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서는 오는 2월 말일, 다섯 분의 선생님이 교단을 떠나신다. 한 분은 정년퇴임, 네 분은 명예퇴임을 하신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학교라서 매일 얼굴을 부딪치며 고락을 함께한 분들이라 정이 들대로 들었는데, 떠나신다니 서운한 마음 무척 크다. 특히 이번에 명예퇴임을 하는 분들은 정년보다 4~5년 이상 앞당겨 떠나는 것이라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우리 교직원들은 작별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퇴임식과 함께 조촐한 송별연을 계획했다. 하지만 그분들은 이런 자리를 끝내 사양하셨다. 모두가 나서서 꼭 이 자리에 나와 주시길 거듭 간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업무 인계인수만 마무리하고 조용히 나가시겠다는 것이다. 필자가 교단에 첫 발을 내디딘 198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선생님들의 퇴임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새 학기 시작 전 퇴임식 날, 교문 위에는 주인공 선생님과의 아쉬운 작별을 알리는 현수막이 높이 걸렸고, 동료 교직원은 물론 각처에서 찾아온 수십 년 제자들과 친지들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곱게 차려입은 가족들이 동석한 가운데 약력 소개와 더불어 훈장이 수여됐으며, 교장선생님과 외빈들의 애틋한 정을 담은
지난해 말, 경기도 이천시에 위치한 어느 고교 1학년 교실에서 몇 명의 학생들이 수업 중이던 기간제 교사(남, 39세)를 빗자루로 때리고 손으로 머리를 밀치는 사건이 발생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공개된 동영상 속에서 학생들은 그 교사에게 욕설을 퍼붓고 바닥에 침을 뱉기도 했다. 또 일부 학생들은 웃으면서 이 광경을 지켜봤고 한 학생은 이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이 학생은 동영상을 SNS에 게시했다가 학교 측이 알게 되면서 곧바로 동영상을 삭제했다고 한다. 며칠 뒤 경기도교육청 관계자는 “수업에 무단결석한 학생 3명이 교사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밝혔다. 뉴스를 시청하면서 경악했다.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광경이었다. 현장의 교권 추락이 심각하다지만 그래도 이 정도에 이른 줄은 몰랐다. 도대체 무엇이 교육 현장을 이 지경으로까지 만들어 놓았다는 말인가. 분노하기에 앞서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몹시도 참담하고 부끄러웠다. 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지난 5년간의 교권침해 현황에 따르면, 학생·학부모에 의한 사례는 무려 2만 6000여 건이나 된다고 한다. 그 중 폭언·욕설이 1만 6485건, 수업 진행 방해 5538건, 기타 3165건이
지난 9월 말, 초등학교 교실에서 아들의 담임 여교사를 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40대 남성에게 징역 2년 6개월이 선고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 학부모는 지난 4월 8일 오전, 대구시 한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30대 교사의 뺨을 때리고 머리채를 잡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하루 전, 교실에서 크레파스를 집어던진 아들을 교사가 나무라며 머리를 한 차례 때린 데 항의해 학교를 찾았다가 이런 일을 벌였다고 한다. 다른 폭행사건에 비해 형벌이 다소 무겁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벌백계(一罰百戒) 차원에서 이뤄진, 재판부의 고심(苦心)이 담긴 판결이라 여겼다. 사법부의 교권침해 사범에 대한 응징 의지가 이러할 진데, 앞으로 그동안 빈발하던 교단에서의 교사 폭행 사태는 확실히 수그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바로 얼마 전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 여성 학부모가 학교에 난입해 담임교사에게 욕설을 하며 뺨을 때리는 끔찍한 교권사고가 또 발생한 것이다. 그 학부모는 지난 달 3일 오전, 교내에 무단으로 진입해 아이의 반 교실로 들어가다가 이를 제지하려는 담임교사에게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은 뒤 머리채를 잡고, 뺨을 때리고, 발로 복부를 차서 전치(全治) 2
몇 해 전, 필자가 재직하던 어떤 학교에서 겪은 일이다. 학년부장을 맡으셨던 김 선생님은 매사에 열정이 넘치셨다. 원로교사로서 연세가 꽤 높으셨음에도 아침 일찍 등교해 복도를 돌면서 전 학년의 자습감독을 하셨으며, 자신이 맡은 수업 또한 토론 등 새롭고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가며 매우 알차게 진행하셨다. 하교 후에도 교재 연구와 동아리 지도를 하시느라 퇴근은 항상 맨 나중이셨고…. 나무랄 데 없는 모범교사이셨던 것이다. 선생님의 열정은 생활지도에서 더욱 빛났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는 교실을 돌면서 복장 위반자나 지나친 화장을 한 학생들, 또 무단으로 지각·결석을 한 학생들을 일일이 불러내 때로는 타이르고, 때로는 무섭게 꾸짖으셨다. 이 호랑이 선생님 덕택에 같은 학년을 맡은 동료교사들은 생활지도로 인해 반 아이들과 낯붉힐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한해가 저물어갔다. 그해 늦가을 어느 날 오후, 그 선생님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필자를 자신의 자리로 부르셨다. 그리고는 컴퓨터를 열어 무언가를 보여주셨다. 이른바 ‘교원능력개발평가’의 결과였다. 학생들이 그 선생님을 평가한 ‘만족도’ 점수는 2.3이었다. 2.5 이하면 연수대상이다. 놀라 쳐다보니, 그분은 비록 미소
자녀교육에 유난히 관심이 많으셨던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필자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신언서판’을 두루 갖춰야 한다"고 줄곧 일깨우셨다. 그리고 그 네 가지 덕목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셨다. ‘신(身)’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것이고, ‘언(言)’은 말을 겸손하면서도 조리 있게 하는 것이며, ‘서(書)’는 글씨를 정성을 다해 반듯하게 쓰는 것이고, ‘판(判)’은 매사에 분명한 판단력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서는 스스로도 이 덕목들을 무척 엄격히 실천하고 계셨다. 원래 풍채도 좋으셨지만, 단정한 한복차림에 언제나 등을 꼿꼿이 편 채 앉으셨고, 어떤 경우에도 곁눈질을 하거나 남의 말을 엿듣는 일이 없으셨다. 나직한 목소리로 담소하기를 즐기셨지만, 당신이 말하기보다는 남의 말을 경청하기를 더 좋아하셨다. 글씨를 쓰실 때는 아무리 하찮은 내용이라도 흘려 쓰는 법이 없이 정자(正字)로 또박또박 쓰셨다. 바쁜 농사철에도 손에서 놓지 않으셨던 책과 신문은 친지·주민들의 대소사를 상담해주는 남다른 판단력의 원천이 되었고…. 슬하의 우리 여섯 남매는 성장하면서 변함없이 한결같은 모습을 지키시는 아버지를 사뭇 어려워했지만, 존경하지
청소년 시절 ‘논어’를 읽으면서 많은 깨우침을 얻었다. 일생의 가르침이 된 구절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교사가 되어 가슴속에 깊이 새겼던 것이 ‘학이편(學而篇)’에 나오는 증자(曾子)의 말이었다. “나는 날마다 내 몸을 세 가지로 살핀다. 남을 위해 일을 꾀하면서 진심을 다하지 않았는가? 벗들과 사귀면서 믿음직하지 않았는가? 익히지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지 않았는가?[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여기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삼성오신(三省吾身)’이다. 원문 첫 구절의 ‘삼(三)’은 ‘세 번’이라고 직역할 수도 있지만, ‘세 가지’로 옮기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또 끝 구절 ‘전불습호(傳不習乎)’는 ‘스승께 전수받은 것을 복습하지 않았는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나, 스승의 입장이 된 증자의 말이라는 점에서 앞의 번역문이 더 타당할 것이다. 교단에 첫 발을 내디딘 초임 시절, 나는 이 구절을 무수히 되뇌었다. 그리고 이를 나름대로 해석하며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맡은 학생들을 위해 매사에 최선을 다했는가?’ ‘동료 선생님들에게는 언제나 믿음직한 모습을 보였는가?’ ‘나 자신이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는 않았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졸헌송(拙軒頌)’에 ‘찾으려던 공교함 찾지 못하고/얻어낸 졸렬함 어디서 왔는가./사기 동이 깨트리고 한번 물으니/광자(狂者), 이로 인해 눈을 떴다네./기교를 부리다 망치는 것은/뱀을 그리면서 다리를 그리는 격이니….[覓巧了不可, 得拙從何來, 打破沙盆一問, 狂者因此眼開, 弄巧成拙, 爲蛇畫足….]’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별집 권19, 성행부(性行部)’에 실려 있다. 여기에서 유래한 성어 ‘농교성졸(弄巧成拙)’은 ‘지나치게 기교를 부리다가 도리어 서툴게 됨’을 뜻하는 말로, 이 글 속에 나오듯이 '화사첨족(畵蛇添足)‘과도 의미가 통한다. 이는 ‘잘 만들려고 너무 기교를 다하다가 도리어 졸렬한 결과를 보게 된다’는 뜻의 사자성어 ‘욕교반졸(欲巧反拙)’의 근원이 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이 ‘욕교반졸’의 출전을 ‘논어’로 적어놓은 책들이 많으나 잘못된 것이다. 요즘 교육계의 화두가 된 인성평가 논란을 보면서 떠오른 성어가 바로 ‘농교성졸’이다.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을 갖춘 시민 육성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국회에서 ‘인성교육진흥법’을 제정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굳이 법까지 만들 필요가
중학시절, 해마다 전국적으로 실시된 ‘고전읽기 경시대회’에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효경(孝經)’이라는 책을 읽었다. 암기해야 할 많은 책 중 하나였다. 그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었다. 증자(曾子)의 물음에 답한 공자의 말이다. “몸과 머리털과 피부는 다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헐고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고, 몸을 세워 도(道)를 행하여 후대에 이름을 떨쳐 부모님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효도의 끝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천신만고 끝에 암기는 했지만, 어린 나이에 그 깊은 뜻을 알 수는 없었다. 그 후 고교에 진학해 ‘소학언해’에 인용된 이 구절을 배웠음에도 너무 낡고 고리타분한 봉건적 가치로만 여겨졌다. 극단적인 해석으로 머리털은 물론 손톱 깎는 것조차도 꺼렸다는 일부 유자(儒者)들의 행태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성장해 나 자신이 부모가 되고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이를 가르치면서 그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자녀들의 건강과 안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어서도 그랬거니와 ‘입신행도(立身行道)’의 함의가 주는 울림이 매우 컸던 것이다. 성인의 말씀
중국 북송(北宋) 시대 양시(楊時)와 유초(游酢)는 대유학자 정호(程顥)의 제자였다. 정호가 세상을 떠나자 그들은 정호의 동생인 정이(程頤)를 스승으로 섬기고자 찾아갔다. 그들이 정이의 집에 이르렀을 때, 마침 정이는 눈을 감고 앉아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서서 정이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이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한참 뒤 정이가 눈을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을 때 문 밖에는 눈이 한 자나 쌓여 있었다.[…頤既覺,則門外雪深一尺矣] '송사-양시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기서 유래한 고사성어 ‘정문입설(程門立雪)’은 ‘정자(程子)의 집 문 앞에 서서 눈을 맞다’는 의미로, 제자가 스승에게 존경을 다하거나 간절히 배움을 구하는 자세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예로부터 스승이란 이런 존재였다. 그래서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하나[君師父一體]’이니 똑같이 섬기라 했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도 생겼다. 필자의 학창시절 때만 해도 스승은 그처럼 높고 귀한 분임에 틀림없었다. 어버이처럼 친근하고 다정스러우면서도 어렵고 두려웠다. 가까웠지만, 다가서기에는 조심스러운 분이 스승이었다. 세상 그 누구
선생님과 처음 만나던 날, 우리는 바짝 긴장했다. 깔끔한 감색 양복을 입은, 후리후리하면서도 다부진 체격의 선생님은 말수가 적으셨고 함부로 웃지도 않으셨다. 키 순서에 따라 번호를 정하고 자리를 배정해 주시는 동안 떠드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이 또렷한 말투로 원칙 준수를 강조하실 때는 참 무서운 선생님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자상하고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셨다. 제자 누구에게나 친절하셨던 선생님은 청소시간에는 늘 우리들과 함께 빗자루를 드셨고 야외수업에 나갈 때면 철부지 아이들을 하나하나 보살피셨다. 방과 후엔 아직 한글을 깨치지 못한 애들을 위해 받아쓰기를 시키셨다. 앞산 그림자가 교실 창문에 어른거릴 때까지…. 수업 시간이면 선생님은 꼭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 강감찬과 이순신이 나라를 구한 이야기,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길어진다는 피노키오 이야기 등 한 해가 다 가도록 선생님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호기심 많았던 나는 그 얘기들 속에서 한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포부를 가다듬었다. 선생님처럼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세월이 흘러 나 또한 교사가 되었다. 오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