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기 칼럼] 가을 아침 단상

2026.10.07 10:00:00

출근길, 무등산을 따라 청명한 가을빛의 새털구름이 펼쳐지고 있다. 너무 아름다워 신호등 앞에서 잠시 하늘을 쳐다본다. 어젯밤에는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산바람이 불어와 자다가 깨었다. 창문을 조금 닫고, 얇은 여름 이불 대신 포근한 이불을 꺼내어 덮었다. 그 무덥던 여름과도 어느새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나 보다. 곧 떠나겠구나라는 생각에 서운해진다. 어쩌면 떠나는 그가 아니라 남은 내 시간 줄어듦이 아쉬운 것이리라. 여름아, 내년에 다시 보자. 그때는 조금만 더 성질 죽이고 오렴. 정 보고 싶으면 겨울에라도 널 찾아가마. 

 

아름다운 가을날 산으로 가지 않고 연구실로 왔다. 어머니는 눈만 뜨면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가셨다. 

 

“엄니, 세상일 혼자 다할라고 그요? 저승사자가 문 앞에 와서 가자 해도 앞산 자갈밭 풀 마저 매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허겄네요. 따라가면서도 마치지 못한 일이 아쉬워 자꾸 뒤돌아보게 생겼네. 호미 내려놓고 가을 꽃구경 가십시다.” 


“누근들 일허고 싶어서 허것냐. 눈에 보인디 어떻게 안 허겄냐. 외갓집 식구들처럼 광주 아파트로 이사 가서 풀이 눈앞에 안 보이면 좋은디 그것이 맘대로 되냐. 일도 못하는 니 아버지는 싫단다.” 

 

말은 그렇지만 형님네 아파트로 오시면 하룻밤을 제대로 못 버티고 다음 날 시골집으로 가셨다. 어머니가 거동이 가능할 때는 내 유혹에 쉽게 넘어오셨다. 집 뒤꼍 텃밭이, 피야굴산 자갈밭이 실은 어머니 놀이터다. “하루 일 안 한다고 곡석이 죽을 것도 아니고, 가자”하며 따라나섰다. 나도 핑계 삼아 어머니 모시고 초가을 나들이 갔을 텐데 이제는 핑곗거리도 없어서 일요일 아침 눈뜨자 출근했다. 

 

내 아이들도, 친구들도 그렇게 이야기한다. 혼자서 세상 연구 다 하느냐고, 아무도 모르니 놀아가며 하라고. 나도 안다. 그런데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평생 하던 일이 연구실 나오는 것이어서인지 정신 차려보면 차가 연구실 앞에 와 있다. 시골집에서 출퇴근하며 지내던 때 어머니도 그리 말씀하셨다. 좁은 연구실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으면 답답하지 않으냐고. 그래서 인터넷이라는 것이 있어서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내가 원하는 세상 사람을 모두 연구실에 앉아서 만날 수 있다고, 밭이 어머니 놀이터이듯이 연구실이 내 놀이터라고. 


어머니는 시어머니랑 같이 매던 밭을 오랫토록 홀로 매셨다. 혹독한 시어머니 시집살이에도 밭을 맬 때는 알콩달콩 이야기꽃을 피우셨단다. 밭에 가야, 곁에서 함께 밭을 매며, 다정히 말을 걸어오던 시어머니를 만날 수 있어서 눈만 뜨면 홀로 사는 집을 나서 밭으로 가셨다.

 

굳이 말하지 않는 비밀, 연구실에 앉아서 책을 읽고, 생각을 가다듬으며 글을 쓰는 시간이 내게는 행복이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여성이 작가로 서기 위해 필요한 조건의 하나로 ‘자신만의 방’을 들었다. 그녀가 떠난 지 80년도 더 되었지만, 자신의 방이 없는 한국의 여성이 많다. 특히 어머니들은 더 그렇다. 나는 운 좋게 평생을 내 독립된 공간에서 내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독립된 공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사람들과 자주 섞이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면 자칫 괴물처럼 변하기도 한다. 판사인 내 친구에게 이해되지 않는 판결이 종종 있다고 했더니 자기 집무실에 앉아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혼자 지내는 판사가 늘기 때문이라고 했다. 판사들의 집무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누구를 위한 장송곡이냐며 한탄하던 법조인을 만난 적도 있다. 

 

밀폐된 공간에서 홀로 사는 또 다른 직군이 있다. 바로 교수이다. 교수들은 오래전부터 독방을 써왔다. 교수 세계의 농담 중에 교수 유형에 관한 것이 있다. 교수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는데, 이상한 교수, 좀 더 이상한 교수, 그리고 아주 이상한 교수가 그것이다. 결국 모두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같은 과 교수끼리 서로 이해가 되지 않아 옆 방에 살면서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내는 교수가 의외로 많다. 


AI 시대 K-교육 방향이라는 주제의 언론사 포럼에서, 사람끼리 소통하지 않고 자신만의 밀폐된 공간에서 주로 AI와 소통하다 보면 모두 이렇게 이상한 사람으로 변할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그랬더니 동석한 교수 한 분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AI와 소통하는 사람은 상대가 기계임을 알기에 종종 스스로가 거기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라도 한다. 그런데 교수는 더 문제다. 교수들은 실제로 거의 매일 사람들과 소통한다.

 

다만 교수 방을 찾아오는 사람은 주로 지도교수를 떠받드는 대학원 석·박사과정생이다. 이들 대부분이 교수의 말에 동조하며 존경을 표하기 때문에 교수는 자신의 생각이 정말 옳고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것이 나이가 들수록 아주 이상한 교수가 되는 이유라고 했다. 

 

그럴싸해서 나를 돌아보았다. 생각해 보니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다행히 잦은 전국 강연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할 기회를 갖고 있다. 하지만 강사에게 쓴소리하는 사람이 적으니 더 큰 착각에 빠져 사는지도 모르겠다. 학회에서 많은 선후배 학자를 만나지만, 학계 풍토가 가급적이면 비판 목소리를 내지 않기에 자신을 객관화시켜 볼 기회가 많지 않다. 


세상 대부분이 내 말에 감탄하는데, 내가 입만 열면 “아멘. 나무아미타불”하면서 들으려 하지 않거나, 나를 비꼬면서 내가 권위적이며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세상에 딱 한 명 있다. 내 아내와 대화할 때 드디어 나를 들여다볼 기회를 갖는다. 그럴 때도 “아내를 설득할 수 있으면 세상 모두를 설득할 수 있다”는 궤변으로 나를 방어하곤 한다. 
  
아침 해는 솟는가 싶으면 벌써 하늘 높이 올라와 있다. 아이들도 태어났나 싶으면 금방 훌쩍 자라 있다. 해거름녘 해는 지려면 많이 남은 듯하지만, 허망하게 서산 너머로 빨려 들어간다. 노년의 시간은 저녁 해보다 더 빨리 스러져가는 것 같다. 글을 쓰던 중 형님이 보내온 동영상 한 편을 만났다. 모 방송사의 음악 프로에서 곡 도입부에 80대 노인으로 분해 자식을 먼저 보낸 회한과 남겨진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절절한 내레이션으로 풀어내는 가수 차지연이 마른 내 가슴을 어룬다. 

 

“내 새끼들아, 잘 살아 줘 고맙다. 내 살아보니께 인생이 별것 없더라. 너무 애씀서 살지 마러라. 느그들 객지 가서 애씀서 사는 모습을 생각허먼 이 애미 가슴이 미어진다. 우리 막내며느리 듣거라. 우리 자석이 먼저 갔어도 느그 자석 둘을 잘 길러줘 고맙다. 죄스런 마음이 크다. 꼭 한번 오니라. 나 죽기 전에 보고 잡다. 꼭 한 번 오니라 이∼.”

 

“제자들아, 교단에서 열심히 살아 줘 고맙다. 살아보니 교직 인생 별것 없더라.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너희들 애씀서 사는 모습 생각하면 내 가슴 미어진다. 학교를 너희들이 가르칠만한 곳으로 만들지 못하고 떠나와 죄스런 마음이 크다. 오라는 말은 못 하지만, 종종 소식은 전해다오. 마치는 날까지 꼭 건강 잘 챙기거라.”

박남기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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