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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지구촌 풍경] 빙하가 흐르는 몽골

 

나에게는 여행에 관한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자금 사정이 허락하는 한, 방학마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되, 이미 발 디뎠던 나라는 두 번 다시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는 법. 내 확고했던 여행 원칙을 무너뜨린 유일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드넓은 초원과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지는 땅, 몽골이다.
 

드넓은 초원에 거대한 바위 하나, 타이하르 촐로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하늘길이 열리자 바로 몽골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몽골의 풍경은 대부분 지평선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초원을 얼마나 달렸을까. 지루함이 느껴질 때쯤, 거짓말처럼 거대한 바위 하나가 시야에 불쑥 들어왔다. 주변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우두커니 홀로 솟아있는 존재감, 바로 타이하르 촐로(Taikhar Chuluu)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몇몇 몽골 사람들이 바위를 향해 힘껏 돌을 던지고 있었다. 저 거대한 바위 너머로 돌을 넘기거나 꼭대기에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거나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전해진다고 했다. 작은 돌멩이에 간절한 염원을 담아 던지는 그들의 모습은 자못 진지했다. 하지만 상당한 높이 탓에 성공하는 이는 많지 않아 보였다.


우리는 그 신기한 풍경 옆에 차를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촐로 주변으로는 새하얀 염소 무리가 그림처럼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시간은 더없이 평화롭게 흘렀다. 그리고 그 평화로움 속에서, 우리는 잊지 못할 식사를 했다. 드넓은 평원을 병풍 삼아 라면을 끓여 나눠 먹었다.


타이하르 촐로의 강렬한 인상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몽골은 전형적인 내륙분지 지형에 건조기후가 나타나는 곳이다. 그래서 여행 중 마주치는 풍경은 대부분 광활한 초원이나 사막지대이고, 간혹 호수를 만날 수 있는 정도다. 그런데 그런 몽골 땅에서 예상을 뒤엎는 풍경과 마주쳤으니, 바로 촐로트 협곡(Chuluut Canyon)이었다.


마치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을 축소해 놓은 듯, 깊고 거대한 협곡이 눈앞에 아찔하게 펼쳐졌다. 건조한 기후 속에서 어떻게 이토록 깊은 협곡이 만들어지고 저 아래로 제법 유량도 풍부해 보이는 강이 힘차게 흐를 수 있는지, 지리교사인 나로서도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몽골의 자연이 품은 또 다른 얼굴, 그 장엄하고도 예외적인 모습 앞에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 거대한 호수, 햐르가스 호수
촐로트 협곡의 장엄함을 뒤로하고 서쪽을 향해 얼마나 더 달렸을까. 어느 순간, 익숙했던 초록의 초원이 점차 자취를 감추더니 이내 창밖으로 자갈과 모래만 끝없이 펼쳐지는 진짜 사막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건조기후는 연 강수량에 따라 사막(BW)과 스텝(BS)으로 나뉘는데, ‘아, 이제 스텝에서 사막기후대로 들어섰구나’하는 지리교사로서의 직감이 강하게 왔다.


문득 궁금증이 일어 쾨펜의 기후 구분 지도와 현재 위치를 대조해 보고 싶어 인터넷 연결을 시도했지만, 아쉽게도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 명확한 데이터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황량한 자갈과 모래사막의 풍경만으로도 이곳이 틀림없는 사막기후(BW) 지역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책에서만 보던 기후경계선을 실제로 몸으로 가로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황량하지만 강렬했던 사막의 첫인상. 그 메마른 풍경의 끝에서 드디어 햐르가스 호수(Khyargas Nuur)를 마주하게 되었다.


호숫가에는 우리 일행을 제외하면 대부분 현지인으로 보이는 몽골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아직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들만의 휴양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그들 틈에 끼어 조심스럽게 발을 담갔다. 그리고 이내 몸 전체를 물에 맡겼다. 이곳의 물은 짠맛이 나는 게, 마치 바닷물과 같았다.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물 위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둥둥 떠다녔다.


분명 끝없는 사막을 기대하고 온 몽골이었는데, 나는 지금 바다처럼 짠 호수 위에서 유영하고 있었다. 발밑의 뜨거운 모래와 자갈 대신, 온몸을 감싸는 시원하고 짭조름한 물의 감촉. 사막 한가운데서 예기치 않게 마주한 ‘바다’에서의 수영. 그 기분 좋은 부조화 속에서 느꼈던 해방감과 감격은 햐르가스 호수를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기억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 위에 둥둥 떠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지리교사로서의 호기심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대체 이렇게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 이토록 거대한 호수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햐르가스 호수는 이 지역을 흐르는 자브항 강(Zavkhan River)의 물이 모여 만들어진다고 한다. 보통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기 마련이지만, 몽골의 자브항 강은 바다까지 닿지 못하고 이곳 햐르가스 호수에서 여정을 멈춘다. 몽골과 같은 내륙분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륙 하천(endorheic basin)의 종착점인 셈이다. 비록 건조한 기후지만, 아주 적게나마 내리는 비와 주변의 높은 산들(아마도 항가이산맥 등)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융설수)이 꾸준히 모여 이 광활한 ‘사막의 바다’를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메마름 속에서 생명을 품고 있는 햐르가스 호수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엿본 기분이었다.
 
만년설과 빙하를 품은 위대한 산, 타왕복드
햐르가스 호수가 준 푸른 감동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서쪽으로 차를 몰았다. 이번 몽골 재방문의 가장 큰 이유이자 최종 목적지를 향해서였다. 그곳은 바로 몽골 서부 국경지대에 자리한, 만년설과 빙하를 품은 위대한 산, 타왕복드(Tavan Bogd)였다. 그리고 이 웅장한 자연의 성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 같은 도시가 있었으니, 카자흐족의 문화가 숨 쉬는 올기(Ölgii)이다.


올기는 타왕복드로 향하는 여행자들에게 마치 네팔의 포카라와 같은 존재였다. 히말라야의 고봉들을 탐험하려는 이들이 포카라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마지막 숨을 고르듯, 우리도 올기에서 타왕복드로 들어갈 만반의 채비를 갖춰야 했다. 수도 울란바토르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오며 혹사당했을 차량을 꼼꼼히 정비하고, 앞으로 며칠간 버텨낼 식량과 필수품들을 보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며칠간의 고된 여정으로 지친 몸을 도시에 있는 호텔에 뉘이며,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올기에서의 시간은 다가올 장엄한 자연과의 본격적인 만남을 위한, 설레면서도 경건한 준비과정과도 같았다.


올기에서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타왕복드를 향해 출발했다.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 마침내 차강 골(Tsagaan Gol), 이름 그대로 ‘하얀 강’ 앞에 섰다. 정말 강물은 우유나 탄산음료 밀키스를 풀어놓은 듯 뽀얀 흰색이었다! 이 신비로운 색은 저 멀리 보이는 타왕복드 산군의 거대한 빙하가 수천 년에 걸쳐 산을 깎아내며 만들어낸 미세한 돌가루가 물에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눈앞의 하얀 강물은 이제 곧 마주할 장엄한 빙하 지형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분명한 신호탄과 같았다. 몽골 하면 흔히 떠올리는 사막과 초원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빙하가 빚어낸 또 다른 풍경을 만나고 싶었던 이번 여행의 목적이 서서히 달성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경이로운 하얀 강 옆에 마련된 게르에 짐을 풀고 잠을 청하려던 순간, 나는 예상치 못한 습격에 할 말을 잃었다. 게르 안을 가득 메운, 아니, 문자 그대로 공기 중에 떠다니는 모기떼였다. 어림잡아 수백, 아니 수천 마리는 족히 되어 보였다. 아마도 하얀 강이 주변에 만들어 놓은 크고 작은 습지들이 모기들에게는 최적의 서식 환경을 제공한 모양이었다. 피할 곳도,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그날 밤, 꼼짝없이 내 피를 그들에게 ‘수혈’해 가며 모기떼의 극성스러운 공격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길고도 고통스러운 밤이었다. 타왕복드의 장엄함으로 가는 길은 이토록 혹독한 신고식을 요구하는 것일까.


드디어 타왕복드 입구에 도착했다. 그날 밤은 참으로 매서웠다. 간밤의 폭풍우가 남긴 흔적은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하늘은 여전히 잔뜩 흐렸고, 바람은 밤새의 기세를 완전히 거두지 않은 듯 매서웠다. 설상가상으로 현지 가이드는 “이 날씨로는 타왕복드 안쪽 빙하지대까지 진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빙하 아래에서의 하룻밤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실망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우리는 일단 국립공원 매표소가 있는 곳까지 이동해 보기로 했다. 그곳에서 날씨가 개기를 조금 더 기다려보고, 끝내 하늘이 열리지 않으면 아쉽지만, 그날의 일정은 포기할 참이었다.


매표소 앞에서 초조하게 하늘만 바라보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말 거짓말처럼, 마치 누군가 연극의 막을 올리듯, 짙은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구름은 걷혔고, 눈 부신 햇살이 밤새 얼어붙었던 땅 위로 쏟아져 내렸다. “와!” 우리 일행 모두는 약속이나 한 듯 안도의 환호성을 터뜨렸다. 간밤의 고생과 아침의 불안감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마법처럼 열린 하늘 아래, 우리는 드디어 만년설과 빙하가 기다리는 타왕복드의 심장부를 향해 감격스러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타왕복드의 속살로 들어서자마자, 숨 막히는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싼 것은 온통 눈부신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거대한 설산(雪山) 봉우리들이었다. 그리고 그 장엄한 설산들 사이의 골짜기를 따라,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거대한 얼음의 강, 포타닌 빙하(Potanin Glacier)가 유유히, 그러나 위압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접하던 압도적인 대자연의 파노라마. 그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풍경 앞에서 우리 일행은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경이로움에 넋을 잃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만년설과 빙하,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날카로운 암봉들이 즐비한 풍경은 마치 알프스나 히말라야의 어느 고산지대를 떠올리게 했지만, 놀랍게도 이곳 역시 틀림없는 몽골의 땅이었다. 그 증거는 바로 우리 곁에 있었다. 관광객들을 태우기 위해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대기하고 있는 여러 필의 말들이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말을 빌려 타기로 결정했다. 저 거대한 포타닌 빙하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느끼기 위해, 우리는 말 잔등에 몸을 싣고 얼음의 심장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말에서 내려 빙하가 잘 보이는 곳을 물색했다. 다른 여행자들이나 우리 일행들의 게르에서 조금 떨어진, 그러면서도 밤새 빙하의 숨결을 바로 곁에서 느낄 수 있을 만한 곳. 마침내 적당히 넓고 평평한 자리를 찾아 배낭에서 텐트를 꺼내 익숙하게 펼쳤다. 이제 정말 오롯이 나 혼자였다. 다른 일행들은 따뜻한 게르에서 안락한 밤을 보내겠지만, 나는 처음 계획했던 대로, 아니 어쩌면 이 여행을 다시 결심한 이유였을지도 모를 그 꿈을 실현할 참이었다. 바로 이 차가운 빙하 아래서 홀로 밤을 맞이하는 것.


침낭 안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쉬이 잠들기는 어려웠다. 사방은 깊은 어둠과 정적에 잠겨 있었지만, 오히려 모든 감각은 더욱 예민하게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예민해진 귓가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쩍…쩍…콰르릉…’ 깊은 밤의 침묵을 깨고 간헐적으로, 하지만 분명하게 들려오는 빙하 갈라지는 소리. 수만 년의 시간이 압축된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몸을 뒤트는 듯한, 낮고 육중한 파열음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살아 숨 쉬며 미세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자연의 맥박 소리, 혹은 인간의 시간이 가닿지 못하는 태고(太古)의 외침처럼 느껴졌다. 텐트라는 얇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지금 위대한 대자연의 맨얼굴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대자연이, 바로 이런 거구나!’ 설명할 수 없는 경외감과 함께 원초적인 두려움이 온몸을 감쌌다. 그 밤의 소리와 감각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몽골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초원의 바람과 사막의 별, 그리고 예기치 못한 소금 호수에서의 유영을 지나, 마침내 마주한 타왕복드의 빙하. 그 빙하 아래에서 홀로 보낸 밤, 텐트 너머로 들려오던 얼음의 속삭임은 왜 내가 그토록 몽골을 다시 찾고 싶어 했는지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들려주는 듯했다. 몽골은 단지 광활한 초원과 사막의 땅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혹독하고, 때로는 경이로우며, 늘 살아 숨 쉬는 맨얼굴의 자연. 그 예측 불가능한 다채로움 속에서 인간의 왜소함을 깨닫고, 동시에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곳. 어쩌면 나는 또다시 몽골로 향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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