학교에서 수익자가 만족할 수준의 결과를 내지 못했을 경우 통상적인 상거래법을 적용하여 등록금을 반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던 것. 이 같은 극단적인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호주 학생들의 학력 저하 현상은 해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차제에 교육부는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본연의 업무를 등한시하는 교사들의 안일한 태도에 대한 책임을 묻는 동시에 격려 차원의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겠다는 의지이다. 이는 곧 교사 개개인의 수행평가를 겸한 기능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교육부의 이 같은 정책에 대해 당사자인 교사들은 물론 학교장 단체 및 정부 야당, 교원 노조 등 교육 관련기관들은 일제히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좋은 교사, 실력 있는 교사’란 곧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는 교사’라는 정부의 단순 공식에 ‘단순 수긍’할 수 없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는 현실 교육 현장을 무시한 탁상행정이자 공허한 발상에 불과하다며 강한 반발을 하고 있는 것. 교사들은 정부가 말로는 ‘수행평가’에 준한 성과급제를 실시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성적 평가’에 국한된 제한적 의미일 뿐이라고 강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학생들의 성적 관리가 교사들의 업무 수행의 일면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교직 본연의 업무로 인식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더군다나 대도시나 농촌 등 지역에 따라, 학교에 따라, 혹은 학급에 따라 학생들의 수준이 각각인 상황에서 시험 성적을 단순 비교하여 담당 교사들의 자질에 점수를 매기고 우수 교사와 열등한 교사를 구분하는 발상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부작용으로는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학생들 간의 지나친 경쟁심을 촉발시킬 경우, 그 부작용은 고스란히 교사들 간의 경쟁심 조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렇게 될 경우 교육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는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요소인 동료 교사들 간의 강한 유대감이나 친밀감, 협조, 일체감, 애교심, 수업 노하우 교환과 공유 등에 훼손을 가져올 것이 자명하다는 것이다. 교사들은 또 소도시 및 고립된 농어촌 등 열악한 환경에서 묵묵히 근무하는 교사들이나, 교육현장의 질적 성장을 꾀할 수 있는 전문적인 프로젝트 개발을 위한 지원금 등으로 지급될 때 실적급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만약 그도 아니면 교사 개인의 자기 발전이 곧 교육환경의 발전이라는 의미에서 석사 학위 이상 소지자 등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한다면 그런대로 납득할 수 있다고 전했다. 한편 교육부는 학생 성적 향상도 위주로 ‘베스트 교사’를 관리한다면 이로 인해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학부모들에게 보다 소상히 알릴 수 있는 바탕도 간접적으로 마련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학내 폭력, 성폭행 등으로 자녀를 학교에 보내놓고도 늘 불안해하는 학부모들에게는 교사들이 성적 위주로 학생들을 다잡을 경우, 품행 면에서도 지금보다 모범적으로 변하지 않겠느냐는 추측이다. 그렇게 되면 학생 관리에 허술하다는 학부모들의 학교 측에 대한 불만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제대로 된 수업 분위기는 고사하고 이른바 왕따 현상과 학내 폭력의 수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상황을 공부 위주의 학풍으로 점차 바꾸어 나간다면 서서히 고삐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이처럼 교사 성과급제 도입을 둘러싼 교육부와 일선 교사들 간의 공방이 치열하지만 정부 시책에 대한 일반인들의 시선 역시 그리 곱지만은 않은 편이다. 지난 2004년과 2005년 2년 사이에만도 8천 명 이상의 젊은 호주 교사들이 영국 등 해외로 빠져나갔는가 하면, 지난 10년간에는 약 2만여 명의 교사들이 교직을 그만둔 것으로 조사되었다. 호주 젊은이들에게 교직은 그다지 매력적인 직종이 아니며, 그 근본 원인은 타 직종에 비해 낮은 임금체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사들의 급여가 적정한 수준으로 향상되지 않는 한, 어떤 기준을 내세운 성과 급여라 하더라도 우수한 교원확보를 위한 근본 대책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겠다는 교육부의 정책에 대해 당사자인 교사들은 물론 학교장 단체 및 정부 야당, 교원 노조 등 교육 관련기관들은 일제히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좋은 교사, 실력 있는 교사’가 곧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는 교사’라는 정부의 단순 공식에 단순 수긍할 수 없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는 현실 교육현장을 무시한 탁상행정이자 공허한 발상에 불과하다며 강한 반발을 하고 있다.
“길에 가는 강아지나 나만 휴대폰 없지, 세상 사람들 다 있는 것 같더라.” “그럼, 엄마도 휴대폰 사 드릴까요?” “그렇다는 말이지. 집에만 있는 나한테 무슨 필요가 있다고.” 언젠가 필자가 엄마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다. 엄마의 말씀이 조금은 과장된 면도 있고, 표현이 익살스럽지만 그다지 틀린 말씀도 아니다. 엄마와 달리 가입비가 아까워 휴대전화를 극구 마다하셨던 아버지조차도 1년 전 휴대전화를 원하셨던 것 보면 휴대전화가 사람을 끄는 힘은 상당한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현대인의 필수품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 휴대전화. 어디를 가든 사람들 손에는 어김없이 휴대전화가 들려 있다. 하루에 한 번도 울리지 않을 때가 많지만 장소를 이동할 때면 필자 역시 휴대전화를 챙기게 된다. 어느 때는 너무 휴대전화에 구속되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휴대전화 없이도 살았고, 지금도 간혹 약속 시간 맞추기 힘들 때 요긴하게 쓰이는 것 말고는 그다지 필요성을 못 느끼지만 다른 사람들 다 갖고 있는데 혼자만 없는 것도 그렇고 해서 지금껏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있다. 15년 전쯤 만해도 휴대전화는 값이 비싸서 주변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성인들 사이에서도 일부 사업하는 사람이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물건으로 인식되었었다. 그런데 휴대전화가 일반화되고 나서는 성인들뿐 아니라 학생들 또한 상당수가 휴대전화를 소지하게 되었다. 일본 역시 고교생은 거의 전원이, 중학생도 과반수 이상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실정이며, 필자가 담임하는 학급(초등 6학년) 또한 37명 중에 20명 이상의 학생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다. 학생들의 경우 학교에 있는 시간이 많은데 휴대전화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은 마음에 휴대전화 소지의 이유를 물으면 한결같이 부모와의 비상 연락을 이유로 든다.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면서 밖에서 일하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들과의 긴밀한 연락이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상 연락보다는 친구들끼리의 통화나 다른 기능사용을 위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녀들의 무분별한 휴대전화 사용으로 과도하게 청구되는 요금 때문에 고민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성년의 경우 부모의 명의로 전화가 가입되다 보니 자신이 어느 정도 전화를 사용했는지, 부과되는 요금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감각이 없다. 매월 지불해야 하는 요금 중에 자신이 정말 필요한 때에 쓴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혹은 고정적으로 나가는 요금의 액수가 부모님의 가계 운영에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지에는 더 더욱 관심이 없다. 요즘 아이들의 ‘경제 감각의 상실’은 새로운 교육문제의 하나가 됐다. 돈 아까운 줄 모르고 과도하게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것 역시 문제지만 지금 필자가 걱정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부적절하고 그릇된 행동이다. 이는 단지 공공장소에서 지켜야 하는 통화 매너 문제와는 차원이 또 다른 것이다. 학교에서, 그것도 수업시간 중에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문제다. 일본 고교에서는 학교에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등교하는 것을 약 80%의 학교가 허가를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70% 정도의 학교가 수업 중에 메일이나 인터넷에 접속을 하고 있는 문제로 지도에 골치를 썩고 있는 실정이다. 이 문제는 결국 ‘학생들의 규범의식의 결여’와 결부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최근 여기에 동영상이 되는 MP3의 등장이 교사들의 머리를 더욱 아프게 한다. 얼마 전 본교 고등부에서는 수업 중에 동영상으로 포르노를 보다가 적발되어 유기 정학을 받은 경우가 있었다. 처음부터 유기 정학으로 처리할 마음은 없었으나 학생의 태도에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잘못을 한 이후에도 반성할 줄 모른다는 것은 학생으로서 학교 규범에 대한 준수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밖에 달리 해석이 되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 몰래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게임을 하는 일도 물론 있다. 학교에 오면 전원을 끄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교사의 눈을 피해 규칙을 어기는 학생들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요금 문제로 혹은 공부는 안하고 휴대전화로 장난만 하는 자녀들 때문에 고민을 하면서 휴대전화 소지를 허락해 주는 부모들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상시 연락 등의 휴대전화의 순기능적 면보다는 역기능적 면이 더 많음을 부모들도 알고는 있지만 아이들의 등살에, 혹은 아이들 기 살리기에 부모가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휴대전화를 갖고 싶은 것에 온 정신이 팔려 공부에 집중 안할까봐 휴대전화를 사줬건만 결국 그 휴대전화 사용에 정신이 팔려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경우를 초래하고 만 경우이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모델과 기종이 쏟아져 나오는 현 상황에서 휴대전화 소지를 막을 방법은 학교에는 전혀 없으며 또한 그것을 막을 권리도 학교에는 없다. 다만 휴대전화 사용과 관련된 각종 문제들을 걱정하는 것과 교육적 차원에서의 지도를 궁리할 수밖에 없다. 학교 나름대로 규칙을 세워 학교 내에서의 휴대전화 소지를 엄금하거나, 소지를 하더라도 하교 전까지는 전원을 켤 수 없도록 못 박아 두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학교는 참으로 약한 존재이면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휴대전화를 만들어 내어 돈을 버는 회사와 통화를 가능케 하는 통신회사가 따로 있고, 10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현란한 선전을 해서 이익을 창출하는 광고회사가 있으며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서 휴대전화를 사주고 요금까지 내주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휴대전화의 엉뚱한 사용으로 수업 분위기를 흐리게 하는 등의 문제로 골치를 썩는 곳은 결국 학교이니 말이다.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전 고교를 대상으로 실시한 ‘고교생의 규범의식’ 조사 결과를 보면 휴대전화, 메일 주소를 누구에게라도 가르쳐 준다고 답한 학생이 전체 3398명 중의 45%나 되었으며, 만남 사이트에 접속한 경험이 있는 9% 학생 가운데는 직접 상대방을 만난 경우가 27%나 되었다. 조사결과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학생들의 휴대전화의 부적절한 사용 자체도 문제이지만 학교나 가정이 그러한 실태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각종 문제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유혹하는 첨단 물건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가는 상황에서 기성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애초부터 만들지 않았다면 모를까 만들어진 물건을 사용 못하게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바른 사용과 건전한 사용법을 일깨워 줄 수밖에 없다. 요즘 교육현장에서 자주 단골로 등장하는 문구 중에 ‘가정과 지역 사회의 연계 강화로 교육적 성과를 높인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참으로 그럴듯한 말이다. 학교 단독의 노력보다는 여기에 가정과 지역의 이해와 협력이 보태지면 그 성과가 높을 것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지금이야말로 학교와 가정·지역사회가 긴밀히 연계하여 학생들의 규범의식의 확립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읍성의 관아건물 지난 호에 이어 읍성을 찾아갑니다. 우선 읍성에 있었던 관아(官衙)건물의 종류부터 알아볼까요? 관아건물은 고을의 격에 따라서 규모와 종류가 달랐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동헌(東軒)은 지방관이 행정업무를 보던 집무실입니다. 주로 ‘선화당(宣化堂)’이나 ‘안회당(安懷堂)’과 같이 백성들을 잘 다스리겠노라는 의지가 담긴 현판이 붙습니다. 지방관, 즉 도를 총괄하는 감사나 한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들의 살림집은 내아(內衙)입니다. 동헌과 내아는 가까이 있습니다. 객사(客舍)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나 궐패(闕牌)를 모신 건물로 각 지방에까지 왕권이 미치고 있음을 말합니다. 지방관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이곳을 참배하여 어진 정치와 충성을 다짐하였습니다. 객사는 또 관찰사나 관리들의 숙박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대개 객사 건물은 가운데가 높고 도드라져 있는데 그 건물[正堂]에는 전패를 모시고, 좌우[翼室] 건물은 숙소였지요. 객사에는 주로 동경관(東京館-경주)이나 학성관(鶴城館-울산)처럼 그 고을의 옛 지명이 들어간 현판이 많습니다. 동헌과 객사 입구에는 삼문(三門)이 있습니다. 나주읍성의 경우 동헌의 정문인 정수루, 객사의 정문인 망화루가 삼문의 역할을 해내고 있고 고창읍성의 경우는 빈풍루와 풍화루가 삼문의 역할을 했습니다. 지방관을 돕는 아전(衙前), 즉 향리(鄕吏)들이 머물던 곳은 작청(作廳)이었습니다. 이방을 중심으로 6방이 모여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사무실이었지요. 이들은 출퇴근하는 입장이라 주로 읍성 내에 집이 있었습니다. 향청(鄕廳)은 수령을 보좌하고 견제하는 고을 양반들의 자치기구로서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르게 하는 등 향촌교화(鄕村敎化)를 담당하였습니다. 관청(官廳)은 각종 세금과 곡물을 저장하고 반출하는 업무를 보는 곳으로 관주(官廚)라고도 하였습니다. 수령과 그 가족들의 식생활을 비롯한 빈객(賓客)의 접대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 및 회계 사무를 관장하였기에 제일 분주한 곳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관청이란 말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죠. 집사청(執事廳)은 경찰 사무를 담당하던 포도리(捕盜吏)들이 업무를 보던 곳입니다. 경찰청의 마스코트가 바로 포돌이와 포순이입니다. 이 명칭 또한 집사청 치안 담당관이었던 포도리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읍성 내에는 군무를 보살피던 장청(將廳), 무기를 보관하던 군기청(軍器廳), 죄수를 감금하던 옥(獄), 고을의 수호신을 모신 사당인 성황사(城隍祠) 등이 있었습니다. 한 때 빽빽하게 들어섰던 관아건물들은 오늘날 객사나 동헌 혹은 삼문 정도만이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격이 다른 읍성이야 조선 8도에는 각각 감사(관찰사)가 파견되었습니다. 이들이 머물렀던 감영(監營)을 둔 읍성은 수령이 다스리는 읍성에 비해 격이 한층 높았겠지요? 주인장이 누구냐에 따라서 읍성의 규모가 달라지는 셈이죠.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남아 있는 걸 보면 감사 자리가 좋긴 좋았나 봅니다. 경상감영이 있었던 대구로 떠나볼까요? 대구 한복판 노른자위에 있는 경상감영공원에는 동헌인 선화당과 내아였던 징청각, 하마비, 관찰사의 치적이 담긴 선정비 등이 남아 있습니다. 선화당과 징청각은 선조 34년(1601) 이곳에 세워졌는데 큰 화재로 인해 불타버리고 지금의 것은 순조 7년(1807)에 새로 지어 1970년에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공원 앞에는 병무청 건물이 있어 옛날 관찰사가 도의 병권을 맡았음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병무청 자리에는 원래 관풍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달성공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1906년 당시 관찰사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헐어낼 때 건물만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 관풍루 앞에는 하마비가 서 있었습니다. 이곳에 남아있는 하마비도 다른 지역의 것보다는 격이 높습니다. ‘절도사이하개하마비’니까 종2품이었던 병마절도사 및 수군절도사 이하의 모든 사람은 이 비가 있는 곳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야한다는 주문을 하고 있죠. 대개 관찰사가 절도사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경상감영을 둘러싸고 있는 대구읍성은 선조 23년(1590) 처음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가 영조 12년(1736)에 다시 석성으로 축성하여 진동문, 달서문, 영남제일관, 공북문의 4대문을 두었습니다. 현재 남문이었던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전라감영의 흔적은 보물 제583호로 지정된 전주객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판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쓰여 있는데 ‘풍패’는 중국 한나라 고조가 태어난 지명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가 바로 이곳 전주임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비록 객사만 남아 있고 다른 관아건물들은 찾아볼 수 없다지만 이곳을 중심으로 차이나타운, 차 없는 거리, 극장가, 관공서, 음식점, 패션가 등이 즐비해 있어 과거로부터 이곳이 전라도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줍니다. 이 전라감영을 둘러싼 전주읍성의 흔적은 남문이었던 풍남문(豊南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풍남문은 고려시대에 처음 세웠으나, 정유재란 때 화재로 불타버렸고, 영조 44년(1768)에 전라감사 홍락인이 다시 세우면서 풍패(豊沛)의 남쪽이란 뜻으로 풍남문이라 불렀답니다. 강원도의 감영이 있었던 원주에는 포정루와 선화당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듯 감영의 흔적은 조금씩 남아 있으나 읍성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지만 옛 모습은 잃었어도 주변 지역이 최대 번화가로 사랑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명성에 대한 대가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의 발발 - 부산진성, 동래읍성 전쟁의 비극을 혹독하게 겪은 읍성도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으로 돌아가 봅니다. 일본과의 첫 전투는 4월 14일 부산진에서 펼쳐졌습니다. 부산진순절도에 당시 상황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굳게 닫혀있는 성문이 보이고 그 위에서 정발 장군이 전투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습니다. 왜적의 배가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어오는데 바라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산 첨사 정발이 절영도에 나가서 사냥을 하다가 급히 성으로 돌아오자 왜병이 뒤따라 와서 육지에 올라 사면에서 구름같이 모이니 삽시간에 성이 함락되었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일본은 다음날 2만여 명을 이끌고 동래읍성을 향해 진격합니다. 당시 동래읍성에서 벌어진 전투를 묘사한 동래부사순절도 아랫부분에는 ‘길을 빌리자(假我途)’는 팻말을 든 일본과 ‘길을 빌려줄 수 없다(假途難)’는 팻말을 성 밖으로 던지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조선군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싸워서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의 정신이 그림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동쪽 성벽을 통해 침입한 일본군은 칼과 창으로 무장한 채 성 안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관군과의 백병전도 시작되었습니다. 성의 한가운데에 객사건물 아래 붉은 관복을 입고 의연하게 앉아있는 송상현 부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임금님께 예를 올리는 그 모습이 비장하기 그지없습니다. ‘임금님,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중과부적이옵나이다. 이 성을 지키지 못한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 객사문 아래쪽으로는 여인 두 사람과 남자 한 사람이 지붕 위에서 깨진 기왓장을 던지며 최후의 항거를 하고 있습니다. 동래에 살던 일반 백성이던 김상이라는 사람과 그의 처와 딸로 보입니다. 왜적이 물러간 뒤 김상의 어머니가 그 현장에 가 보니,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가 같이 죽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북문을 통해서 달아나는 아군이 보이는데 이는 일본군의 위세에 놀란 경상좌병사 이각으로 그는 구원병을 보내리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야밤에 도주하여 밀양으로 달아났습니다. 그후 적이 밀양에 가까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도망을 거듭하다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에게 붙잡혀 군율에 따라 참형을 받아 일생을 마쳤습니다. 죽음으로써 성을 지킨 송상현과 도망으로 목숨을 부지하려 한 이각,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징비록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5일에 왜병이 동래에 몰려와 송상현이 성의 남문에 올라가서 반나절 동안이나 싸움을 독려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상현은 꿋꿋하게 버티고 앉아서 적의 칼날을 받고 죽으니 왜인들도 그가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킨 것을 가상하게 여겼다. 동래읍성은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추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영조 7년(1731)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으며 현재까지도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벽, 북문과 옹성,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 치성, 여장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되었습니다. 또 동래부의 동헌이었던 충신당, 송상현을 비롯해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을 모신 송공단, 조선후기 군장관들의 집무소였던 장관청 등이 남아 있습니다. 곡창지대를 지켜라-진주읍성, 남원읍성 진주읍성은 남강을 천연 해자로 둔 절벽 위에 세워져 뾰족한 바위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서 촉성성(矗石城)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은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1592년 10월 1차 공격 당시에는 목사 김시민을 비롯한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성을 사수했는데 이것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입니다. 하지만 이듬해 6월 2차 공격을 받았을 때는 큰 비로 성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성을 사수하지 못하고 엄청난 희생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의기(義妓) 논개가 등장한 것도 바로 2차 공격으로 성이 점령된 후였습니다. 성내에는 창열사라는 사당이 있어 진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김시민 등 39위를 모시고 있습니다. 진주성 싸움은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왜군을 물리쳤다는 데 의의가 있겠습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은 집중적으로 전라도를 공략하기로 작정합니다. 보급통로를 끊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호남 곡창의 관문이자 서울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남원읍성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남원읍성은 언양읍성과 함께 읍성 중에서 평지에 자로 잰 듯 네모난 형태로 쌓았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정기원과 이복남이 지휘하는 조선 측 군사들과 명나라 장수 양원의 지휘 아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명나라 군사들이 지키던 동서남문이 뚫리자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북문을 지키던 이복남을 비롯한 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광해군은 그 때 희생된 사람들을 한곳에 묻고 그들을 추모하는 사당을 지어 충렬사라 불렀습니다. 근래에는 ‘만인의총’이라 해서 대대적으로 정비하였습니다. 전시관에는 왜군 남원성 침공 작전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정유재란 당시 1597년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던 왜군 ‘가와가미 후사구니’가 자필로 그렸던 것으로 그간 일본 가고시마현 도서관에 있던 것을 복사해 온 것입니다. 작전도에는 성의 형상과 규모, 성내의 건물과 통로, 성문과 성벽, 성호 등은 물론 왜군의 포진과 병력의 배치도가 상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일본이 남원읍성을 치기 위해서 얼마나 치밀한 준비를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때 남원성을 공략한 왜장 중 시마즈는 도공 70여 명을 포로로 잡아 가 일본 큐슈 남단 가고시마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가운데 심수관가의 초대 심당길도 있었습니다. 1995년에 남원문화원에서 건립한 노래비를 만인의총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낯선 일본으로 끌려간 남원의 도공들은 고향을 그리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말고 날이 샐지라도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 매일 오늘 같은 오늘을 사십니까? 내일은 오늘의 연장이요, 어제는 오늘이 있기 위한 과거일 뿐입니다. 이 시각, 촌음이라도 잘 활용해서 멋진 방학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 호까지 읍성이 이어집니다.
교실 수업과 관련해 최근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을 보면, 학생 개개인의 특성(학습 준비도, 학습 양식, 흥미, 적성, 관심사 등)을 반영하지 못하는 수업, 학습량의 과다로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의 부족, 역동적인 평가 부재로 인한 학생들의 잠재적 능력 개발 기회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오늘의 우리 학교 교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수업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학생들의 개인차를 거의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학생 개개인마다 독특한 학습양식이 있고, 자신의 흥미와 관심사가 있으며, 학습준비도가 각각 다른데 교실에서는 똑같은 학습자로 간주되어 획일적인 수업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특성이 반영되지 않은 수업은 학습의욕을 떨어뜨려 학습력을 저하시킨다. 그리고 너무 많은 양의 학습내용을 짧은 시간에 다루다 보니 학생들이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고 만다. 반성적 사고는 초인지 능력을 향상시키고, 결국에 가서는 사고가 정교히 되어 지식의 확장에 크게 기여하며, 이는 다시 학습력 향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우리 교육은 반성적 사고를 기르지 못하고 있다. 또한 평가는 학생들에게 피드백을 제공하거나 수업 개선에 필요한 정보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학생 개개인의 학습 잠재력을 찾아내어 이를 계발하는, 교사와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교육적인 평가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평가는 시험을 보고, 점수가 나오고, 이 점수를 활용하여 석차를 매기는 활동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자는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하나는 학생들의 다양한 특성을 반영한 개별화 수업(Differentiated instruction)을 시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들이 플로우(Flow)를 만끽할 수 있는 수업이다. 개별화 수업은 학생들의 다양성, 즉 행동적 특성인 인지능력, 관심사, 개성 등의 차이뿐만 아니라 학습 양식, 학습 환경 등의 차이까지도 반영한 수업이다. 5·31 교육개혁에서는 ‘열린수업’을 표방하면서 ‘개별화·개성화·다양화’를 내걸었다. 하지만 이때의 개별화는 학생들의 학습 속도에 따른 IPI(Individualized paced instruction) 개별화였지 학생들의 다양한 특성, 즉 흥미, 적성, 관심사, 학습 양식, 또는 학습 준비도 등에 따른 DI(Differentiated instruction) 개별화는 아니었다. 단지 시간차만 달리하여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은 목표를 제시하고, 똑같은 내용을 학습하도록 하며, 똑같이 평가하는 것은 공정한 교육이 아닌 획일화된 교육이다. 이러한 교육에서는 정해진 시간 안에 전체 학생들에게 미리 처방되어 주어진 기능들을 완전히 학습했는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미리 만들어진 표준화된 잣대를 가지고 평가한다. 이러한 획일적인 교육에서는 학습자 개개인의 특성이 반영되지 못하기 때문에 기대하는 성과를 얻기 힘들 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역동적이고 교육적인 평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개별화 수업을 하는 목적은 학생들의 성장을 극대화하고, 학생 개개인이 성공적으로 학습에 임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개별화 수업을 하는 교실에서는 교사가 학생 개개인에게 주목하며, 그들의 학습 요구에 지속적으로 반응하려는 노력을 한다. 학생들 개개인의 흥미와 관심사 및 학생들의 학습 특성에 따라 학습 내용, 학습 과정, 또는 학습 결과물 등을 체계적으로 조정한다. 이러한 맞춤식 수업은 학생들의 학습력을 더욱 증진시킬 수 있다. 플로우(Flow)라는 심리학적 개념은 ‘완벽한 심리적 몰입’, ‘최적의 경험’ 등으로 번역되어 통용되고 있는데, 사람이 어떤 활동에 매우 집중해서 절대적으로 몰입되어 있는 상태로,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행동이 자연스럽고 평안한 심리적 몰입의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최적의 경험’의 순간에는 우리의 의식과 심리적 에너지가 질서 있게 한 가지 목표에 집중되는 최적의 상태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플로우는 명확한 목표가 있을 때, 또 행동을 위한 기회를 포착하여 자기 능력과 잘 부합한다고 느낄 때 경험하게 된다. 학생들이 학습에 있어서 플로우를 느끼는 때는 ‘도전적인 과제’를 해결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온통 쏟아 부어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때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공부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공부에 몰입하면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게 되고 따라서 학습력은 저절로 향상될 것이다. 즐거운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도 여기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학습량을 줄이고 깊이 있게 가르쳐야 한다. 학생들로 하여금 학습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부여하고, 실제적인 과제를 자기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직에서의 방학은 타 직종의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지만, 어쨌든 가르치는 본업에서 잠시 놓여나는 시간인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방학은 무수히 의욕적인 계획으로부터 시작하여, 안타까운 미수(未遂)의 허망함으로 끝나기 일쑤지만, 그래도 속아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이번 방학도 이런저런 계획에 마음들을 설레곤 한다. 그러나 나를 질적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연마와 단련을 위해서는 방학이 유용하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고생 그 자체가 문제이라기보다는 ‘진정성’이 문제가 될 뿐이다. 진정성이 살아나는 것이라면 삼복염천의 고생이라도 달고 흔쾌할 수 있다. 대학 1학년 시절, 여름방학과 더불어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내가 존경하며 따랐던 기숙사 선배들은 방학 동안에 읽을 책을 미리 정하여 독한 마음으로 반드시 독파하도록 하라고 했다. 막연하기는 했지만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았다. 턱없는 지적 허영으로 무조건 고답한 책들을 잔뜩 챙겨 넣고 싶었다. 무언가 목마름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해소해 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막막했다. 학문에 대한 낭만적 동경과 지적 소망을 품고 들어 온 대학은 실망스러웠다. 무엇보다도 필자가 꿈꾸고 동경하던 그런 학문의 향연은 먼 신기루 같이 보였다. 내 수준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지식과 학문을, 그리고 인생을 대단히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스스로의 한계가 엄정한 현실 앞에 시련을 겪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기대했던 강의들은 나의 지적 기질들과 자주 충돌했고, 따분하고도 지겨운 숙제 나부랭이와 일상의 다툼을 면치 못하는 대학생활을 하였다. 필자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들, 스스로 탐닉하여 몰두하고 싶은 공부들은 대학의 현실 커리큘럼과는 한참 비켜서 있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대학생활을 마칠 때까지 확실하게 무엇이 되겠다는 현실적 목표를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지적 이끌림을 가지고 싶다는 점은 비교적 명료했던 것 같다. 문학과 철학에 대한 관심, 인간의 생각과 상상력에 대한 경이, 그것으로부터 경험하는 새로운 정신세계의 발견, 독서에서 얻는 새로운 감수성, 이때까지 진부하기만 했던 대상으로부터 얻는 미묘한 의미의 울림, 이런 것들로 인해서 문득 각성되는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의 정신 등등이 내 지적 이끌림의 내용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을 현실의 구체적인 직업과 연관하여 성취동기를 강화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현실의식이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를 계발하는 가장 순정한 에너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대학 1학년 여름 방학에 필자는 모두 다섯 권의 책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갔다. 그것은 그즈음 새롭게 각광을 받던 신비평 연구서인 르네 웰렉의 문학의 이론과 송욱 교수의 시학평전, 동양고전인 고문진보,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이었다. 이들을 어떤 지적 네트워킹으로 읽어냈는지는 확실치 않다. 대학 1학년짜리인 필자가 학교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을 만지작거리는 긴 과정이 있은 뒤에 고른 책들이었다. 누군가의 권장 도서 목록에 영향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필자가 ‘나의 독서’를 스스로 자랑하고 싶은 책들이었다. 허영심의 일종이었겠지만 내 나름의 지적 당위를 보장해 줄 것 같은 책들이었다. 나는 이들 독서경험을 밑천으로 내 ‘지식의 눈사람 만들기’를 비로소 시작한 셈이었다. 눈사람 만들기에서 첫 눈덩이를 뭉치는 것이 중요하듯이 무엇이든 첫 밑천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비단 물리적 법칙에 그치는 것일까. 정신의 영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들 책을 읽어낼 무렵, 위태롭게 지적 자존심을 펄렁거려 보기도 하고, 강적을 만나 불쌍하게 추락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이들 책은 ‘내 마음의 커리큘럼’으로 선택되고 작동한 원천이었다. 물론 학교가 제공하는 커리큘럼과 알게 모르게 상호성을 만들어 갔을 것이다. 지식 정보의 베이스가 빈곤하기 그지없었던 시절인지라, 나는 내가 만든 ‘내 마음의 커리큘럼’이 대견스러웠다. 커리큘럼(curriculum)이란 말은 1918년에 보비트(Bobbitt)가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지금이야 이 말이 널리 쓰여서 평범하고 흔한 말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참으로 신통방통한 느낌을 주는 대단히 모던(modern)한 용어였다. 사람이 태어나 자라면서 그저 의욕 가지고 배우고 경험하면, 그것이 곧 교육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커리큘럼이란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신조어가 얼마나 생명력이 있을까 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커리큘럼이란 말은 20세기 내내 막강한 힘을 자랑하면서 그 세력을 키워 왔다. 마침내는 학문의 한 분야가 될 정도로 확장을 계속해 온 것이다. 커리큘럼이 무엇인가.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대한 온갖 정합성을 살피고, 그것을 바탕으로 보다 전략적이고 합목적적인 교육 내용의 실체를 만들고 실현하는 것이 바로 커리큘럼이다. 커리큘럼이란 말이 이렇게 세력을 갖추게 된 것은 교육이, 특히 학교가 근대적 제도로서 필수불가결의 기능과 역할을 해 나가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교의 기능을 이토록 극대화하도록 한 시대는 어떤 시대이었는가. 그 시대를 한 마디로 재단하기는 어렵겠지만 아마도 다음 몇 가지 특징을 담은 시대가 아닐까 한다. 그것은 기술 자본주의가 팽창해 온 급격한 산업화 근대화의 시대이다. 동시에 민주화와 인권의 신장이 전 지구촌에서 추구되었던 시대이기도 하다. 학교는 그런 시대를 실제로 추동시켰던 원천이었던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학교가 그러했다기보다 학교의 커리큘럼이 20세기의 역동성을 생성하고 견인하던 실질의 콘텐츠이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커리큘럼은 20세기라는 시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들 양자는 운명적으로 궁합이 맞을 수밖에 없는 필연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커리큘럼이란 말은 경주하는 말이 달리는 말의 경주로인 ‘currie’에서 온 말이다. 학교는 커리큘럼으로 굴러가는 학습의 마차이다. 우리는 그 마차가 제공하는 경주로에 내 존재를 맡긴다. 우리는 그 마차에 미완성인 현존의 나를 맡기고,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나의 미래를 맡긴다. 자동화된 시스템처럼 커리큘럼이 어디에서나 대기하고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후기산업사회의 기능인을 계발하는 커리큘럼의 모습은 여기까지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제 커리큘럼도 다양한 개별화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믿을 만한 커리큘럼에 자신의 계발을 의탁하는, 시스템화 된 커리큘럼도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나를 주체화하는 커리큘럼,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 만든, 스스로의 커리큘럼이 창조적 지식인들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내가 나를 계발하기 위해서 달려가야 할 나의 경주로는 어디인가. 그 경주로는 내가 주인이 되는 다양하고 역동적이고 네트워킹의 모습으로 구현되는 지식의 경주로이어야 할 것이다. 1968년 그해 여름, 필자가 만든 ‘내 마음의 커리큘럼’은 필자에게는 지독하게 난해한 것이었다. 읽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없었다. ‘난해함’에 대한 미지의 매력과 짝사랑이 곧 필자의 지적 정체성이었으므로 난해하다는 그 사실에만 우월감을 느끼려 들었다. 그러므로 그 정체성은 일종의 허영에 가까운 것이었다. 궤변 같지만 모든 진정한 마음은 일종의 낭만적 허영을 속성으로 하는 것이어서 그 허영에 스스로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의 커리큘럼’은 내용 실체는 엉망으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커리큘럼의 형식은 고답하게 빛났다고나 할까. 그러나 실상은 책읽기의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속여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읽을수록 더욱 깜깜해지는 내용을 두고 몇 번인가 포기를 생각했었다. 배반의 생각이 서로의 꼬리를 물었다. ‘이런 독서는 의미 없다.’ ‘아니다, 자기 자신이 택한 ‘내 마음의 커리큘럼’이므로 오기로 뚫어내어야 한다.’ 모르는 것을 아는 듯이 말하기란 모든 지식 훈련의 필요과정임을, 그리고 그 과정은 끝없는 추락을 경험하는 데에 이르러 마침내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필자는 오늘의 ‘나’를 형성시킨 원천의 커리큘럼으로써 대학 1학년 여름 내가 만들었던 다섯 권의 책으로 된 ‘내 마음의 커리큘럼’을 소중하게 회상한다. 그것이 나의 출발이었다. 오늘 우리들 개개인의 마음에는 어떤 ‘커리큘럼’들이 그 경주로를 펼쳐 놓고 있는가. 현 단계에서 우리들 각자는 어떤 이상적 자아를 꿈꾸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현실적 성취를 강하게 추구하려고 하는가. 꿈과 동기가 강할수록 그것을 추동하는 ‘내 안의 커리큘럼’이 필요하다.
“카르타고의 한니발! 칸네 전(戰)에서 로마를 꺾은 여세를 몰아 이탈리아 전체를 장악하고 로마를 멸망시키다.” 물론 뒤집은 이야기다. 실제 한니발은 칸네 전을 비롯한 대소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탈리아반도를 점령하지 못했고, 결국은 자마 레기아 전투에서 로마에 완패했다. 로마의 앞길 가로막은 카르타고 공화국 500여 년과 제국 500여 년의 천년 역사를 자랑하며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여 지중해를 자국의 호수로 만든 로마. 군신(軍神) 마르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마르스에 바쳐진 동물인 늑대와 딱따구리에 의해 양육된 로물루스가 쌍둥이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세웠고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한 정복자 카에사르, 기독교를 박해하고 로마 시에 불을 지른 네로, 콜로세움·개선문·카라칼라욕장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고대의 사가 폴리비우스는 로마에 견줄 나라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로마는 세 번(혹은 네 번)이나 세계를 정복했다. 독일의 사가 랑케가 “고대의 모든 역사는 한 호수로 들어가는 강들과 같이 로마의 역사 속으로 흘러 들어가며, 근대의 모든 역사는 로마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나온다”고 했듯이 로마는 서양인들의 가슴에 늘 살아있는 ‘영원한 제국’이다. 로마만큼 오래, 그리고 확실하게 넓은 땅을 지배하면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한 나라가 어디 또 있으랴! 하지만 BC 219~204년의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에게 패했을 경우 로마가 세계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아니 생존이나 할 수 있었을까? 패장으로 역사에서 살아남은 한니발을 등장시킨 2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와 로마의 운명을 갈랐을 뿐 아니라 고대와 중세 지중해 세계 역사의 향방을 결정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은 식민도시국가로 출발해 BC 265년경에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기로에 섰다. 반도국가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지중해로 나가 세계국가로 발돋움할 것인가? 후자를 택한 로마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반도에 거의 맞닿아 있되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던 시칠리아(2010년경에는 메시나 대교로 이탈리아반도와 이어진다고 한다) 문제였다. 로마는 결국 강력한 해상국가 카르타고에 도전해 시칠리아를 빼앗았다(BC 264~241년의 1차 포에니 전쟁). 허를 찔려 소국 로마에 패한 카르타고는 아예 로마를 없애버리기로 하고 대군을 동원했다. 알프스 넘어 8만 대군을 무찌르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문자로 유명한 페니키아(레바논과 시리아 연안)가 BC 9세기경에 북아프리카의 튀니지 일대에 세운 상업식민지였다. 동지중해는 물론 서지중해와 대서양 연안까지 진출했고 일설에는 아프리카를 회항했다고 하는 해양국가 페니키아는 BC 600년 이후 약화되어 소멸했지만 그것의 상업식민지로 건설된 카르타고는 알렉산드로스의 헬레니즘 제국이 분열해 약화되고 로마가 아직 강국으로 성장하지 못한 시기에 서지중해 일대를 장악해 강력한 해상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1차 포에니 전쟁에 패한 후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의 손에 이끌려 카르타고의 주신(主神) 타니트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로마의 정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맹세한 9살의 한니발. 그는 약관 26세의 나이에 카르타고 군의 사령관이 되어 로마원정에 나섰다. 한니발은 전력이 강화된 로마해군을 의식해 육로를 택해 알제리 쪽으로 향했다. 자신이 훈련시킨 용병대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 그는 스페인 해안을 따라 남프랑스로 향했다. 진격하면서 곳곳에서 전사를 증원한 한니발은 결국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전투코끼리를 포함해 5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나폴레옹보다 2천여 년이나 앞서 험준한 알프스를 넘던 한니발의 악전고투가 눈에 보일 듯하다. 10월이라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일렀지만 알프스에는 눈이 깊이 쌓인 데다 원주민의 공격까지 받았다. 병사, 말, 코끼리, 수레 등 가릴 것 없이 숱하게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지거나 눈에 파묻혀 죽어갔다. 하지만 기어코 알프스를 넘은 후 남진한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쪽의 칸네에서 로마의 8만 대군을 격파해 로마를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뜨렸다(BC 216). 전투는 승리했지만 전쟁엔 패배 로마의 루키우스 파비우스와 가이우스 바로는 한니발 군과의 정규전을 준비하고 8만여 병력을 지휘해 칸네로 진격했다. 카르타고 군은 4만 여의 보병과 1만 여의 기병이었다. 로마는 오른쪽에 아우피두스 강이 흐르고 5㎞ 쯤 뒤에는 바닷물이 넘실대는 칸네의 남서쪽에 진을 쳤다. 그리고 적의 중심부를 분쇄하기 위해 6천여 기병을 날개로 삼고 밀집대형의 대규모 보병으로 공격했다. 한니발은 스페인과 갈리아(프랑스) 출신 보병을 중앙에, 아프리카의 두 군단을 측면에, 기병을 좌우익으로 포진시켰지만 대형을 탄력적으로 변형했다. 그리하여 로마군과 맞닥뜨렸을 때 한니발군은 초승달 대형을 취하면서 아프리카군단들이 중앙을 맡았다. 또한 한니발 군의 좌우익 기병은 적을 압박하고 후미의 적까지 격퇴시켰다. 한편 로마의 보병은 한니발의 중앙군을 조금씩 후퇴시켰다. 하지만 바로 그 때 한니발 군이 뒤로 물러나 버리자 진격을 계속한 로마의 대군은 함정에 빠져버렸다. 한니발 군의 초승달 대형은 그때 다시 원형 대형으로 바뀌었고 보병은 후미의 기병과 함께 로마군을 역공했다. 포위되어 제대로 싸울 수 없게 된 로마의 대군은 흩어졌고 전투는 로마의 참패로 끝났다. 카르타고는 6천여 명의 전사를 잃은 반면 로마는 8만의 병사 중 1만 4천여 명만이 도주해 목숨을 건졌을 뿐 1만여 명이 생포되고 나머지는 모두 전사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한니발은 이탈리아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로마시를 포함한 인구 밀집지역들을 장악하지 못했다. 로마의 느림보장군 파비우스 쿤크타토르는 정규전을 피하고 게릴라전을 펴 카르타고 군을 괴롭히고 또한 줄곧 긴장상태에 있게 했다. 전쟁의 승패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 지루한 소모전이 되면서 한니발은 전력만 낭비했다. 본국에서 파견한 원군도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한니발은 이미 전투에는 이기되 전쟁에서는 지는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패배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니발 늘 그러하듯이 역사는 무한정의 소강상태를 허용하지 않았다. 운명의 갈림길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두 차례나 한니발에게 패한 바 있는 로마의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소수 정예군을 이끌고 지중해를 건너 카르타고를 기습공격하자, 이탈리아반도에서 15년여 소모전을 벌려온 한니발은 본국을 방어하도록 소환되었다. 그러나 한니발 군은 자마 레기아 전투에서 완패했다(BC 204). 한니발은 칸네에서처럼 전투코끼리를 동원해 포위전법을 폈으나 로마 군은 더 이상 그의 현란한 작전에 현혹되지 않았다. 스키피오는 누미디아의 기병으로 카르타고 군을 제압한 다음 적진 깊숙이 침투해 그 배후를 공격했고, 그로 인해 이번에는 로마 군이 카르타고 군을 포위해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스키피오 군은 우세한 기병의 지원을 받은 반면 한니발 군의 전투코끼리들은 전열이 흐트러지자 놀라 날뛰면서 오히려 아군을 짓밟았다. 유연한 전략으로 한니발 휘하의 카르타고 군을 제압하여 로마를 위기에서 구한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누스’란 존칭을 받았고 패한 카르타고는 굴욕적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카르타고는 스페인을 포함해 모든 해외영토를 로마에 넘겨주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었으며 전함도 12척 이상을 보유할 수 없었다. 패장 한니발은 작전의 실패와 관련해 질책을 받았지만 최고 정무관(수페트)이 되어 일시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겨냥한 친(親) 로마 인사들의 음모를 감지한 후 시리아로 망명했다. 시리아마저 로마에 패하자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된 한니발은 자결로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BC 183).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아마도 칸네 전 승리나 뛰어난 용병술과 과감한 작전 탓이겠지만 패장 한니발은 역사에서는 오히려 승장 스키피오를 누르고 명장으로서 살아남았다. 포에니 전쟁 후 세계로 진출한 로마 50여 년 후의 3차 포에니 전쟁은 언제 다시 무서운 적이 될지 모를 카르타고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한 로마의 예방전쟁이었다. 카르타고는 2차 포에니 전쟁 후 주변 지역들과 다시 교역하는 등 국력을 점차 회복해 갔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로마의 동맹국 누미디아와 전쟁을 벌려(BC 150) 로마에 침공의 구실을 주었다. 숨통을 끊어 후환을 없애려고 재침의 기회를 엿보던 로마는 조약위반을 구실로 3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다. 로마와의 새로운 전쟁이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임을 모를 리 없던 카르타고는 일체의 무기를 로마에 넘겨주는 등의 굴욕을 참아가며 전쟁을 피해보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자마 레기아 전투에서 승리한 대(大) 스키피오의 손자 에밀리아누스 스키피오가 로마군을 지휘했다. 로마는 4년여의 공격 끝에 카르타고를 초토화시켰다(BC 146). 카르타고는 성문을 굳게 닫고 남녀노소할 것없이 결사 항전했다. 노예들까지 무기를 들었지만 지중해 세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로마 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거기다 그들은 굶주림과 역병에도 시달려야 했다. 역사는 강자가 연출하는 드라마라지만 로마는 카르타고를 잿더미로 만들고 최후까지 저항한 5만여 명을 학살하거나 잡아서 노예로 삼았다. 또한 내친김에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던 마케도니아와 시라아 등 동지중해 지역도 정복했다. 그리하여 로마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스페인, 북아프리카, 발칸반도, 소아시아를 차지하여 일약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카에사르를 지나 제국 초에 이르러 이집트와 중동, 프랑스와 잉글랜드 등을 손에 넣어 지중해를 사실상 자국의 호수로 만들었다. 로마는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mare nostrum)’로 불렀다. 잉글랜드로부터 루마니아에 이르기까지, 모로코로부터 요르단에 이르기까지 50여 개의 속주를 두고 지중해 세계를 통치한 로마는 믿어지지 않지만 요르단에서 스코트랜드까지 장성을 쌓기도 했다. 카르타고는 결국 지도에서 사라졌지만 칸네 전의 한니발이 자마 레기아에서도 승리했을 경우 로마와 지중해 세계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어떤 모양으로 기록되어 있을까? 물론 로마제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천년의 역사와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번영, 콜로세움, 개선문, 카라칼라욕장 등 로마가 자랑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도 물론 회자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크게는 동양과 서양의 역사가 사뭇 다르게 진행되었고, 따라서 동양과 서양의 관계 또한 지금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초등학교5,6학년 교사의 수업 부담은 정말로 대단하다. 그러나 직접 이를 담당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고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들은 5,6학년 담당을 기피하기에 다소 젊다는 선생님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본의 누마타시 교육위원회는 2007년도부터 시내 13개 초등학교의 5.6학년을 대상으로, 한 학급에서 복수의 교원이 자신 있는 과목을 지도하는「상호 교체형 학급 담임제」를 도입하였다. 이 제도는 종래의 학급 담임제를 유지한 채로 일부 교과에서 교과 담임제를 도입하는 것으로써 동 시교육위원회가 독자적으로 명명한 것이다. 현교육위원회에 의하면 이와 같은 제도를 시내 전 학교에 도입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이 제도는 각 교원의 전문 분야나 자신 있는 과목을 살림으로써, 아동들에게 충실한 교과지도를 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교과 담임제에 대한 부담없는 이행과 한 학급을 복수의 교원이 담당함으로써 아동을 여러 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등의 장점이 있다. 교체 예로는, A반 담임이 옆 B반에서 이과와 만들기를 지도하는 대신, B반 담임이 A반에서 사회와 체육을 담당하는 등, 교원이 서로 동일한 시간을 담당하도록 한다. 교체는 다른 학년의 담임 간 이외에도 담임을 맡고 있지 않는 교무주임, 교감을 합해서 4,5명으로 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동 시교육위원회의 시산으로는 두 학급 간의 교체 방법은 약 40가지 정도가 있다고 한다. 어떤 방법을 채용할 것인지는 각 학교장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각 학교는 시교육위원회에 4월 말까지 실시 계획을 제출하고, 학급을 담당하는 교원 전원이 학생지도 지원그룹을 만들어, 수업 별로 학생들의 수업 상태를 노트에 기록해서, 전원 열람할 수 있도록 한다. 그룹에서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학습지도 뿐 만이 아니라, 따돌림과 등교거부 등의 생활지도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동 시교육위원회에서는 앞으로, 새로운 제도의 개요와 각 학교의 추진 상황을 시 홈페이지에서 소개해서 전국에 발신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