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주 시인의 신작 시집 『새의 눈물을 보았다』가 걷는사람 시인선 141번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시인이 자연의 순리 안에서 발견한 삶의 지혜와 유년 시절부터 목도해 온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현장을 서정적인 언어로 엮어 낸 결실이다. 시인은 시를 “상상의 건축물”이라 정의하며, 감정의 유희를 넘어 “인류 보편적이며 항구적인 정서를 담아내는 시”를 짓겠다고 선언한다. 이 다짐처럼 그의 시 세계는 거창한 담론으로 역사를 재단하기보다, 묵묵히 곁을 지키며 “숨죽이고 지켜보던/새들의 눈물”을 기억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는 단순한 회고를 넘어,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악수이자, 척박한 땅에서도 기어이 꽃을 피우는 들꽃 같은 생명력을 보여 주는 기록이다.

들꽃처럼 피어나는 삶의 긍정
내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는 성숙한 자세
시인의 시선은 자연과 일상의 소박한 풍경으로 향한다. 그는 화려하게 가꾸어진 정원의 꽃보다 “씨앗 떨어진 자리에서/계절에 따라 솟아나 꽃을 피운” 들꽃의 강인함에 주목한다. “무더기로 여럿이 꽃을 피운 들꽃들이/다정하고 포근하다”(「들꽃 예찬」)는 고백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에 대한 지향을 보여 준다. 또한 못생겼다고 여겨지는 모과에게서 “진한 향기 풍기는 귀한 존재”(「모과 이야기」)의 가능성을 발견하며, 겉모습보다 내면의 가치를 중시하는 따뜻한 시선을 건넨다.
시집 곳곳에는 중년에 접어든 시인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다. 화자는 “문득, 내 인생은/지금쯤 어디쯤 와 있는지” 자문하며, “내 인생의 가을이 오기 전에/부지런히 살아 내며/아름다운 삶의 열매를/차곡차곡 가꾸어 가겠”(「내 인생에게 묻는다」)다고 다짐한다. 이는 지나간 청춘에 대한 회한이 아니라, 다가올 소멸까지도 긍정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 내겠다는 단단한 삶의 태도이다. “흔들리는 마음”조차 “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흔들림”(「흔들린다는 것」)으로 승화시키는 시인의 태도는 불안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위안을 준다.
지구라는 별에서의 소풍을 마치며
빈손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기는 감사의 인사
시집의 후반부인 4부 ‘지구라는 별에서의 삶 행복했어라’에 이르면,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시인의 시선은 더욱 깊고 그윽해진다. 화장장인 정수원을 배경으로 한 시 「정수원에서」는 죽음을 끝이 아닌 자연으로의 회귀로 받아들이는 초연함을 보여 준다. 시인은 “누구든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으랴”라며 생의 애착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안녕, 인생아/지구라는 별에서의 삶 행복했어라”라고 읊조리며 떠나는 이의 마지막을 축복한다. 해설을 쓴 김종회 문학평론가는 권태주의 시를 두고 “자신의 삶 전체를 관조하는 성찰의 답안”이라고 평했다. 『새의 눈물을 보았다』는 굴곡진 역사의 터널을 지나온 세대에게는 공감의 위로를,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평범하지만 묵직한 진리를 전하는 시집이다.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씨앗 떨어진 자리에서/계절에 따라 솟아나 꽃을 피운”(「들꽃 예찬」) 들꽃처럼 묵묵히 살아온 시인의 궤적은 독자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킬 것이다.
작품 속으로
가을이 오기 전에
풀잎들은 부지런히
광합성을 하고
속 깊은 열매를 키웁니다
나도 그러하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기 전에
부지런히 살아 내며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차곡차곡 가꾸어 가겠습니다
―「내 인생에게 묻는다」 부분
피어날 수 없었던 젊음의 꽃봉오리들
길바닥에 남겨진 젖은 핏자국
그들은 우리의 밤하늘 별이 되어
소리 없이 빛나며 그날을 이야기한다
광주의 봄은 그대들의 이름을 부르고
오월의 바람은 다시 찾아오네
잊지 않으리, 뜨거운 그날을
소년들이 그린 꿈, 우리가 지켜 내리
―「소년이 온다」 부분
외로이 홀로 핀 풀꽃이나
무더기로 꽃을 피운 들꽃들 모두
존재로서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이다
멀리 있는 너처럼
―「들꽃 예찬」 부분
태양이 뜨겁게 쏟아지는 여름날
수줍은 듯 잎새에 숨어 피어나는
진분홍 접시꽃
그 고운 자태 숨기려 해도
붉어진 볼처럼
향기로운 아름다움이 가득하여라
무성한 잎을 헤치고 고개를 내민
연보랏빛, 분홍빛 수국꽃
한여름 뜨거운 햇살 아래서도
시원한 물감 풀어낸 듯 활짝 피어나
세상의 근심 잊게 하는 너의 미소
보는 이의 마음에 위로를 가득 채운다
―「접시꽃과 수국꽃」 부분
그대 지금 향기 없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어려움을 이기고 참아 내면 언젠가 모과처럼
진한 향기 풍기는 귀한 존재가 될 겁니다
힘을 내 보세요
―「모과 이야기」 부분
젊은 날 우리 둘은 은행나무 아래를 거닐었지
황금빛 부채처럼 가을에 물든 잎들 사이로
우리의 웃음소리 바람에 섞이며
젊은 날의 약속이 가득했네
잎사귀 너머로
길 위에는 빛나는 황금물결
발걸음마다 천천히 떨어지던 은행잎
비밀처럼 살며시 속삭였던
그 짧은 계절 속 우리의 사랑을 기억해
―「은행나무 길을 걸으며」 부분
어제의 바람이 거세었어도
오늘의 햇살은 너를 따뜻하게 비추고
길가에 피어난 작은 꽃들도
너의 용기를 응원한다
낯선 길이라 망설여도 좋아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디면 돼
네가 가는 곳이 곧 길이 되고
네가 믿는 꿈이 현실이 될 테니까
―「새로운 길 위에서」 부분
시인의 말
시는 왜 쓰는가? “시는 감상의 발로이다.” “시는 상상의 건축물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의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 시를 하나의 집으로 보고 있다. ‘더할 수 없이 깊은 몽상 속에서 우리들이 태어난 집을 꿈꿀 때, 우리들은 물질적 낙원의 그 원초적인 따뜻함, 그 잘 중화된 물질에 참여하게’ 되기에 본인의 추억이 깃든 집을 그리워하며 몽상 속에서 되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시인들은 끊임없는 상상 속에서 알맞은 표현을 찾아 집을 짓고 허물곤 한다. 그러한 무수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건축물인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작업인가?
인간의 삶과 현실에 대한 서정,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서경, 사람들은 타원형의 지구 위에 지금도 무수한 건축물을 짓고 있듯이 시인들도 시라는 상상의 건축물을 만들어 갈 것이다. 감정의 유희가 아닌 인류 보편적이며 항구적인 정서를 담아내는 시를 쓰는 시인이 되고자 앞으로도 나는 고뇌하며 내면의 세계를 다듬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갈 것이다.
2025년 가을 반석서재에서
권태주
시인 소개

권태주
1993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시인과 어머니』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한 방향만 바라보고 있다』 『사라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바람의 언덕』 『혼자 가는 먼 길』을 출간했다. 허균문학상, 한반도문학상, 성호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추천사
그의 시 「하루하루가 소중하다」에서 “걸음걸이도 조심조심/마음 씀씀이도 켜켜이 아름다움으로 쌓아”로 볼 수 있듯 그가 삶과 시를 얼마나 성실하게 이끌어 가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시 「내시경」에서 “내장을 휘젓고 다니던 기계는/대장의 용종을 거침없이 떼어 냈을 것이다” 와 「CT실에서」의 ‘혈관을 뚫고 들어오는 주삿바늘/조영제가 혈관을 타고 흐르면’에서와 같이 그의 시 작업은 세상에 전자 현미경을 마중물처럼 내려 서정을 철철 올리는 작업이다. 그것이 그가 가진 장점이기에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심미안을 가진 시인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시 주제는 다양하고 다양하다 보면 견고성이 떨어지나 그렇지 않으므로, 그의 시가 흡입력을 가지고 감동을 주는 이유가 되므로 그의 시는 읽는 사람을 중독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여튼 그는 시를 찾아 천지간 떠도는 시의 노마드다. 기어코 그는 지상에 시로 만들어진 서정의 집 한 채를 지었다. 머지 않아 시의 황금 사원을 지을 게 뻔하다. 그의 시 한 편, 한 편이 결국 천불 천탑처럼 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왕노(시인)
차례
1부 내 인생에게 묻는다
내 인생에게 묻는다
장생포엔 고래가 없다
접시꽃
나는 자연인이다
흔들린다는 것
판단
문득
은하수
내 고향 안면도
유년의 고향
서귀포 올레길을 걸으며
코스모스꽃
가을
영랑 생가
다산 정약용의 길
들꽃
황포 포구
봄은 다시 온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고향에 와서
2부 다산 초당을 오르며
고향의 봄
거문오름을 오르며
소년이 온다
들꽃 예찬
벌레의 잠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오월이 오면
찾아온 고향
능소화
매미
무궁화
오사카성에서
김포 가는 길
꽃지 바다의 노래
저 바다에 누워
강아지 초코
철없는 꽃
노량, 그 죽음의 바다
다산 초당을 오르며
새의 눈물을 보았다
3부 계엄령과 민주주의
내시경
기다린다는 것
청풍 호수에서
반성
접시꽃과 수국꽃
배롱나무꽃
모과 이야기
칠갑산의 밤
은행나무 길을 걸으며
늦가을의 끝
강진만 생태 공원 갈대숲
한산도를 바라보며
존재의 이유
AI 시인
첫눈
계엄령과 민주주의
박경리 기념관에서
쇠소깍 사랑
해마 이야기
열대야의 달빛, 기파랑을 부르다
4부 지구라는 별에서의 삶 행복했어라
바닷가 사람들
지나간 날들과 앞으로의 날들을 위하여
정수원에서
별이 된 줄리엣
대부도
들꽃 시인의 농장 이야기
CT실에서
서귀포 연가
가을 풍경과 시인
추수 감사 기도 시
안중근
제주항공 사고를 추모하며
양수리에서
흰 눈과 유년 이야기
눈 속의 꿈
새로운 길 위에서
설날 즈음
추운 겨울의 시
리브가의 길
성탄절
해넘이 낭송시
해설
삶의 근원에서 도출한 깨달음의 시
—김종회(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