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달콤한 추억, 까마중

2022.09.05 10:30:00

 

까마중이 익어가고 있다. 푸른 잎 사이에서 작은 꽃들이 꽃잎을 날렵하게 뒤로 제치며 노란 꽃술을 내밀고 있고, 한쪽에서는 열매가 한창 익어가고 있다. 벌써 따 먹고 싶을 만큼 검게 익은 열매들도 많다.

 

어린 시절 좀 산다는 집도 세끼 밥 외에는 아이들에게 간식거리를 줄 형편이 아니었다. 방학 때는 점심을 따로 준비하지 않는 집들이 많았다. 요즘 아이들이 먹는 피자나 치킨 같은 것은 구경조차 못 했다. 어쩌다 어머니가 감자·고구마·옥수수를 쪄주면 허겁지겁 먹었다.

 

그 시절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먹을거리 중 하나가 까마중이었다. 집 뒤안이나 밭가에 흔했던 까마중은 한여름 까만 열매를 달고 있었고, 그런대로 달콤한 것이 먹을 만했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서는 ‘먹때왈’이라고 불렀다. 산딸기를 ‘때왈’이라고 했는데, 먹때왈은 검은 딸기라는 뜻인 것 같다. 익은 것을 다 따먹어도 며칠 후면 다시 까만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봄에는 아카시아꽃과 삘기(여러해살이풀인 띠의 어린 꽃이삭이 밖으로 나오기 전에 연한 상태인 것)를 따먹었다. 언덕이나 밭가에 많은 삘기를 까서 먹으면 향긋하고 달짝지근했다. 삘기는 쇠면 먹지 못하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기간이 잠깐이었다. 뽕나무밭에 들어가 오디(뽕나무 열매)를 따먹기도 했다. 그러나 뽕밭 주인에게 들키면 혼났기 때문에 항상 주위를 경계하면서 따먹어야 했다.

 

여름에 산에 가면 산딸기가 지천으로 있었다. 우리 집 남매들은 여름에 밭에서 일하다 쉴 때 모두 산으로 들어가 산딸기를 따 먹었다. 우리 밭 옆에는 제법 우거진 산이 있었고,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여름 내내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산딸기밭이 있었다.

 

황석영의 단편 <아우를 위하여>에서 어린 시절 추억의 먹을거리인 까마중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서울 영등포의 먼지 나는 공장 뒷길을 배경으로 한 단편인데도 까마중이 나왔다.

 

너, 영등포의 먼지 나는 공장 뒷길들이 생각나니. 생각날 거야, 너두 그 학교를 다녔으니까. 아침마다 군복이나 물 빠진 푸른 작업복 상의를 걸친 아저씨들이 한쪽 손에 반찬 국물의 얼룩이 밴 도시락 보자기를 들고 공장 담 아래를 줄이어 밀려가곤 했지. 우리 아버지두 그 틈에 있었을 거야. 참, 그땔 생각하면 제일 먼저 까마중 열매가 떠오른다. 폭격에 부서져 철길 옆에 넘어진 기차 화통의 은밀한 구석에 잡초가 물풀처럼 총총히 얽혀서 자라구 있었잖아. 그 틈에서 우리는 곧잘 까마중을 찾아내곤 했었다. 먼지를 닥지닥지 쓰고 열린 까마중 열매가 제법 달콤한 맛으로 유혹해서는 한 시간씩이나 지각하게 만들었다.

 

작가도 어린 시절 까마중을 따 먹은 추억이 있는 모양이다. <아우를 위하여>는 군에 입대한 아우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한다. 화자는 편지에서 19년 전 자신이 열한 살 때 교실에서 벌어진 일을 회상하고 있다. 수복된 지 수년이 지나 ‘나’는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을 온다. 그 반 담임 메뚜기 선생은 늘 교실을 비우는 등 학생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 와중에 이영래라는 학생이 전학을 와서 반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린다. 요즘 말로 하면 영래는 ‘일진’이다. 그런데 사범학교 졸업반 여자 교생은 영래의 횡포를 눈치 채고 “한 사람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면 여럿이서 고쳐줘야 해요. 그냥 모른 체하면 모두 다 함께 나쁜 사람들입니다”라고 은근히 학생들을 책망한다. 영래 패거리는 교생을 미워하면서 수업 중에 교생을 모욕하는 쪽지를 돌리지만, 나는 이를 거부하고 반 아이들과 합세해 그들을 제압하는 것이 소설의 줄거리다.

 

우리들이 학교 다닐 때 남학생 교실에서 힘센 아이가 교실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는 일은 흔했다. 그런 흔한 이야기로 독재가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현실을 풍자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향까지 제시한 작가의 역량이 놀랍고도 부럽다. 짧은 단편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아우를 위하여>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떠오른다. 문제 많은 초등학교 고학년 교실에 젊은 교사가 부임해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 문제를 해소하는 과정이 유사하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한병태는 엄석대에게 저항하다 굴복해 엄석대 왕국에서 권력의 단맛을 즐기지만, <아우를 위하여> 주인공은 굴복하는 과정 없이 아이들과 함께 스스로 영래 패거리를 제압하는 점이 다르다.

 

승려의 머리를 닮은 까만 열매, 까마중

까마중은 가지과 식물로, 까맣게 익은 열매가 승려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까마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산이나 집 주변, 밭·개울가, 아파트 화단 등 사람이 사는 곳 주변 어디에서나 잘 자란다. 시골은 물론 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전 세계의 온대와 열대에 널리 분포하고, 우리나라에는 벼와 함께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20∼90cm로 자라고, 가지가 옆으로 많이 퍼져 전체적으로 둥근 형태를 이룬다. 꽃은 5~10월 마디와 마디 사이에서 3~8송이씩 하얗게 핀다. 탱글탱글한 검은 열매는 흑진주처럼 생겨 예쁘다. 7월쯤부터 검고 둥글게 익는데, 단맛이 나지만 약간 독성이 있으니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지 않는 것이 좋다. 한방에서는 풀 전체를 캐서 말린 것을 ‘용규’라고 하여 감기·만성기관지염·신장염·고혈압·황달·종기·암 등에 처방한다.

 

 

까마중과 비슷한 미국까마중도 있다. 꽃이 2~5개 정도로 적게 달리고 꽃이 연한 자주색으로 피고, 열매에 광택이 있는 것이 다르다. 미국까마중은 이름처럼 북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이다. 미국까마중만 아니라 감자·가지·토마토·배풍등 등도 까마중과 같은 속(Solanum)인 것이 놀랍다.

 

어릴 때는 까마중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다. 동네 애들이 보이는 대로 따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동네 외진 곳에 있는 까마중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따 먹곤 했다. 먹다 보면 입과 손 주변에 검은 얼룩이 생기곤 했다. 그런데 요즘엔 도심 공터나 화단에도 까마중이 잡초처럼 흔하지만 따먹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매연 등에 찌들어 먹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고향집에 갔을 때 딸들에게 그 맛을 알려주려고 까마중을 따서 먹어보라고 했다. 그런데 한 번 입에 넣더니 인상을 찡그리고 다시는 먹으려 하지 않았다. 나도 다시 먹어보니 밍밍한 것이 예전 맛은 아니었다. 내 입맛도 변해버린 모양이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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