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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에게 따뜻한 옷을 입히다

문익점의 산청 도천서원

남평문씨 삼우당 문익점 선생을 찾아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도천서원을 찾았다. 1351년 왕위에 오른 제31대 고려 공민왕은 고려의 중흥을 꾀하기 위해 개혁정치를 실시했다. 원나라 앞잡이로 고려 왕실을 괴롭히던 신하들을 내치고, 고려 땅의 쌍성총관부도 폐지했다. 그러자 원나라는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왕으로 임명했다. 공민왕은 원나라에 외교사절단을 보내 자신의 개혁정치를 설명하며, 고려왕으로 복위를 꾀했다.

 

문익점이 가져온 ‘밭에 피어난 백설 같은 꽃’

문익점 선생은 35살(1363)에 외교사절단 일행으로 원나라에 갔다. 원나라 황제는 고려 외교사절단에게 덕흥군의 명령을 따르고, 충성할 것을 명령했다. 그해 덕흥군은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여 원나라로 쫓겨 갔다. 고려에 돌아온 문익점 선생은 이런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조선 성종 때 남효온이 쓴 <목면기>에는 ‘원나라 사신으로 간 문익점은 덕흥군의 미움을 받아 중국의 남쪽 걸남으로 귀양을 갔다. 그곳에서 3년이나 떠돌 때, 밭에서 백설 같은 꽃을 발견했다. 이것이 옷감을 만드는 면화임을 알고 붓두껍 속에 씨앗 세 개를 지니고 왔다’고 기록했다.

 

조선 <태조실록>에는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면화를 보고 씨앗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문익점은 이듬해 고향인 산청으로 돌아와 장인 정천익에게 면화 씨앗 5개를 주어 기르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네 그루가 죽고 한 그루만 살아 열매를 맺었다. 이듬해 다시 심는 등 3년간의 노력 끝에 면화재배에 성공했다. 그러나 면화에서 씨를 빼고, 실 뽑는 방법을 몰라서 궁리할 때 원나라 스님 홍원의 도움으로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옷감을 짤 수 있게 되었다. 곧이어 전국에서 면화를 재배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세종대왕은 ‘문익점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가져온 면화 종자와 목면업 보급으로 모든 백성이 솜 넣은 옷을 입을 수 있을 정도로 면화재배 기술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는 조선 백성들의 의생활에 있어 혁신적인 변화였다. 솜을 넣은 옷으로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는 일은 이전에는 감히 생각하지 못한 일로 의복문화의 일대 혁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급격한 생산량 증가로 조선은 그 무렵부터 일본에 면화제품을 계속 수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문익점을 칭송했다.

 

첫 면화재배에 성공한 ‘산청목면시배유지’

문익점 선생은 고향 산청에 정자를 짓고, 삼우당 현판을 걸었다. 나라의 힘이 부족함과 성리학이 널리 알려지지 않음과 자신의 학문이 부족함 등 세 가지를 걱정한다는 뜻이다. 문익점 선생이 처음 면화재배에 성공한 단성면 사월리 산청목면시배유지(山淸木棉始培遺址)에서는 지금도 매년 면화를 재배하고 있다. 산청목면시배유지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이 걸려있다.

 

東溟開國幾千秋 衣被生民自有田

(동명개국기천추 의피생민자유전)

可惜文公襄底物 飜成泉貨長繆悠

(가석문공양저물 번성천화장무유)

忠臣孝子果何耶 不見先生只觀花

(충신효자과하야 불견선생지관화)

衣是木棉綿不絶 朝鮮億載富民家

(의시목면면부절 조선억재부민가)

 

충신과 효자가 어찌 아니 나올까?

선생을 뵙지 못했으나 마치 꽃 보는 것 같네.

옷을 짜는 면화는 면면히 끊어짐이 없어

조선의 긴 세월 내내 큰 부자가 될 것이라네.

 

면화를 처음 심은 것과 관련하여 문익점 선생의 남평문씨 문중과 장인 정천익의 진주정씨 문중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있다. 남평문씨 문중에서는 옛날 해설판의 내용을 지키기 위해 문화재청과 지루한 행정소송을 거듭하였고, 현재의 해설판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진주정씨 문중과 생긴 갈등이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의 옛 해설판과 현재의 해설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문화재청의 옛 해설판 : ‘고려 말 공민왕 때 문익점이 면화를 처음 재배한 곳이다. 문익점은 35살(1363) 때, 원나라에 가는 사신의 일원으로 갔다가 원나라 관리의 눈을 피해 붓대에 면화씨를 넣어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 뒤 이곳에서 처음 면화를 재배하여 국민 생활과 경제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 현재의 해설판 : ‘고려 말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다. 문익점은 35살(1363) 때,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면화 씨앗을 구해왔다. 그 뒤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과 함께 면화재배에 성공했다. 면화로부터 얻어지는 포근한 솜과 질긴 무명은 옷감을 향상시켜 백성들의 생활에 혁명적인 공헌을 하게 되었다.’

 

 

‘존경하는 마음을 보인다’는 의미의 시경당

문익점 선생을 모시는 도천서원(道川書院)에 들어서면 존경하는 마음을 보인다는 시경당(示敬堂)과 마주한다.

 

시경당에는 스승에게 가르침을 배우는 집이라는 취정당(就正堂), 공부하는 곳이라는 학이재(學而齋), 문익점 선생을 사모한다는 앙지헌(仰止軒) 등의 현판과 함께 특이하게도 각기 다른 서체의 주련을 걸었다.

 

詆斥異湍 倡明正學(저척이단 창명정학)

大節蘇卿似 偉功后稷同(대절소경사 위공후직동)

注蘭佩於釰南扶持宗社(주난패어걸남부지종사)

播綿種於海外衣被生靈(파면종어해외의피생령)

見逐南荒艱苦三秋(견축남황간고삼추)

節義巍聳不願偩軀(절의외용불원부구)

紫陽徴眞學 又得断誦中(자양징진학 우득단송중)

 

정통에서 어긋나는 것을 꾸짖고

성리학을 분명하게 나타내는구나.

굳고 곧음은 한나라 소무 같고 공적은 후직 같네.

걸남에 귀양 가서도 고려를 근심하여

종묘사직을 지켰고

우리나라에 면화씨를 퍼뜨려서

백성에게 옷을 입혔구나.

황량한 남녘으로 쫓겨가서 삼 년을 고생하였고

절개와 의리는 높이 솟았으나 자랑하지 않는구나.

성리학은 참 학문이라 하며

끊임없이 글을 외우는구나.

 

시경당 주련에 나오는 ‘소무’는 소무목양(蘇武牧羊)에서 나온 것으로 ‘소무가 양을 기른다’는 뜻이다. 소무는 한나라 사람으로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붙잡혔다. 큰 움 속에 갇혀서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도 굴복하지 않고, 한나라의 신하로서 굳건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흉노의 추장이 숫양 댓 마리를 주면서 말하였다.

 

“이 양들이 새끼를 낳으면 너희 나라로 보내주마.”

“어찌 숫양이 새끼를 낳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러면서 현재 몽골의 북쪽에 있는 얼음의 땅 바이칼 호수 근처로 귀양을 보냈다. 소무는 먹을 것이 없어 땅속을 파헤쳐 들쥐들이 모은 풀과 열매를 먹으며 19년을 살다 한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부터 소무는 충직한 신하의 상징이 되었다.

 

‘후직’은 땅의 성질에 따라 알맞은 작물을 심어 수확량을 증대시킨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로 ‘농업의 신’으로 받들고 있다. ‘자양’은 성리학 체계를 완성한 송나라 주희를 이른다.

 

‘신안을 늘 생각한다’는 신안사재

시경당 뒤에 선생의 호를 딴 삼우사(三憂祠)가 있고, 선생의 고향인 이곳 신안을 늘 생각한다는 신안사재(新安思齋)가 자리하고 있다. 신안사재는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잠자리로 사용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주련이 걸려있다.

 

臣事恭愍不貳其貞 焚書諫院言動天潢

(신사공민불이기정 분서간원언동천황)

正學倡明素復剛確 波頹見柱歲寒知栢

(정학창명소복강확 파퇴견주세한지백)

豊功難酬表以鐵券 嘉種始來解吾民慍

(풍공난수표이철권 가종시래해오민온)

 

고려 공민왕의 신하로서 충정을 바쳐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고

사간원 좌정언으로 책을 불사르고

임금의 옳고 그름을 깨우쳤네.

성리학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굳은 의지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세상이 물결처럼 무너짐 보았으니

날씨가 추워야 잣나무 푸르름을 알겠네.

드높은 공적은 갚기 어려우나

공신록에 기록되었고

면화 씨앗을 처음으로 들여오니

우리 백성들의 근심을 풀어주었네.

 

동재와 서재에 걸린 주련

학생들의 기숙사인 서재와 글을 읽던 동재에도 문익점의 업적을 기리는 주련이 걸려있다. 서재의 주련에 나오는 ‘화폐’는 무명이 우리나라에서 돈과 같은 구실을 하였다는 것을 알려 준다.

 

一介前朝諫大夫 衣民功與泰山高

(일개전조간대부 의민공여태산고)

歸來日飮杯三百 醉臥乾坤氣象豪

(귀래일음배삼백 취와건곤기상호)

 

고려 왕조 때 간의대부 벼슬을 하였고

백성에게 옷 입힌 공은 태산처럼 높구나.

이곳에 돌아와 날마다 삼백 잔의 술을 마시고

술 취해 자연 속에 누우니 그 모습 활달하구나.

- 동재의 주련, 정여창

 

東溟開國幾千秋 衣被生民自有田

(동명개국기천추 의피생민자유전)

可惜文公囊底物 飜成泉貨長繆悠

(가석문공낭저물 번성천화장무유)

 

고려가 나라를 세운 지 얼마나 되었던가?

백성들이 옷과 이불을 자기 밭에서 생산한다네.

안타깝게도 문익점이 주머니 속에 넣어 온 면화

도리어 화폐로 사용하다니 늘 허망하구나.

- 서재의 주련, 음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