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형식

2021.05.06 10:30:00

 

01 처음 교회에 나오게 된 사람이 목사님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한 사람이었다. “목사님, 기도하며 담배를 피워도 됩니까?” 목사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그 초보 신자는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담배를 피우는 중에, 기도를 해도 됩니까?” 목사님이 잠시 생각하다가 그에게 되물었다. “꼭 그렇게라도 기도해야 할 사정이 있었나요?” 두 번째 물음 앞에서 목사님은 기도의 형식을 뒤로 물리고, 기도 내용의 진정성과, 그렇게 간구하는 심령의 갈급함을 먼저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나라면 어떤 대답을 주고 싶은가. 교회의 규범을 오래 지켜 온 사람에서부터 자유주의 무신론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모범답안을 말해 줄 것이다. “기도는 경건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신을 믿고 받드는 마음을 바탕으로 뉘우침과 다짐과 기원이 간절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에 합당한 몸가짐으로 기도하세요.” 근본 원리인 셈이다. 굳이 따져본다면, ‘신을 믿고 받드는 마음’은 기도의 바탕이다. ‘뉘우침과 다짐과 기원’은 기도의 내용에 속한다. ‘몸가짐과 자세’는 기도의 형식에 속한다. 내용과 형식이 서로에게 잘 녹아 들어가서 ‘경건’을 빚어낼 것이다.

 

우리가 두 번째 물음(“담배를 피우는 중에, 기도를 해도 됩니까?”)에 대해서 마음을 쓰는 것은, 그 기도 내용에 모종의 진정성이 있음을 헤아리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기도를 올리려 하기에, 얼마나 간절하고 갈급한 기도이기에, 담배 피우는 시간에도 마음은 기도로 향한단 말인가. 새삼 기도는 내용이 중요함을 의식한다. 그런가 하면, 기도의 경건은 그 형식이 반듯한 데서 온다. 이를 굳게 믿는 사람들은 두 번째 물음은 꺼낼 수도 없는 물음이라 말한다. 기도에 어찌 담배가 끼어든단 말인가. 그런 기도에 무슨 경건함이 있겠는가. 형식이 망가진 기도는 이미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형식이 중요함을 앞세운다.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기도의 ‘내용’과 ‘형식’이 파워 게임(Power Game)이라도 하는 건가. 세상 모든 일에 내용과 형식은 나란히 가는 듯하면서도, 서로 내가 먼저라고 다툰다. 물론 내용과 형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서로 모순된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갖는 ‘마음의 경향(Tendency of Mind)’이 그런 다툼을 이끄는 것이리라. ‘내용을 중시하려는 마음의 경향’과 ‘형식을 중시하려는 마음의 경향’이 부딪치는 것이다.

 

마음의 경향이란 일단 굳어지면, 마치 무슨 이념과도 같은 작용을 한다. 그래서 형식 경향성이 강한 사람을 가리켜 ‘형식주의자(Formalist)’로 부르기도 하고, 또 그 대척에 있는 사람한테는 ‘실용주의자(Pragmatist)’ 또는 ‘실존적 행동주의자(Exisistential Activist)’ 등의 라벨을 붙여 주기도 한다. 물론 이런 ‘마음의 경향’은 내 안에서도 일정치 않다. 나 자신도 때로는 형식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실용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02 영화 ‘천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의 끝 장면은 충격적이다. 헨리 8세가 지배하는 궁정을 배경으로, 왕의 탐욕과 끝없는 바람기가 휘몰아가는 음모의 소용돌이에서 죽음으로 내몰리는, 자아가 강한 왕비 앤(Anne)의 처형이 바로 이 영화의 끝 장면이다. 그 처형은 참수의 형식으로 집행한다. 이 영화는 이 장면이 없으면 주제의 깊이를 확보할 수 없다. 긴 여운의 묘미도 느낄 수 없다. 영화는 참수형의 의식을 담담하고 건조한 톤으로 세세하게 보여 준다. 형이 집행되는 전후, 특히 선혈을 뿌린 뒷자리의 모습도 침착하게 보여 준다.

 

왜 참수형일까. 헨리 8세에게 버려진, 비운의 왕비 앤에게 덮어씌운 죄는 불충과 반역죄, 근친상간의 죄 등이다. 이 죄에 내려진 벌의 내용은 ‘사형’이다. 그 벌의 형식은 칼로 목을 자르는 참수형이다. 집행자는 한칼에 목을 잘라야 한다. 참수하기 전에 사제의 기도도 있고, 집행관의 선언도 있고, 죄수의 최후 진술도 있다. 그리고 처형의 뒷자리를 수습하는 의식도 있다. 이 모두가 참수라는 벌의 형식에 해당한다.

 

참수라는 형식을 취한 데는 그 나름의 문화적 의미와 이전의 형벌 전통이 가담하고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참수형을 가장 명예로운 죽음의 형태로 여겼다고 한다. 이로부터 유럽 국가들은 귀족과 왕족을 처형할 때 참수의 형식을 써왔다. 그러나 경멸과 모욕의 상징으로 참수형을 행하는 지역이나 문화도 많다. 참수라는 형식은 문명세계에서는 사라졌다. 이슬람 문화권의 일부에서는 아직도 공식적인 처형의 형식으로 남아 있다.

 

동서고금에 수많은 처형의 형식이 있었다. 사형 집행이 갖는 사회적·정치적 상징은 ‘처형의 형식’을 통해서 드러난다. 사형 집행에 투사되는 지배적 가치도 ‘처형의 형식’을 통해서 드러난다. 종교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고, 마녀사냥의 이름으로 행했던 중세 유럽의 ‘화형’이라는 벌은 어떠했는가. 신에게 고하는 형식, 신을 대리한 처벌의 형식이었다. 따라서 엄청난 제의(祭儀. ritual)의 형식을 빌리지 않았던가. 오늘날 형식 요소가 강한 공동체 행동들은 고대의 제의에 그 원형에 닿아 있다. 형식이란 이렇듯 그 역할이 동적이다.

 

한 사회가 그 기본 가치를 표현하고 보존하고 싶을 때, 그 가치들을 제의 안에 둔다는 것을 우리는 인류학을 통해서 안다(Milgrom, 2004/김근주, ‘레위기’, 2021, p.23, 재인용). 고대나 중세의 제의는 제사의 의식에 집중되었지만, 현대사회는 현대인의 모든 생활 안에 제의 요소가 들어와, 어떤 형식으로 작동한다. 출생·잔치·입학·승진·싸움·소통·화해·투병·연애·결혼·성공·죽음 등등 이 모든 생활 내용에 형식이 관여한다. 생활 속에서 알게 모르게 작동하는 ‘통과 제의’는 더 복잡해졌다. 우리는 그런 삶의 형식들에 이끌려 산다.

 

눈에 보이는 형식은 사라지는 것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형식’은 점점 더 정교해진다. 고리타분한 옛날의 형식들을 다 몰아내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형식을 해체하는 형식이 새롭게 자리 잡는다. 주례를 두지 않는 결혼식을 치르면 형식을 배격한 결혼식을 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주례를 몰아낸 결혼식 자리에 새로운 형식이 어느새 들어와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새로운 결혼의 내용을 불러올 것이다. 자녀들과 함께 자유롭게 가족여행을 하지만, 그 안에서 자녀교육의 내적 형식이 작동한다. 봉건적 분위기의 가정교육 형식을 몰아낸 자리에 이런 형식의 가정교육이 들어오는 것이다.

 

03 “내용이 중요합니까? 형식이 중요합니까?” 내 주변에 가볍게 물어보았다. 대개는 내용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실질이 중요하지, 형식에 얽매이면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하고 부연하기도 한다. 형식이 중요하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젊을수록 그러하다. ‘형식’ 자체가 원래 그런 부정적 뜻을 가진 말일까. 이 형식이란 말을 ‘허례허식’ 같은 부정적 의미 맥락으로 쓰는 사람도 많다. 연배가 든 사람들 가운데 간혹 “살아보니 형식이 중요하다는 걸 느낍니다” 하고 말하는 분을 드물게 만난다.

 

이분법적 선택을 요구하는 질문이 대개 그러하지만, 나는 이런 질문에 무어라 답을 하기가 어렵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어느 한 편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순간, 나의 답은 나의 인식에 반하는, 불충분하기 짝이 없는 답이 된다. 형식과 내용이 서로에게 작용함으로써, 하나의 전체상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는 나의 인식은 어디에도 반영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분법적 선택을 요구하는 심층에는 폭력적인 요소가 있다.

 

형식에 대한 인식은 근대에 들어 예술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데서 일어났다. 예술, 특히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는 학자들이 문학의 ‘형식’에 관심을 쏟는 데서 발생하였다. 이런 관심은 1910년대 러시아 언어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문학의 형식으로 작동하는 여러 가지 기법(craft)들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문학예술이 현실의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의 형식으로 드러내는 데서 문학성이 발현된다고 주장하였다.

 

‘형식주의자’라는 말은 문학의 내용과 이념에 가치를 두던 당시 주류 문학가들이 형식 연구자들을 낮추어 보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문학의 예술성이 생겨나는 기제를 형식의 작동에서 보려는 형식주의자들의 노력은 뒤에 제대로 평가받았다. 문학 내용 연구를 포함한 문학 연구의 발전이 형식주의자들의 도움을 입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형식주의자를 폄하의 뜻으로 쓰는 사람은 지금은 없다.

 

형식을 겉치레 모양새 정도로 이해할 것인가. 형식을 외적 꾸밈의 장치로만 이해하는 것은 형식의 본질을 너무 모르는 것이다. 형식은 내용을 담아내어 옮기고, 내용을 견인하고 쇄신하는 힘을 가진다. 형식은 내용을 재탄생시키는 숨은 메커니즘이다. 형식은 운명을 재구성하게 하는 알고리즘으로 이해할 법도 하다. 보이는 형식만이 전부가 아니다. 형식은 숨어 있다. 숨은 형식이 살아 있는 형식이다.

 

그러하다면 내 삶의 형식은 무엇인가. 내 앞에 놓인 내 운명의 형식은 무엇인가.

박인기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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