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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마지막 한족 왕조 명나라

오랫동안 오랑캐의 지배를 받던 중국은 빈농 걸인 출신의 주원장이 원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움으로써 한족이 지배하게 되었다. 걸인 신분으로 전국을 방랑한 주원장은 대세를 읽는 눈을 키웠고, 무력을 갖춘 백련교와 만나면서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명나라는 이전에 중국에 등장한 역대 왕조와는 다른 독특한 탄생 배경을 바탕으로 세워졌지만, 환관의 득세와 잘못된 경제 제도 등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오랜 방랑 생활 끝에 황제로 등극
몽골은 거란과 함께 동호계(東胡系)로 분류되어 중원의 한족과 반도의 사대주의자에게는 상종치 못할 오랑캐 나라였다. 그러나 원의 지배를 받는 동안 한족들은 민족차별에 불만을 느끼고 지하에서 골수중화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성리학을 완성시키는 한편, 정사 〈삼국지〉를 변조하여 유비의 촉한을 정통중화로 조작하는 공정을 진행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원나라의 통치가 느슨해지자 각지에서 들고일어났고 당시 중국 남방지역에서 백련교(白蓮敎)의 홍건군이 발흥하여 반원항쟁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다. 당시 원나라는 몽골황실의 권력다툼이 치열하였다. 몽골제국의 제4대 황제인 몽케칸의 아우 쿠빌라이가 1279년 원나라를 건국하였으나 그가 황제로 즉위하자 막내 동생인 아리쿠부카와 오고타이 가문의 카이즈가 반란을 일으켰다.

쿠빌라이의 '유목과 농경의 조화를 통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에 정면 도전한 것인데, 결국 이러한 싸움은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어 제국의 단명을 재촉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일찍부터 제위 세습제가 정착된 한족과는 달리, 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제위를 꿈꾸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을 푸대접한 것은 원나라의 최대 실수였다. 또한 경제정책 실패는 철저한 푸대접을 받는 한족들로 하여금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만들어 후한의 혼란기에 황건의 난이 일어났던 것처럼 백련교라는 불교계통의 비밀결사 단체가 '홍건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홍건군에는 주원장이라는 빈농 걸인 출신의 무장이 있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로 잔뼈가 굵었다. 당시 중국 전역을 휩쓴 무서운 역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 중국 전역을 방랑하면서 걸인생활을 하였으나 이러한 생활이 나중에 주원장을 황제로 만들어준 원동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방랑생활 그 자체가 그의 훌륭한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련교가 단순한 종교단체가 아니라 사회변혁을 위한 물리적 힘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여 난징[南京]을 중심으로 강남 동부일대를 장악하고 1368년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북경)를 함락시켜 몽골인을 몽골초원으로 쫓아버렸다. 결국 주원장은 제위에 올라 명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로 시작되는 한족의 마지막 통일왕조를 이루어내었는데 명나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역대 왕조와는 다른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왕조 초기 황제권 강화로 기초 다져
명나라는 강남에서 발흥하여 중국을 통일한 유일무이의 국가였다. 역대 중국의 통일왕조는 중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오다가 강남을 흡수시켜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였으나, 홍무제는 강남에서 시작해서 중원을 정복했다는 점에서 정반대였다. 또한 홍무제는 '왕후장상(王侯將相)에 어찌 씨가 따로 있나'는 말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었던 인물이었다. 시황제는 전국시대 진나라의 왕, 한 고조(高祖)는 변방 하급 관리 출신, 수나라의 양견과 당나라의 이연, 송나라의 조광윤(절도사 출신)은 모두 중원 북방의 무장 출신이었으나 홍무제는 걸인 출신이었다. 요나라 → 금나라 → 원나라로 이어지는 오랜 이민족의 통치에서 벗어난 중국은 대명(大明)이라는 국호 하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홍무제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독재체제 구축이 과제라 생각하였다. 우선 승상제를 폐지하여 6부가 자신의 통제 하에 들어올 수 있게 하는 한편, 배타적 중화민족주의를 전면에 내걸고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내건 조선 길들이기에 착수하였다. 또한 국가제도의 고비용 저효율을 과감하게 수술하여 모든 것을 황제권 강화로 귀결시켰는데, 군사기관인 추밀원을 5군 도독부, 감찰기관인 어사대를 도찰원으로 고쳐서 모두 황제 직속기관으로 만들어 행정·사법·군사를 장악하였다. 군사면으로는 처음부터 과감하게 순수 징병제를 포기하고 징병제와 모병제를 절충시킨 병역제도를 채택하였고, 이를 '위소제도(衛所制度)'라 한다. 이 제도는 병농일치의 의무병제의 장점과 전투력 위주의 직업군인 장점을 수용한 것이다.

아무튼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는 걸인 출신 무장답지 않게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통치력과 행정능력을 보여 주었다. 더욱이 역대 왕조의 전통을 모방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모든 제도를 정착시킨 덕분에 이후 명나라가 무능한 황제들과 환관들의 전횡에도 불구하고 그런 대로 버텨낼 수 있었으며 조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후계자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려 26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멀리 내쫓아 변방을 지키는 번왕으로 봉하였다. 태조 홍무제가 죽고 손자인 건문제(建文帝)가 1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이에 변방을 지키면서 야망을 키워온 그의 삼촌인 연왕이 군대를 몰아 수도인 난징으로 쳐들어왔다. 물론 명나라의 안위와 황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결국 조카인 건문제는 도망가고 삼촌인 연왕이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이다.

영락제는 즉위하자마자 수도를 연경으로 천도하는 일에 착수하여 1420년 자금성이 완공되자 이름도 베이징[北京]으로 바꾸고 적극적인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의리의 화신 관우를 관제(關帝)로 신격화하여 한족지상주의를 주변국에 강요하였다. 또한 그는 1410년부터 1415년에 걸쳐서 직접 대군을 이끌고 다섯 차례의 출정으로 북방을 평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방 원정에도 주력하여 베트남을 복속시키고 이슬람교도인 환관 정화(鄭和)로 하여금 남해를 원정케 했다. 정화의 원정함대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멀리 인도양과 아프리카 동부 해안까지 진출하였는데, 이유는 당시 중앙아시아의 티무르 제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원정의 결과로 남방의 여러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국제관계의 다변화가 이루어졌고, 동남아시아에 관한 정보가 강남 지방의 중국인에게 전해져 화교(華僑)의 기원이 되었다.

환관 중용 이후 쇠퇴의 길로 들어서
환관은 역대 군주들의 경계 대상이 되어 왔다. 환관이라는 존재는 최고 권력자의 최측근으로서 직접 황제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매니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권력을 향한 행보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락제는 이러한 그들의 속성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일찍이 홍무제는 환관의 정치참여를 엄금하였지만, 영락제는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덕을 톡톡히 보았던 까닭으로 환관을 우대하고 신뢰했던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남해 원정군의 총수로 환관인 정화를 임명한 것도 환관에 대한 영락제의 신뢰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며 정보정치를 강화하여 '동창(東廠)'이라는 특수 정보경찰기관을 만들어 총수에 환관을 임명하였다.

환관들은 신체적 콤플렉스를 물욕과 명예욕(권력욕)으로 보완하려는 심리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황제의 총애를 빙자하여 고관대작들을 얼마든지 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 밖에 나는 사람은 얼마든지 황제에게 참소(讒訴)하여 죽이거나 귀양을 보낼 수 있었다. 제6대 정통제(正統帝) 영종이 아홉 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당장 문제가 터져 나왔다. 제5대 선덕제(宣德帝) 시절부터 태자의 시중을 들고 있었던 환관 왕진(王振)이 정권을 장악하고 국사를 농락하여 국가 지배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때 북방에서 몽골계 오이라트 부족장 에센이 1449년 '토목(土木)의 난'을 일으키자, 왕진은 황제가 직접 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무모한 정벌을 감행케 함으로써 결국 자신은 전사하고 황제는 포로가 되었다.

1450년 포로로 잡힌 황제가 풀려나 돌아와 보니 이미 동생이 제위에 올라 있었다. 그가 바로 경태제(景泰帝)다. 영종은 동생이 쿠데타로 자신을 몰아내고 제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유폐된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1457년 석형(石亨) 등에 의해서 복위되어 제8대 천순제(天順帝)가 되었지만 이미 실추된 황제의 권위는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아무튼 명나라는 역대 어느 왕조보다 환관이 날뛰던 시대였다. 태조 홍무제가 그토록 환관을 경계하여 각종 조치를 취해 놓았지만 그의 후손들은 할아버지의 유훈을 무시하고 그들을 중용함으로써 일찍부터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 시대를 다룬 중국영화를 보면 악명 높은 실권자는 거의 모두가 환관들이다.

실패한 경제 제도로 약해지는 국력
산업이 발전하면 자연적으로 상업이 발달되고 따라서 화폐의 유통이 증가되기 마련이다. 당시 유통되고 있었던 화폐로는 '대명통보'라는 동전과 '대명보초'라는 지폐였다. 그런데 민간에서 비공식적으로 사용하던 은(銀)의 유통을 법으로 막아버리고 지폐만 찍어댔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화폐 사용량이 증가하자 더욱 지폐 발행량은 늘어났다. 그러나 지폐가 화폐로서의 기능을 하려면 유통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이에 조정은 별 수 없이 은의 유통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러한 통화정책의 실패는 경제전반에 나쁜 영향을 가져다주어 조세정책의 실패로 이어지게 되었다.

은의 사용량이 급증하자 너도 나도 은을 요구하게 되었고 관리들조차 녹봉을 곡식이 아니라 은으로 줄 것을 요구하였다. 국가에서는 공무원들의 녹봉을 은으로 주기 위해서 많은 양의 은이 필요하게 되었고 세금을 은으로 낼 것을 명하였는데, 이것이 악명 높은 은납제(銀納制)였다(단, 토지세는 현물로 받았음). 도시에서는 그래도 은이 많이 유통되기 때문에 은을 구하기 쉽지만, 농민들은 은을 구하기 위한 이중고를 겪어야만 했다. 종전에는 곡식만 바치면 되었으나, 이제는 곡식을 은으로 바꾸어야 했으므로 결과적으로 세금이 더 무거워진 결과를 낳았다(나중에 밀무역으로 멕시코의 은이 유입되어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나, 심각한 후유증을 남김).

한족 왕조 명나라는 개국 초부터 중화적 세계관을 주변국에게 강요하였고 정화의 남해 원정도 일종의 무력시위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활발한 대외무역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당시 한반도와 중국 해상에는 왜구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는데, 그 왜구들의 성격이 참 애매모호했다. 해안에 도착해서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그냥 무역을 하고, 상대방이 허술하거나 먹을 것이 많다고 생각되면 칼을 들고 일어나 노략질과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명 태조 홍무제는 해안 주민들에게 일체의 사무역(私貿易)과 해외출항을 금하는 칙령을 내렸다(1437년). 중화사상에 사로잡힌 명나라와 교역을 하려면 국가 간의 공식무역, 즉 조공무역 밖에 없었다.

조공무역이란 천자의 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천자는 그냥 받기만 하면 천자의 위엄에 누가 되니까 신하에게 인심이나 쓰듯 하사품을 보내는 식이었다(당시 조선은 '말로 주고 되로 받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명나라의 국력이 강할 때에는 그나마 조공무역이 유지되었으나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 중기 이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따라서 조공무역이 유명무실해지자 밀무역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으며 이러한 밀무역은 명나라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악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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