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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멤논, 복수의 끝은 어디에 있는가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개구리>에서 희곡의 신 디오니소스는 더 이상 들을만한 비극작품이 없어 매우 심란해한다. 살아있는 작가들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디오니소스는 고민 끝에 저승에서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 중 한 명을 데려오려 한다. 하지만 저승에서는 갓 죽은 에우리피데스가 아이스퀼로스에게 비극의 왕 자리를 놓고 심한 언쟁을 벌이고 있다. 오랜 논쟁을 지켜본 디오니소스는 아이스킬로스를 다시 이승으로 데려간다.

 

고대 아테네의 비극작가 3인방으로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꼽힌다. 지난번 다루었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3부작>이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과 각성하는 자아의 모습을 그려냈다면,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는 인간 내면에 깊숙이 박혀있는 ‘복수’를 주제로 한다.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 <자비로운 여신들>로 이어지는 현존하는 유일한 3연작 <오레스테이아>를 읽어보자.

 

복수를 주제로 한 막장드라마, 그 속에 담긴 의미

트로이아 전쟁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10년간의 고초 끝에 고국 미케네로 돌아왔다. 하지만 원한에 사무친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대담한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무의미 없는 전쟁을 위해 친딸을 제물로 바치는 남편을 용서할 아내가 얼마나 될까.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 집안의 원수 아이기스토스와 간통하고, 그의 도움을 받아 아가멤논을 죽인다.

 

아가멤논의 부친 아트레우스와 아이기스토스의 부친 티에스테스는 불구대천의 원수관계이다. 이미 형수와 동생의 불륜으로 원한이 잔뜩 쌓여있었던 데다 왕위를 놓고 신들 앞에서 아귀다툼을 벌여야 했던 두 사람은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넌다. 아트레우스는 티에스테스의 자식들을 고기로 만들어 티에스테스를 모욕했고, 티에스테스는 복수를 위해 근친상간으로 낳은 아이가 아트레우스의 아들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따른다. 아버지가 자신을 강간했다는 수치심에 자살한 딸의 아들이 바로 아이기스토스였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지만 막장 드라마로만 치부해버리면 내면을 읽을 수 없다.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본질을 끄집어내 직면하려고 해야 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희랍 비극을 일방적으로 숭배하거나 마냥 폄하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들여다보자.

 

완전한 파멸, 혹은 완전한 화해

복수는 영웅들의 사고방식이다. 지체 높은 신분의 귀족들은 자신의 모욕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복수는 어느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원한은 쌓이고 쌓여 더 큰 원한으로 남게 된다. 일단 커진 분노는 더 이상 누구도 억누르지 못하는 분노가 되어 나를 삼킨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극한 대립을 끝장낼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완전한 파멸 아니면 완전한 화해이다.

 

완전한 파멸은 간단하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도시를 파괴하고 남자는 모두 죽이고 부녀자는 노예로 삼는다. 상대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제압해야 한다. 시간이 흘러 내가 늙고 힘 없는 상황에서는 상대가 복수할 여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극단적인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완전한 파멸이 아니라면 완전한 화해이다. 화해는 극단적인 대립을 멈춘다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너와 내가 대립을 멈추고 이제부터 친하게 지내자는 식의 방식으로 해묵은 대립이 끝날 리 없다. 화해는 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 나를 내려놓는 데서 출발한다. 화해는 헤겔식의 정반합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드는 차원은 승패의 이분법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삶의 규칙을 기초부터 다시 세우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이러한 정초(定礎)는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허하게, 신들의 뜻이 우리와 함께하기를 기대하며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화해한 것처럼 몸을 숙이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지만, 승패는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다. 패자는 웅크린 채 항상 승자의 허점을 노려 어퍼컷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굴복시키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각자의 철옹성을 열고 새로운 우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새로운 세계는 더 이상의 승자도 패자도 없다.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리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 시시비비로 정화(katharsis)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의 카산드라, 그 억울함은 누가 위로해주나

아가멤논이 레드카펫에 올라 클뤼타임네스트라가 파놓은 덫으로 향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신들의 노여움을 두려워하는 아가멤논에게 “당신은 이 정도는 해도 될 사람”이라며 짐짓 안심시킨다. <일리아스>에서 아가멤논의 행적을 봤던 사람들은 기억한다.

 

아킬레우스의 도움 없이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던 그리스 연합군이었지만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돌아갈 미녀를 가로챈다. 전쟁 직후 폭풍으로 많은 병사가 희생당했고 아가멤논은 친동생 메넬라오스의 행방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전리품 카산드라를 데려와 잘 모시라고 명한다.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 입장에서는 죽어서 돌아왔어야 할 인간이 첩까지 데리고 돌아와 그들의 복수심을 한껏 자극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가장 불쌍한 사람은 예언자 카산드라이다. 트로이 왕가의 공주로 태어난 삶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고, 예언의 능력을 가졌지만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탓에 아폴론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가 하는 옳은 말은 누구도 듣지 않았고, 카산드라의 바람과는 달리 트로이는 잿더미로 변했다. 기구한 운명은 끝나지 않아서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전리품으로 미케네에 끌려왔다. 이제는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의 칼날과 피냄새를 느끼며 울부짖는다. 카산드라의 억울함은 누가 위로해줘야 했을까.

 

우리 주변에 숨어있을 카산드라들을 지켜본다. 때로는 가장 정확한 말을 하고 있을, 가슴에 사무쳐 있을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사회 속의 예언가들은 <오이디푸스 왕>의 테이레시아스가 그렇고, <아가멤논>의 칼카스가 그렇듯 가장 믿을 수 없고, 듣기 싫고, 피하고 싶은 말들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예언가들은 어디까지나 진리를 지켜보고 그 진리의 모습을 전달하는 일종의 매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가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피할 수 없고, 없는 사실을 지어내 전달할 능력 또한 갖지 않는다. 예언가들은 자신이 본 것을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 그것이 예언가의 숙명이다. 그리고 예언가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예견할 수는 있지만, 그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그 역시 신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이기스토스의 힘을 빌리지만, 극을 주도하는 것은 여자인 클뤼타임네스트라이다. 아이기스토스가 겁쟁이처럼 뒤에 숨어있는 반면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아가멤논을 안심시켜 궁궐에 입성시킨다. 레드카펫을 깔아 신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아가멤논이 아무 의심 없이 욕실로 향하게 만든다.

 

코로스들은 클뤼타임네스트라를 비난한다. 그들의 주군 아가멤논을 계략에 빠트려 죽인 것을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의 지도자들이자 원로인 코로스들 역시 피에 취해 흥분해 어쩔 줄 모르는 클뤼타임네스트라에게 직접 달려들지 못하고 훈계만 할 뿐이다. 코로스들은 사회의 원로들이지만, 어디까지나 아트레우스 왕가 내부갈등의 당사자가 아니다. 나아가 그들 역시 아가멤논의 전횡에 피해를 봤던 인물들이기도 하다.

 

<아가멤논>에서 시민들은 원한 섞인 말로 아가멤논과 아트레우스 왕가를 저주한다(Agamemnon, 466~474).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하고 가장의 죽음을 힘없이 용인해야 하는 사람들의 분노는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다. 백성들의 저주는 엄청난 힘으로 아가멤논을 쓰러트린다. 아가멤논의 죽음은 클뤼타임네스트라와의 감정싸움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의 왕가에서 조차 스스로 민심을 저버렸던 삶에 대한 악업은 백성들 누구 하나조차 클뤼타임네스트라의 계획을 밀고하지 않았던 데서 명백해진다.

 

우리 편 아니면 적, 철저한 이분법에 기초한 사회

아이스퀼로스는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가. 고대사회의 윤리적 쟁점은 선명하다. 복수의 세계관이 드러난다. 아트레우스는 티에스테스와 원수지간이고, 아이기스토스와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죽여야 한다. 아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여야 아버지 아가멤논의 원한을 달래야 한다. 친구의 적은 나의 적이고, 원수의 적은 나의 친구이다.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철저한 이분법에 기초한 사회이다. 때문에 영웅의 삶은 늘 죽고 죽이는 살육의 삶이다. 내가 남을 죽이지 않으면, 언제 내가 그들에게 희생당할지 모른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윤리관을 극복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과제이기도 하다.

 

대립하던 편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 편이었던 사람들이 분리되어 새로운 편 가름이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파멸은 진정한 화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해야 하는 획일적인 삶의 강요일 뿐이다. 결국 모든 사람과 화해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이익을 이유로 언제든 나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 그들과 온전히 하나 될 수 없다. 파멸은 그 본질적인 특성상 어떤 남들과도 화해할 수 없고, 영원한 갈등과 대립의 연속임을 보여준다.

 

<아가멤논>은 복수를 목표로 했던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정의로운 복수 역시 피의 보복을 부른다. ‘정의’는 사람들의 한 맺힌 감정을 품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피에 굶주린 사람들은 더 많은 피를 갈구한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살육장을 떠나 더 이상 공포에 시달리지 않는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을까. 고대인들이 복수의 감정을 생각했다면, 현대인들의 <오레스테이아>는 화해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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