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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그 벗어날 수 없는 신화? 또는 실화!

김정금의 옛날 옛날이야기

프로이트가 처음 아이들의 성(性)을 들고 나왔을 때 사람들의 당혹감은 상상외로 더 컸을 것이다. 무성의 존재, 아니 아예 성 자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슨 금단의 구역을 밟은 것 마냥 쉬쉬 두려워하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니 그 놀라움은 더 컸을 것이다.

20세기를 코앞에 둔 시점에 프로이트는 후에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라는 묶음으로 불리는 논문들을 들고 나와 ‘유아의 성’까지 말한다. 그가 유아의 성에서 핵심으로 다룬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이 개념은 반대되는 성의 부모를 아이들이 따르고 좋아한다는 단선적 의미 외에 동성 부모에 대한 사실상의 적대감과 이성 부모에 대한 심리성적 변화의 측면까지 포함하고 있다.

잠깐 신화를 살펴보자. 오이디푸스 신화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가 신탁을 받으며 시작된다.

“당신의 아들이 당신을 죽일 것이다.”

두려운 라이오스는 양치기를 시켜 아들을 죽이라 명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아기는 코린토스의 왕에게 맡겨져 자란다. 후에 청년이 된 오이디푸스는 역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접하자 바로 집을 떠난다. 길러준 부모를 친부모로 알았기 때문이다. 길을 가던 그는 라이오스의 일행을 만나 시비 끝에 자신의 진짜 아버지인 줄 모른 채 라이오스를 죽이게 된다. 그리고 테베로 가서 자신의 친모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자신이 아비를 죽인 자라는 걸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기약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난다.

이 이야기는 프로이트에 의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살아나 지금까지도 남근기 전후 유아의 심리성적 변화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되고 있다. 의미 있는 것은 프로이트가 구체적으로 언어화하기도 전에 이미 구전되는 옛 이야기, 민담을 채집하고 재구성한 동화의 상당수 속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내용이 담겼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빨간 망토다. 빨간 망토에서 눈여겨볼 인물은 사냥꾼이다. 빨간 망토가 위험에 처했을 때 빨간 망토를 구해내고 안전한 길로 가도록 도움의 말을 아끼지 않는 존재로 바로 딸과 아버지의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여러 옛이야기에서 사냥꾼을 자주 만나는데 대체로 소녀가 주인공인 이야기에 많이 등장하며 위기에 처한 소녀를 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들이 나타나는 공간은 대체로 숲인데, 숲은 미지의 공간, 기약할 수 없는 미래, 혼란스러운 현실 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빨간 망토 이야기를 보면 어머니가 딸을 내보낸다. 이것은 오이디푸스 과정을 끝내고 집을 떠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 과정의 극복을 위해 내보내는 경우도 있다. 이때 어머니는 빨간 망토에게 작은 바구니 하나를 들려 보내는데 이 바구니는 소녀의 처녀성 또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얘기되며 바구니에 담긴 포도주는 여성의 생리혈로 풀이되기도 한다.

어쨌든 소녀는 이제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감정을 접고 바깥으로 나가 새로운 존재, 진짜 사랑하는 대상을 찾아간다. 그 새롭게 만난 대상이 바로 늑대다. 이 늑대와의 관계를 두고 페로와 그림 형제의 판본이 다른 부분이 있는데, 페로 판본에서는 늑대와 소녀가 옷을 벗고 한 침대에 눕는 장면이 나온다. 이어 소녀는 늑대에게 잡아먹혀 그대로 죽고 만다. 이는 조심하지 못해 결국은 불행에 빠지는 처벌의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림 형제는 다르게 그렸다. 늑대에게 “왜 이렇게 입이 크냐”고 묻는 빨간 모자에게 “너를 잡아먹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늑대는 진짜로 소녀를 잡아먹는다. 그러나 후에 사냥꾼의 도움으로 어두운 뱃속에서 살아나온 소녀는 다시 사는 삶 즉, 부활을 맞게 된다. 이는 성장의 매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죽어야만 다음 성장의 과정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전히 사냥꾼으로 상징되는 아버지의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이 아직 ‘덜’ 끝났음을 말한다. 오히려 뒤에 다시 방문해 자기의 힘으로 다른 늑대를 굴뚝으로 유인해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서야 드디어 성장의 큰 걸음을 내딛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룬 이야기 중 대표적인 작품이 ‘잭과 콩나무’다. 이 작품은 노골적으로 남성성을 의미하는 ‘콩나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아이가 어떻게 소년으로 자라고 더 높은 성장의 단계를 밟게 되는지 매우 명료한 상징으로 강조하고 있다.

먼저 잭은 아침부터 소를 팔아오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시달린다. 이때 소의 이름이 ‘우유가 나오는 하얀 것(Milky White)’이다. 맞다. 구순기의 행복을 보장했던 ‘젖이 나오는 하얀 것’, 엄마의 가슴이다. 아이에게 행복 그 자체고 삶의 전부였던 엄마의 가슴을 벗어나는 것이 바로 소를 팔아오는 것이다. 이유는? 이제 젖이 나오지 않는단다. 다시 말해, 그 젖을 떠나라는 얘기다. 여기서 엄마는 매우 엄하게 잭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소를 팔아 오라고 하고 잭은 마지못해 길을 나선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련해 이 부분이 중요한데, 아이들이 젖을 떼는 과정은 언제나 지속될 것 같았던 낙원을 잃는 것과 동시에 자신만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자기 너머 뒤쪽에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 때문에 어머니를 잃는 소외와 상실감 외에 어머니의 시선이 향하는 아버지에 대한 경쟁의식과 적대감이 동시에 떠오르는 과정이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과 동시에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는 묘한 동일시를 동시에 보이기도 한다.

특히 여기서 길을 떠난다는 것은 성장을 위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잭은 이 길가에서 만나게 되는 남자에게 씨앗 하나를 얻고 소를 건네준다. 이 남자는 보통 잭에게 경쟁자이면서 동일시의 대상인 아버지로 얘기되기도 하는데 뒤의 식인귀와도 연결된다.

집으로 돌아온 잭에게 엄마는 ‘쓸모없는 놈’이라는 심한 꾸중을 하고 심지어 저녁밥마저 주지 않는다. 모든 구순의 먹고 빠는 즐거움은 이때 사라진다. 그리고 밤이 온다. 이제 막 엄마를 벗어나 혼자 잠드는 아이들에게 밤은 자기만의 판타지로 들어가는 시간인데 대체로 아이들은 밤에 꾸는 꿈으로 자기의 불안과 성장의 다음 단계를 소망하게 된다.

아침이 되자 씨앗은 거대한 콩나무로 변해 있다. 여전히 꿈속인 듯 방안은 어두워 판타지와 현실의 이중 감각이 이어지는 상태에서 잭은 콩나무에 오르게 된다. ‘거대한 콩나무’ 역시 매우 의미 있는 성징(性徵)으로 보이는데, 보통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성기를 보며 느끼는 감정 상태를 말한다. 하늘 끝에 닿은 콩나무를 오른다는 것은, 몸은 이제 자라고 있으나 여전히 아이인 주인공이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성장의 과정을 밟아 나가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잭은 하늘 끝으로 닿은 콩나무를 타고 올라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귀와 그의 아내를 만나게 된다. 이 부분에서 진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좌절하고 다시 도전하는 잭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룬 다른 이야기들과 함께 다음 편에서 더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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