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기 칼럼] 스승의 달에 부치는 ‘신임 명예교수’의 바람

2026.05.07 10:00:00

현직 마지막 스승의날 소회를 쓴지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많은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하는 선생님들께는 먼 이야기 같겠지만, 살아보니 30여 년의 교직생활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정년 10년 전부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습니다.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10년은 3652일입니다. 조금 지나니 2천 단위로, 다시 1천 단위로 줄어들더니 금세 손안의 모래처럼 모두 사라졌습니다. 하긴 100년도 겨우 3만6525일에 불과하니 우리의 생 자체가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 현직 마지막 스승의날 소회와 퇴직 직후에 썼던 짧은 글을 통해 어제를 돌아보며 교육계 선후배들과 함께 내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현직 마지막 스승의날 소회
스승의날을 맞아 세상의 모든 선생님께 축하를 전합니다. 2024년 5월, 제자들이 들고 온 카네이션 향기가 연구실 가득했던 현직 마지막 스승의날을 기억합니다. 은사님들께도 작은 축하의 마음을 보냈습니다. 나와 연을 맺어 함께 했던 수많은 제자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습니다. 부족한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훌륭한 스승 밑에서 훨씬 아름답게 꽃피웠을 제자들도 많습니다. 수업 중에 종종 미안함을 담아 이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의 운은 여기까지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만나는 제자들은 더 큰 행운을 누리도록 여러분은 더 위대한 스승으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인도의 성자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은 “스승은 지혜를 주는 자가 아니라 제자 스스로 깨닫게 인도하는 자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수업 첫 시간이면 “박남기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박남기를 밟고 넘어가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늘 깨어 있는 자세로 제 가르침을 분석·비판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도록 이끌고자 했습니다.

 

제 역할을 제대로 해왔는지 자문해봅니다. 대한민국에서 대학교수로 살아온 고마움을 퇴임 후에도 간직하며, 마지막까지 세상에 보탬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도 아닌데 허전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네요. 현직 마지막 ​스승의날 연구실에 앉아 행복했던 순간들을 반추하며 다가올 시간을 계획해봅니다. 


길면 10년에서 15년 정도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생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집필 중인 책과 계획 중인 책 목록을 바라보며 각오를 다져봅니다. 내가 원하는 삶이 나만이 아니라 주위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열정은 자신의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열정의 샘이 마르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뇌과학에 따르면 열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기를 관장하는 배외측 전전두엽(dl-PFC)을 활성화해야 합니다. 이를 활성화하는 방법 중에서 최고는 운동이라고 합니다. 운동을 하면 동기 센터가 있는 뇌 부위가 두꺼워진다고 하네요.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무등산 지봉인 군왕봉 꼭대기까지 걷고 달리며 오릅니다. 거기에 가면 밤새 나 모르게 빠져나와 배회하던 내 ‘젊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를 허리춤에 꿰차고 내려오면 하루를 다시 왕성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산 정상에서는 많은 사람의 젊음이 자신의 주인을 기다리다가 아쉬워하며 사라져가곤 합니다. 열정을 가진 우리의 젊음은 산꼭대기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집 근처의 공원과 강변에서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이 들면 잠을 자는 사이에도 근육이 녹아내린다고 합니다. 몸의 근육만이 아니라 마음의 근육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출근해서 컴퓨터를 켰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하기 싫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늘어납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소진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벗어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그 출발점은 늘 운동이었습니다. 팔굽혀 펴기를 하고, 연구실에 있는 두어 가지 운동기구를 활용해서 심장박동이 최고조에 이를 때까지 운동을 해왔습니다.

 

운동은 숯불이 이글거리도록 풀무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내 젊음의 화로에 새로운 숯을 하나 올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하면 조금씩 의욕이 되살아나며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내 가슴이 불타올라야 생나무 가지 같은 학생의 가슴에 불을 지를 수 있음을 오랜 경험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사회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도 의욕만 넘쳐 참견하는 것은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려면 열정만이 아니라 지혜도 계속 키워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폐기물이 아니라 세월이 흐를수록 존재감이 돋보이는 골동품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지혜, 과감히 떠날 수 있는 용기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임 명예교수의 각오
신임 교수로서의 각오를 다졌던 순간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데, 이제 ‘신임 명예교수’ 가 되어 삶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전임 강사로 발령받았던 시절 저를 소개할 때 신임 전임 강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명예교수라고 소개해야 합니다. 더이상 현직 교수가 아니라 퇴직한 교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신임’이라는 단어를 덧붙이기로 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 대상 명예교사제도도 도입·운영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수는 정년이 있지만, 명예교수는 대부분 정년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종신직입니다. 따로 의무는 없지만, 대학의 전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서 역량만 되면 연구 수주를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대학과 함께 할 수는 있는 ‘영원히 공부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자리입니다. 


이름만 교수인 존재가 아니라, 명예교수라는 호칭에 걸맞은 명예로운 존재가 되어야 주위에 부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 그러한 의무감으로 저를 몰아치지 않아도 아직까지는 읽고 싶은 책, 쓰고 싶은 글, 그리고 세상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AI를 비롯한 교육계의 급류에 올라타 래프팅하듯이 즐기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축복의 시간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까지는 감사하며 세상과 나누고자 합니다. 


직업 세계별로 고유의 농담이 있습니다. 교수들 사이에는 “교수가 강의만 없으면 참 좋은 직업”이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교직 종사자는 누구나 공감하며 웃을 수 있는 농담 같습니다. 가르치는 것을 힘들어하고 수업을 최소한으로만 맡으려고 하던 교수 중에 퇴직 후에야 강의 욕심을 내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대학은 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을 때 하려고 하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열정을 쏟는 것이 현명한 삶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 자신이 만든 인간을 바라보면서도 도저히 이해 안 되는 것이 많다. 그중 하나는 걸을 수 있을 때는 조금이라도 덜 걸으려고 가까운 주차 장소를 찾아 빙빙 돌던 사람이 걸을 수 없게 되면 한 발짝이라도 더 걷겠다고 애를 쓰더라”라는 신부님 세계의 농담이 떠오릅니다.

 

그리 행동하게 만든 것도 신이라고 핑계를 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다행히 신은 우리 스스로가 가진 그러한 한계를 깨달을 수 있게, 나아가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게 만든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프로그램을 이해하며,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습니다.

 

오월을 맞이하는 미래의 나에게 
제자들에게 늘 했던 이야기로 제 다짐을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공부하는 것을 즐길 때까지만 스승일 수 있습니다. 제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며 그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스승의 모습은 영원한 학생입니다.” 


아름다운 오월 스승의날을 맞아 종신직 명예교수로서 영원한 학생이 될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합니다.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는 87세의 나이에도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Ancora Imparo)”라는 말을 남기며 예술을 향한 끝없는 정진을 보여주었다고 전해집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용맹정진하다가 깊은 산사에서 조용히 자취를 감추는 고승처럼, 동이 트면 소리 없이 스러지는 새벽 별처럼 어느 날 그렇게 조용히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박남기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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