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만이 웃는다
인간만이 웃는다. 자신이 기르는 애완동물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나머지 웃는다는 착시를 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동물은 웃음을 표현할 만큼 다양하게 안면근육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안면근육은 80개에 달한다고 한다. 신은 어째서 인간의 얼굴에 그토록 많은 근육을 부여한 것일까?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불을 찾아서>는 언어를 사용하기 이전의 고대 원시사회의 모습을 실증적으로 그려내면서 웃음이 인간의 문명을 열어젖히는 하나의 계기임을 드러낸다. 웃음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동물과 다른 사랑이란 감정을 자각하게 되고 언어 이전의 인간적인 소통 수단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비극>과 쌍을 이루는 <희극>도 존재했을 것이라는 착상을 바탕으로, <희극>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게 된 과정을 그려낸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역시 웃음이 감정을 표출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중세 수도원의 금욕주의적인 종교 철학은 인간의 웃음을 억압하여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웃음이 문명의 마중물이었다는 점,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징표의 하나라는 점은 웃음이 단순하고 즉각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다시 말해 웃음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성적으로 따지고 파고들어 생각하기 이전에 직감과 직관을 동원하여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인 것이다. 어떤 대상을 보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사물을 파악하는 고도의 지능을 전제로 한다. 웃음은 때로 고도의 직관 능력을 발휘한 표현이기도 하고, 때로 대단히 정교한 사고 작용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속 아픈 웃음도 있다
웃음이라고 하면 대개 즐거움, 행복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물론 사람은 일반적으로 기분이 좋을 때 미소, 폭소, 박장대소 같은 웃음으로 감정을 발산하지만, 웃음에는 쓴 웃음(苦笑), 비웃음(嘲笑), 헐뜯는 웃음(非笑) 같은 부정적인 웃음도 엄연히 존재한다.
앤터니 퀸이 열연한 영화 <25시>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안타까움과 분노를 버무린 듯한 웃음을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장면은 독일 나치즘에 의해 운명을 희롱당한 루마니아의 한 순박한 남자가 전쟁이 끝나고 카메라 앞에서 억지로 웃음을 강요당하는 순간을 찍은 것이다. 온갖 감정이 뒤범벅된 웃음을 통해 역사의 격랑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개인의 슬픈 운명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명장면이었다.
한편 조소나 비소라는 한자어에 해당하는 비웃음은 남을 조롱하고 헐뜯으며 빈정거리고 업신여기는 웃음을 뜻한다. 요즘 인터넷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악플 문제가 심각한데, 악플 가운데는 비웃음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런 비웃음은 때때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누가 누구를 보고 웃는가
요즘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은 예전보다 훨씬 ‘웃기기’를 지향하는 것 같다. 그런데 코미디나 개그, 또는 이른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화통하게 웃기는커녕 기분이 상할 때도 적지 않다.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상처를 웃음(이 가져다주는 돈)의 재료로 삼는 작품이 바로 그렇다. 돈 없고 ‘빽’ 없고 못생기고 늙고 뚱뚱한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그런 행위에 대한 일말의 자각조차 없이 오로지 관중을 ‘웃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더할 수 없이 씁쓸한 것이다.
웃음을 사는 사람과 웃음을 유발하는 사람은 처지가 완전히 다르다. 간단하게 말해서 ‘남의 비극 = 나의 웃음’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의 실수나 실패, 역경 등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이나 거리낌 없이 마음껏 우스워할 수 있다는 것은 남의 일을 그저 남의 일로 바라볼 때만 가능하다. 남과 나를 철저하게 분리하고 남과 내가 맺고 있는 모든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남의 일이라고 웃고만 앉아 있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공공연하게 웃음거리가 되는 입장에 놓이는 집단은 대개 사회적 약자이기 일쑤다. 종교 관계자, 정치가 같은 사회적 지도자나 지배계급을 웃음거리로 삼았다가는 자칫 경을 칠 수도 있지만, 약자는 그럴 염려가 없기 때문일까. 그래서 좀 덜 약자인 쪽이 자기보다 더 약자인 쪽을 손가락질하고 웃음거리로 삼는 꼴이 되기 쉽다.
풍자와 해학의 전통
유감스럽게도 한국사회는 강자를 웃음의 재료로 삼는 전통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것 같다. 식민지 통치를 거쳐 분단시대의 독재체제를 경험하는 동안 형성된 문화 빈곤의 현상일 것이다. 조선후기의 탈춤, 판소리, 사설시조 등 전통적인 민중문화에 녹아 있는 풍자와 해학에는 봉건사회의 지배계급이 저지르는 부정부패와 도덕적 모순을 질타하는 비판정신이 짙게 깔려 있다. 이런 날카로운 웃음의 전통이 현대의 코미디나 개그에 남김없이 전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민중예술도 사회적 약자를 웃음거리로 삼았으니, 주로 육체적인 불구자, 즉 병신이 공격성 어린 웃음의 희생자가 되었다. 고전문학에 나타난 ‘병신’ 형상은 삶의 애환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인물형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처럼 민주주의나 평등 같은 사회사상이 보편적 이념으로 자리 잡은 시대에 병신이란 말은 당장 차별이라는 부정적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병신보다는 불구(자)가, 그보다는 장애자라는 말을 선호하게 되었다(현재는 장애인과 장애우라는 두 낱말이 논란의 대상인 듯하다.)
완곡어법의 묘미
몸의 어느 부분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는 불구의 뜻은 병신과 꼭 겹친다. 따라서 불구와 병신은 어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병신이 불구보다 더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어감을 갖게 되었을까. 병신(病身)을 그대로 풀면 병든 몸이고 불구(不具)의 한자를 풀이하면 갖추지 못함인데, 한자어의 뜻에서 보기만 해도 병신보다는 불구가 훨씬 간접적이고 우회적이다. 따라서 두 낱말이 경합하는 과정에서 언중(言衆)은 불구보다는 병신에 불쾌, 경멸, 조롱, 공격성 같은 부정적인 어감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나라 말에든 완곡어법(euphemism)은 있기 마련이다. 말이란 상대에게 곧장 날아가 꽂히는 것인 까닭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방법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죽음이나 성(性), 또는 신체 부위처럼 금기로 여기는 사안에 대해서 완곡어법을 사용하는데, ‘죽다’만 보더라도 높임말 ‘돌아가시다’는 물론, 세상을 뜨다, 세상을 떠나다, 하늘나라로 올라가다 등 부드러운 표현으로 대체하곤 한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상태를 직설적으로 가리키는 ‘병든 몸’ 대신 뭔가 완전하게 갖추지 못했다는 ‘불구’를 일부러 쓴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 즉 말을 신중하게 골라서 쓴다는 의식을 전제로 한다.
불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
예부터 예술작품에는 여러 가지 불구의 인간형이 등장한다. 과연 작가들이 불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가장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심청전>의 심봉사가 암시하듯이, 불구는 곧 인간이 감내해야 할 운명적 시련의 원인으로 설정된다. 운명을 극복하든 운명에 순종하든 인간은 불행을 통해 자신의 운명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봉사라는 불구는 딸 심청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동시에 선의 가치를 실현한 대가를 보상해주었던 것이다.
심봉사와 같은 불구가 해피엔딩을 위한 필연적인 동기인 데 비해, 전쟁처럼 인간이 스스로 행한 악행이나 그로 인해 자초한 비극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으로 불구자의 전형을 동원하는 작품도 있다. 특히 전쟁이 낳은 인간형을 그리기 위해 불구를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작 <잉여인간>으로 알려진 손창섭을 꼽을 수 있다.
손창섭의 작품에는 폐쇄된 공간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불구자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전쟁에 연루되어 피해자가 되었으나 어디에서도 보상받지 못한다. 도리어 전쟁이 끝나도 밝은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폐쇄된 공간 속에서 동물적으로 사육당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불구는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재앙인 전쟁의 피해를 상징한다. 전쟁의 의미를 부각시키며 역사적이면서 실존적인 인간의 비극을 그려내는 불구는 바로 우리 자신의 또 다른 측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