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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과거시험 유출은 있었다

조선시대 교육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초집(抄集)이다. 초집이란 ‘좋은 글들을 모아놓은 서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의 초집은 ‘주로 과거시험에서 출제 가능성이 높은 글들의 모음집’, 다시 말해서 예상문제집을 의미했다. 여기에는 고금의 유명 인사들의 글이나 과거 응시생들이 지은 글 중에 평판이 좋은 글, 그리고 기출문제에 대한 모범답안 글들이 주가 되었다. 혹자는 오늘날의 예상문제집을 떠올리면서, 초집에 대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초집은 단순한 사안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당시 교육의 수준을 가늠하게 하는 바로미터로서 교육문화의 키워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집은 얼마나 성행하였을까
우선적으로 확인할 것이 있다. 과연 조선시대에는 초집이 얼마만큼 성행했을까 하는 것이다. 다음 기록은 그 정도가 어떠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온 나라 자제들이 …(중략)… 초집만을 과거공부의 좋은 수단으로 여겨 책자로 만드는 경박한 풍습이 굳어져 비록 금지하는 법이 있어도 이제는 막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 세종실록 권77, 19년 6월 기미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국가에서 초집을 규제하기 위한 법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이미 수험생들 사이에 보편화되었으며, 금지법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추세는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은 왜 초집에 의존하였을까
수험생들의 입장이라는 것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서, 조선시대의 수험생들 역시 과거시험에서 어떤 시험문제가 나올 것인가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전략이 필요하였다. 그 결과 초집이라는 예상문제집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것에 의존하는 정도가 대단히 심각하였다는 것이다.


 (성균관 대사성 등이 상소하기를) 성균관 유생들은 책들을 책상에 팽개쳐 두고 …(중략)… 고금의 인사들이 지은 것 중에 과거시험에 나올 만한 글이다 싶으면 다 베껴 차고 다니면서 밤낮으로 외우고 생각하며 열람의 손길을 멈추지 않습니다. - 세종실록 권49, 12년 8월 경인


그렇다면 왜 그렇게 과도하게 초집에 의존하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었다. 우선 유교경전의 학습이 너무 힘들었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중국에서조차도 유교경전이 어려워 과거시험에서 수험생들에게 4서1경만을 부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4서3경 또는 4서5경을 시험하였다. 그렇다 보니 현실적으로 준비가 어려웠던 조선의 수험생들은 출제 가능성이 높은 부분을 위주로 발췌하여 준비하려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당시 과거시험에서는 이전과 동일한 문제가 출제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유교경전은 고정되어 있고 그 제한된 내용 안에서 출제를 하다 보니 어느 시점부터는 새로운 문제를 출제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이전의 과거시험 문제 중에서 다시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유생들이 전략적으로 초집을 활용하려는 행태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초집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유생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에 서적이 대단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서적이 부족했던 원인은 종이가 넉넉치 않아 서적 출판이 어려웠던 데 있었다(서적이 희귀하다 보니 조선시대 말기 이전까지는 아예 서점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책값이 대단히 고가여서 조정의 관리들조차도 4서5경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이처럼 당시 웬만한 유생들은 기본 교재조차 없거나 혹은 부족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초집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초집은 효과가 있었을까
궁금한 것은 당시 초집이 과거시험에서 통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기록을 보면 그 여부를 알 수가 있다.


 (간원이 아뢰기를) 가끔씩 글 잘 짓는 사람이 한 경서의 논술문제들을 다 지어놓고 자손에게 전해 대대로 생원 정도에는 합격하는 자도 있습니다.  - 명종실록 권14, 8년 6월 갑신


 (영경연사 윤원형이 아뢰기를) 유생들이 초집을 가지고 시험장에 들어가면 혹 옛날 작품을 모방하여 요행으로 과거에 합격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서책을 갖고 들어가는 것을 막는 법이 이전 시대부터 있었습니다.  - 명종실록 권21, 11년 10월 임진

 

이밖에도 초집을 가지고 과거에 합격했다는 사례들의 기록을 보면, 초집이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수험생들뿐만 아니라 학부모들도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자제들의 초집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문종 때 벌어졌던 ‘어제대책(御製對策)’ 사건이다.


과거시험 중에는 응시자의 정치적 식견을 시험하는 책(策)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시험문제를 책문(策問)이라 하고 그 답안을 대책(對策)이라 하였다. 그리고 어제대책이란 왕의 지시에 따라 지은 대책으로서 국가에서 작성한 일종의 모범답안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제대책이 중요했던 이유는 과거시험에서 수험생들이 대책을 작성하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공식적으로 수험생들에게 배부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학부모들은 애가 타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는 조정의 관리들이 어제대책을 인쇄소에서 몰래 찍으려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관련자들을 문책하려 하였으나 연루된 관리들이 너무 많아 결국에는 불문에 부치고 말았다. 이는 자제들의 과거 합격을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당시 학부모들의 행태를 보여주는 사건으로써, 얼마 전 강남의 모 여고에서 교사가 쌍둥이 딸들의 내신을 조작했다는 사건과 여러 면에서 닮은 점이 있다고 하겠다.

 

초집은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조선시대에 과도하게 초집에 의존하는 경향은 당시 교육풍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유생들의 학업 태만이었다. 서적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가난한 유생들은 초집에만 기댈 수밖에 없다 보니 분량이 많지 않은 초집을 평소에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었고, 시험 때가 다가오면 그때 가서 초집을 끼고 다니면서 부지런히 암기하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항상 학업에 정진하는 조선시대 선비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다시피 되어 있는데, 물론 그런 선비들이 아예 없었다고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이미지는 교육문화라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오히려 허상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아래의 기록이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김근사 등이 아뢰기를) 유생들이 학업에 태만한데, 이는 과거시험을 중요치 않게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배우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된 것입니다. 평상시에 게으르고 안일하여 놀기만 좋아하다가 시험이 다가오게 되면 진부한 것을 몰래 주워 모아 요행히 지름길을 알아내려고만 하니, 그 폐단이 이미 고질병이 되어 백 가지 방도를 세워 권장해도 이제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 중종실록 권85, 32년 9월 을유'


그런데 당시 초집에 과도하게 의존했던 경향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았다. 그것은 바로 학교가 쇠퇴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유생들이 초집만으로도 과거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굳이 학교에 가서 힘들게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학교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선시대 초집은 단순히 예상문제집이라는 의미를 넘어 당시 교육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는 존재이다. 초집에는 당시 수험생들의 막막함과 요행심, 무작정 과거시험 제도를 운영하려 했던 국가의 안일함, 그리고 이로 인한 당시 교육의 비루함이 배어있다. 이처럼 초집은 조선시대 교육문화의 키워드이며, 초집을 알아야 비로소 조선시대 교육의 실체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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