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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첫 학제의 탄생과 <새교육>

요즘 다시 학제와 3월 신학기제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지금의 학제는 언제, 어떤 논의를 거쳐 확립되었을까. 학제의 수립을 위한 논쟁이 정치적 논쟁으로 퇴색되고 있던 당시 오로지 교육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학제를 일목요연하게 주창했던 것이 바로 <새교육>이었다. 신학제에 대한 국회에서의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훨씬 이전인 1948년 9월호 <새교육>에 ‘신학제에 관한 한 가지 소감’이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당시의 학제 논란에서 지금의 학제 변화를 풀어갈 해답을 찾아보면 어떨까.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1948년 여름 더위는 살인적이었다. 여름 더위만큼 뜨거운 것은 교육계였다. 새 정부는 출범하였으나 교육법은 없었고, 교육개혁을 향한 이상은 높았으나 실천은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새 나라의 실정에 맞으며 미래 지향적인 학제의 마련이었다. 민족 차별에 바탕을 둔 식민지 시대의 복선형 학제도 아니고, 경제적 여유를 향유하고 있는 미국식 단선형 학제도 아닌 대한민국 실정에 맞는 학제의 창안이 중요한 과제였다. 이를 둘러싼 논쟁과 갈등은 1948년 여름의 폭염 이상으로 뜨겁고 길었다.

최초 학제는 6-4-4, 6-3-3-4 이원체제
정부 수립 이후 1년 4개월의 뜨거운 논의를 거쳐 1949년 12월 31일에 채택된 교육법에 명기된 최초의 학제는 중등교육 4년을 마친 후 4년제 전문대학에 진학하는 6-4-4제를 기본으로 하되, 대학진학을 희망하는 경우에는 중학교를 3년으로 마치고 대학 준비를 위한 고등학교 교육 3년을 추가로 이수하는 6-3-3-4제도 함께 존재하는 이원적 체제였다.

식민지 시대의 복선형 학제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던 현실주의 교육자들과 미국식 기회균등 모델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서구형 교육자들 사이의 갈등과 타협이 만들어낸 절충식 학제이며, 차별적 학제였다. 새로 출범한 나라의 학제라고 보기에는 새로움이 없고, 새로 출범한 나라의 미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학제라고 보기에는 방향성이 느껴지지 않는 제도였다. 교육이 정치적 논쟁의 희생물이 되었던 대한민국 교육계 최초의 사건이 바로 이 기형적 학제의 탄생이었다.

신학제의 수립을 위한 논쟁이 정치적 논쟁으로 퇴색되고 있던 당시 오로지 교육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학제를 일목요연하게 주창했던 것은 바로 새로 창간된 잡지 <새교육>이었다. 신학제에 대한 국회에서의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훨씬 이전인 1948년 9월호 <새교육>에는 ‘신학제에 관한 한 가지 소감’이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당시 한성여자중학교 교장이었던 김의형은 이 글에서 미군정에 의해 도입되어 시행 중이던 당시 학제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은 6년제 중학교의 문제점에 집중되었다. 미군정은 식민지 시기의 4년제 중학교를 미국식 6년제로 개편하여 시행하고 있었다. 김의형은 우선 심신 양면에 있어서 가장 변동이 많은 시기인 만 12세에서 17세까지를 한 학교에서 같은 교사들이 지도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불합리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16, 17세 아이들이 보이는 ‘자기성장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별도의 단계를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두 번째 비판은 당시의 교육시설이나 교사의 여건이 6년제 중학교를 우수하게 유지할 형편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중학교 5학년이나 6학년 수준에 걸 맞는 우수한 교육을 모든 중학교에서 실시하는 것은 당시의 경제 수준에서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비현실적인 양적 팽창보다는 질적 향상에 초점을 맞춘 4년제 중학교 중심의 학제가 현실적이며 바람직하다는 제안을 하였다. 비록 그것이 일본 식민지 시대의 학제와 유사하더라도 감내해야 할 것을 요구하였다.

문교부 주도 하에 각계 대표자 80여명으로 구성된 문교심의회에서의 5개월간 심의를 통해 마련된 새로운 학제가 ‘문교부초안’ 형태로 국회에 제출된 것은 1949년 3월 30일이었다. 그런데 이에 앞서 <새교육> 제2권 제2호(1949년 3월 발간)에는 당시 문교부 기획과장이었던 홍정식의 ‘신학제안의 특색’이란 글이 실렸다. 신학제에 관한 국회에서의 공식적 논의에 앞서 <새교육>을 통해 교육자들의 의견을 듣고자 하는 취지로 발표된 글이었다. <새교육>이 명실상부하게 시대의 교육을 비추는 거울이란 점을 인정한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교육>, 학제의 5원칙 을 선언하다
이 글에서 신학제로 제안된 6-3-3-4 학제의 5원칙이 선언되었다. 그것은 첫째, 국민 각인의 능력을 자유롭게 최고도로 발휘하게 할 수 있는 제도일 것, 둘째, 교육기회 균등적인 제도일 것, 셋째, 교육의 보급 향상을 신속히 달성할 수 있는 발전적인 내용을 내포한 제도일 것, 넷째, 우리 국정에 적절한 제도일 것, 다섯째, 국제교육 수준에 대책할 수 있는 제도일 것이었다. 이 원칙은 21세기 지금의 학제개편 논의에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들임에 틀림없다. 홍정식은 신교육제도의 장점으로는 이것이 학생의 능력과 심리발달에 적응하고, 우리의 실정에 적합하며, 세계적 공통성을 가진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였다.

중등 교육을 전기 3년 후기 3년으로 구분한 것은 오래지 않아 실시하게 될 9년 의무교육에 대비한 장치였다는 점도 매우 인상적이다. 즉, 중등교육을 4년 혹은 6년으로 하는 경우 중학교까지의 의무교육(10년 혹은 12년)이 실질적으로 매우 어려워질 것에 대한 우려가 내재된, 우리 실정에 적합한 제도개혁안이었다는 것이다. 공장노동 가능연령이 3년제 중학교 졸업연령과 일치한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한다. 그리고 후기 중등교육인 고등학교 과정에서 인문계와 실업계를 구분한 것은 인문중심의 교육풍조를 시정하며 과학기술 시대에 필요한 기술자 양성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취지는 1960년대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인력이 크게 기여한 것을 고려한다면 매우 적절한 학제개편안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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