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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다고 욕하지 마라

착한 사람들 때문에 공동체가 살아난다. 그래서 착한 것은 천성이나 기질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역량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명절 엄마들의 음식 노동 봉사는 정말 착하지 않으면 해 내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을 참고 해내는 그 ‘착함’의 역량 때문에 아이들은 자라면서 사촌 형제들과 우의를 쌓고, 그 우애를 생애의 자본으로 삼는다. 그 ‘착함’ 때문에 고향의 자연과 할머니 댁의 향수를 온전한 감수성으로 체득하며 정서적 발달의 한 축을 성장시킨다. 그러나 착해 보이려고 강박관념에 빠질 필요는 없다. 착해 보이려고 모든 일에 예스라고 말하고 그 스트레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착함’을 모욕하는 것이다.

01
서울상공회의소와 독서문화운동단체가 공동으로 주관했던 ‘CEO 독서문화 아카데미’ 프로그램에 특강을 하러 가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프시케(Psyche)’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프시케는 용모의 아름다움은 물론 마음의 아름다움과 영혼의 고결함을 지닌 인간 여자이다. 흔히 육체적 관능의 미를 표상하는 아프로디테와는 대척의 자리에 놓이는 인물이다. 프시케는 그 심령의 아름다움과 그것이 빚어내는 덕성의 고결함으로 인하여, 마침내 ‘여인 프시케’에서 ‘여신 프시케’로, 즉 사람에서 신으로, 신분의 승천을 이루는 인물이기도 하다.

독서 아카데미에 참가한 CEO들에게 프시케의 구체적 인격을 현실 속에서 생각해 보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질문했다. “지금 제가 소개한 신화 속의 인물 아름다운 ‘프시케’를 우리 주변의 배우로 연상한다면 어떤 여배우를 떠올릴 수 있겠습니까?” 학생 CEO들은 각자의 상상력에 따라 여러 여배우들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높은 공감을 받은 배우는 이영애 씨였다. 다른 여배우를 떠올렸던 사람도 이영애 씨가 지목된 것을 알고 난 뒤에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그래 이영애가 꼭 맞다.’고 하며 공감을 표했다. 그랬더니 한 대학병원의 원장 CEO를 맡고 있는 한 분이 일어서더니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이영애 씨가 프시케 이미지로 연결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드라마 대장금에 출연하여 장금이 역을 수행하고 있는, 그 이영애 씨이어야 합니다.”

이 말이야말로 강사인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나는 그 분의 통찰력과 지혜를 높게 평가해 드렸다. 잘 알다시피 ‘대장금’이라는 드라마는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국민드라마’라고 할 정도로 널리 깊은 인상을 심어 준, 드라마 역사에 한 봉우리를 이루는 작품이다. 대장금 드라마는 지구촌 각지로 보급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문화적 차이가 상당히 있는 이란과 같은 나라에서도 ‘대장금’ 드라마를 방영할 때면, 테헤란 시내의 교통량이 줄어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몰입의 중심에는 주인공 ‘장금이’라는 인물이 주는 덕성과 매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이 캐릭터를 훌륭한 연기로 소화해 낸 배우 이영애 씨의 역량과 매력이 함께 부각된다.

저명 CEO들이 프시케를 대장금으로 연상하도록 만드는 대장금의 매력적 모습은 무엇일까. 두 인물 사이의 유사성을 성격(인성) 차원에서 그냥 간단하게 답해 달라고 주문하자, CEO들은 ‘착하다’는 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내세웠다. 그냥 착하다는 것만으로 매력이 되기는 어렵다. 착하지만 매력 없는 인물도 많다. 그 착함이 어떤 착함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프시케가 발현하는 정신의 아름다움, 즉 덕성의 고결함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 신화를 꼼꼼히 읽어보면 그것은 그녀가 착하다는 것과 불가분의 연관을 가진다. 그러면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간단치 않은 문제이지만, 이 프시케 이야기로만 보면 착하다는 것은 참는다는 것에 닿아 있는 것 같다. 어떤 모순과 운명적 억압도 굳세게 참아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냥 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그 모순과 억압을 넘어선다는 데에 이른다는 것이 ‘착함’의 진짜 매력이다.

이런 착함으로 말한다면 대장금은 프시케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자신을 음해하고 곤경에 빠트리고 압박하는 모든 어려움들을 굳세게도 견뎌낸다. 그냥 견뎌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과 포부를 지향하기 위해서 참는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상대를 야비하고 치졸한 방법으로 복수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내 꿈을 묵묵히 이루어나감으로써 그런 억압과 불행을 이겨내려 한다. 프시케는 자신의 속된 욕망 때문에 위험과 불행의 경지를 자초하는 면이 있지만, 대장금은 그런 면이 전혀 없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과 대결하여 이루어낸다. 착한 것은 그런 힘을 내면에 머금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02
착한 인물의 문제점을 처음으로 공론화하여 비판한 사람은 이어령 교수이다. 그는 1962년에 발표한 "흙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 착한 흥부를 비판한다. 우리가 통념으로 지니고 있던 ‘흥부의 착함’에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린다. 당시 사람들에게 가치 충격을 준다. 근대화 산업화의 풍토에서 요청되는 인간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시선을 27세의 비평가는 예지로서 보여준다. 놀부 찬양을 통해서 근대적 합리성이라는 시대 가치를 보인 셈이다.

흥부의 착함이 지닌 부정적 면모를 이어령은 다음 몇 가지로 지적한다. 흥부는 자신이 처한 위기 상황을 스스로 주체가 되어 해결하려는 의욕도 능력도 없다. 절대 궁핍의 상황에서 자식은 열 두 명이나 생산하여 교육은커녕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는 무능과 무책임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또 흥부의 사고가 근대적 이성에 입각하지 못한 비논리적 사고로 일관하고 있음도 지적한다. 이에 비하여 놀부는 당당한 주체로서 합리적 사고의 소유자이다. 흥부 비판의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놀부 예찬론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의 통념을 통째로 전복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흥부는 ‘각성된 자아’가 없다. 그러니 줏대가 있을 리 없다. 줏대가 없으니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이용당하기 딱 좋다. 이것이 흥부의 착함이 지닌 본질이라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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