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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 <오디세이아>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다

사태는 진정되지 않고 사람들은 지쳐가고 있다. 앞으로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렵고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고 있다. ‘개학’은 사람들이 미뤄뒀던 모든 일을 하는 시발점이 되어버린 탓에 그 사회적 의미가 너무나 커져 버렸다. 온라인 개학은 일상 회복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까. 마스크 없이 봄볕을 누릴 수 있는 일상의 소중함에 우리는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영웅들은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다. 외모, 힘, 돈, 지혜 여러 면에서 보통 사람들을 압도하고 그들의 도움이라면 세상의 많은 문제가 일거에 해결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웅의 도움이라면, 갈망했지만 지지부진했던 문제들도 손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영웅을 기대하고, 한때 영웅인 줄 알았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감추지 않는다.

 

어린 시절 평범한 삶을 살겠다는 포부를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학교에서도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스럽게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에게 쉽게 매료되고 남들에게 인정받는 화려한 삶의 주인공을 꿈꾼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연예인, 돈과 인기를 긁어모으는 유튜버들이 요즘 선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명백하다. 인기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모두가 인기를 누리려고 하면 누구도 인기를 얻을 수 없다. 모두 리더가 되려고 하면 진정한 리더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고향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이상적 공간

영웅들은 모험을 즐기면서 많은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다. 얼핏 보기에 <오디세이아>는 모험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험은 <보물섬>처럼 신대륙을 향하는 여정이거나 <80일간의 세계 일주>처럼 그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일에 도전하는 일이 아니다. 오디세우스의 목표는 단 하나뿐이다. 아름다운 마녀 키르케가 마술로 위협하고, 칼립소는 7년 동안이나 그를 붙잡아두지만, 고집을 꺾지는 못한다. 나와 같이 결혼하면 불사의 신이 될 수 있다는 제안조차 뿌리치고 고행길을 나선다.

 

오디세우스의 왕궁에 황금이 가득하고 페넬로페가 천하제일의 미녀여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타케가 토지가 비옥하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은 애향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진정 이타케가 풍족한 땅이었다면 오디세우스의 부친 라에르테스가 농사일에 매진할 리 없다. 내가 살던 곳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자신이 내놓은 계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고향으로 귀환하고 싶은 것이 오디세우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키르케 덕분에 저승에서 이미 확인했고, 살아있는 아버지는 언제 명을 달리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구혼자들의 구애에 시달리고 있다는 아내가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트로이 전쟁을 함께 했던 아가멤논은 귀향 후 원수 아이기스토스와 간통한 부인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손에 죽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리적 공간으로의 귀환은 아닐 것이다. 아마 전쟁이라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이상화된 공간일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에서 말하듯 여자 하나 때문에 그리스 전역이 참여하는 전쟁을 시작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명분이 무엇이건 간에 전쟁은 과연 무엇을 남겼을까. 돌이켜보면 부와 명예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한 여자를 구출하기 위해 그리고 영웅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무 상관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 희생당했고, 승자 없이 패배자만 남은 전쟁이었다.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전리품으로 명예를 높인다고 해도 20년의 세월, 그리고 덧없이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귀향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이 중첩되어, 기억으로 남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기억의 이정표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선한 의지와 행동에서 오는 인간의 훌륭함

파이아케스 족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이타케에 도착하지만,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이타케 전역에서 구혼자들이 나타나 텔레마코스를 죽이려 하고 페넬로페에게 청혼하며 난장을 벌이고 있었다. 구혼자들은 주인 없는 집에 들어와 환대를 요구하며 주인의 살림을 탕진한다. 오디세우스 혼자의 힘만으로는 왕궁에 들어갈 수도, 100명이 넘는 구혼자들을 모두 제거할 수도 없었다. 고향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가장 낮은 신분의 거지가 되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구혼자들은 영웅을 자처하지만, 오늘날의 표현이라면 ‘양아치’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영웅들이 두루 갖춰야 할 미모와 무력은 없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허세와 허튼수작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양심 없고 이해타산에 밝은 평범한 소인배들을 유혹할 만큼의 힘은 있어서 동조자들을 구할 능력은 된다. 때문에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을 속여오던 묘책을 더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재혼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흘러가는 시간은 영웅의 황혼과 함께 새로운 영웅을 예고한다. 새로운 영웅은 오디세우스의 분신이자 지난 세월의 모든 것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존재이다. 이타케의 주인이 고향을 떠난 지 20년 만에 새로운 주인으로 성장한 텔레마코스는 오디세우스에게 구혼자들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고 직접 창을 들어 그들을 제거한다. 처음에는 구혼자들의 만행에 대책 없이 분노만 삭이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자 오디세우스의 활시위에 화살을 얹을 수 있음을 알아차린다.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과거를 기억하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증인들 덕분에 오디세우스는 외롭지 않았다.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와 유모 에우뤼클레이아는 지체 낮은 백성들이었지만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한결같이 유지하고 있었다. 오디세우스와 함께 성장했고 그를 길렀던 사람들은 신분과 상관없이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존재들이었다. 인간의 훌륭함이 신분과 계급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지와 행동을 지속할 수 있는 꾸준한 마음과 행동에 있음을 오디세우스가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삶의 목표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이라기보다는 10년간의 시련기를 맞게 된 한 영웅의 변화와 각성의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과거 계략으로 상대의 힘을 빼는데 익숙한 영웅은 자신의 지혜와 용맹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10년간의 유랑생활을 하는 동안 모든 병사를 잃어버리고 혈혈단신으로 오귀귀 섬에 유폐되어 바다를 보며 눈물만을 흘리는 미미한 존재로 전락한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이타케로 향한 오디세우스의 희망찬 여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외눈박이 괴물 폴리페모스를 만나 병사들을 잃었고 가까스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지만, 오디세우스가 불필요하게 자신을 드러내면서 폴리페모스의 저주를 받게 된다. 괴물의 아버지 포세이돈은 아들의 저주에 응답했고 포세이돈은 전심전력으로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방해한다. 오디세우스는 위풍당당했던 함대를 모두 잃고 우여곡절 끝에 마녀 키르케의 섬에 도착한다.

 

키르케의 섬에서 1년 동안 생활하다 다시 여정에 나섰지만, 고비를 넘지 못하고 난파당한다.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버렸고, 만신창이가 된 병사들이 헬리오스의 섬에 정박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키르케는 헬리오스의 섬을 피하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인내심이 바닥난 병사들은 오디세우스의 경고를 듣지 않는다. 그들을 지치게 만든 원인에는 오디세우스의 호기심과 오만도 한몫했으니 사실은 자업자득이었다. 한배를 탔고 가장 믿을만한 친척이었던 에우릴로코스까지 반기를 든 상황에서 영웅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병사들과 함께했던 오디세우스는 당당했고 지혜로웠으며 동시에 오만했다. 그는 자신의 계략이라면 쉽게 위기를 돌파하고 괴물을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혹독하고 절망적이었다. 그는 무엇을 위해 전쟁에 나섰는가,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 그리고 무엇을 앞으로 해야 하는가. 귀향을 향한 여정과 칩거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그 삶의 목표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플라톤의 <국가> 10권에서 저승에 있는 오디세우스의 영혼이 평민의 삶을 선택했다는 신화적 비유는 <오디세이아>의 메시지를 잘 읽어내고 있다.

 

파이아케스 섬에서 나우시카아의 도움으로 알키노오스 왕의 환대를 받게 된 오디세우스는 심금을 울리는 시인 데모도코스의 공연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다. 회한에 젖은 과거는 드러내고 싶은 성공의 사례가 아닌 숨기고 싶은 과거일 뿐이다. 문학의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아닌 인생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화려하지도 영웅답지도 않다. 각종 금은보화와 함께 금의환향을 꿈꿨던 병사들은 하나둘씩 스러져 저승으로 향했고, 그 자신은 거지와 다름없는 꼴로 불청객이 되어 주인의 환대를 바라는 초라한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일상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무찌르는 장면은 영웅의 귀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허세와 오만으로 점철된 자들에 대한 징벌에 가깝다. 권선징악을 이뤄낸 진짜 영웅들은 오디세우스를 기다리고 있던 텔레마코스와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었던 돼지치기, 소치기, 유모였다. 지체가 낮고 차별받던 신분이 실제로는 인간사의 윤리와 도덕을 견지하고 있었고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줄 알았다. 그런 점에서 <오디세이아>는 병사들을 잃고 혼자 된 영웅이 새로운 조력자를 얻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올바름을 추구할 수 있었던 사람에게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평범한 일상의 승리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구혼자들이 사라졌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오디세우스는 고향에 머무를 수 없다. 그는 다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오이디푸스의 진실을 말했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조언에 따라 그는 자신을 저주했던 포세이돈과 자신의 결정 때문에 희생당했던 많은 사람의 영혼을 달래야 하는 새로운 화두를 안게 되었다. 다시 고향을 떠나 정처 없는 길을 가다 ‘자유’의 상징이었던 노(櫓)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은 오디세우스에게 방황이 아닌 정착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결이 아닌 화해를 지향하고 있다. 오디세우스의 새로운 고향은 라에르테스와 페넬로페가 반겨주는 이타케가 아닌, 모든 영혼이 평화와 안식을 거둘 수 있는, 갈등 대신 평화와 환대에서 출발하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하며 여정을 준비한다.

 

<오디세이아>는 영웅의 화려한 무용담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면에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어있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강요받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어떤 모습일지 아직 판단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그 모양이 어떻든지 간에 상황을 안정시키고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내는 힘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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