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온달을 바보라 하는가

2008.12.01 09:00:00



바보란 밥만 축내면서 제 구실 못하는 사람

요즘 필자의 눈길을 끈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한 장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우정에서 사랑으로 발전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두루미(이지아 분)와 천재 트럼펫 주자 강건우(장근석 분) 커플, 가을 밤 정취에 취해 키스의 분위기가 무르익는데…. 입술과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애견 (베)토벤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괴짜 지휘자 강건우(동명이인, 김명민 분)에게 딱 걸리고 만다.

“흥, 귀머거리에 백치라, 바보 커플이네. 계속해 봐….”

지휘자 강건우가 청신경 종양 때문에 청각을 잃게 될 두루미를 귀머거리로, 스스로 엄청난 음악적 천재임을 모른 채 좌충우돌하는 순수한 청년 강건우를 백치라고 비아냥거리는 대목이다. 이 대사를 수식으로 표현하면 ‘귀머거리+백치=바보’가 된다.

바보의 뜻을 찾아보면, 지능이 부족하여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 또는 어리석고 멍청하거나 못난 사람을 욕하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는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바보를 규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고 볼 수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여하튼 통상적인 기준에 비추어 바보가 틀림없을 때 바보라는 호칭을 쓴다. 또 하나는 실제로 바보는 아닌데 비난, 조롱, 동정 같은 목적을 위해 단지 비유적으로 바보라고 부른다.

바보는 어원적으로 ‘밥’에 ‘보’가 붙은 형태라고 한다. 이때 ‘보’는 울보, 겁보, 느림보와 같이 낱말 끝에 붙어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마디로 바보란 밥만 축내면서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원래의 뜻에서 어리석거나 멍청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변한 말이다. 제 구실을 못한다는 넓고 추상적인 의미가 지능이 모자란 사람이라는 뜻으로 좁혀지고 구체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자란 사람을 가리키는 말
바보의 뜻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모자람’이다. 됨됨이가 변변하지 못하고 덜된 사람을 얼간이라고 하는데, 얼간은 소금에 살짝 절이는 것을 가리킨다. 즉, 얼간이란 간이 덜 되어 맛이 엉성한 상태의 사람을 빗댄 말이다. 본래는 제대로 간을 맞추어 맛깔스럽게 절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대충 간을 맞춘 것처럼 어설프고 모자란 듯하다는 뜻인 셈이다. 얼간이는 얼간, 얼간망둥이라고도 한다.

모자람의 뜻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말로 ‘반편이’를 들 수 있는데, 지능이 보통 사람보다 모자란 사람을 가리킨다. 반편, 반병신과 바꾸어 쓸 수 있는데, 주지하다시피 ‘반(半)’ 자체가 모자람, 온전하지 못함을 드러낸다. 반편이는 열 달을 온전하게 채우지 못하고 태어났다는 뜻으로 ‘여덟달반’이라고도 한다.

한편 말이나 하는 짓이 다부지지 못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낮잡아 이를 때 머저리라고 한다. 머저리와 비슷한 말로 어리보기가 있지만, 이보다 멍청이라는 말이 더욱 일상적으로 자주 쓰인다. 멍청이는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다. 속된 느낌을 더하여 멍텅구리라고도 한다. 한 번에 낱말을 하나씩 동원하여 소기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지만, 분하거나 속이 터질 때는 ‘바보 머저리 멍텅구리…’처럼 몇 개를 동시에 나열하면 감정 표현의 효과가 더욱 커진다.

육체적 결함과 정신적 결함
바보의 뜻이 정신적인 능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 유념하며 다시 ‘귀머거리+백치 =바보’라는 도식으로 돌아가자. 귀머거리는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는 사람을, 백치는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고 정신이 박약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백치는 바보가 틀림없겠으나 귀머거리를 과연 바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바보는 지능과 관련해서 이른바 정상이 아닌 사람을 가리킬 뿐,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신체의 어느 부분이 온전하지 못하거나 기능을 잃어버린 사람은 ‘병신’이라고 한다. 따라서 엄격히 말해 병신은 정신적인 결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자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를 때 병신이라 칭한다. 원래의 뜻에서 보자면, 여기서 ‘모자라는 행동’이란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능력을 고려한 지적일 따름이지 정신적인 측면에는 하등 해당하는 바가 없다. 육체적인 기능에 아무런 결함이 없는데도 굳이 병신이라는 욕을 한다면, 육체에 한정되는 뜻의 범위를 정신까지 확장하여 비유적으로 끌어다 쓰는 경우일 것이다.

본래 병신이란 말이 육체에 속하는 낱말이라는 증거는 이 말이 물건에 쓰일 때 확연하게 드러난다.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문이나 한 짝이 없어진 양말, 꼭지가 떨어져 나간 뚜껑 등 어느 부분을 갖추지 못하여 쓸모없어진 물건을 가리켜 흔히 “그건 병신이 되어 버려 이젠 못 써”라고 말한다. 물건에는 지능 같은 정신적 능력이 없기에 병신은 될지언정 죽었다 깨어나도 바보는 되려야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다
앞에서 바보의 쓰임새를 실제적인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 두 가지로 제시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과연 일상생활에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의미로 바보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다시 말해 뇌의 장애 때문에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사람을 바보라고 공개적으로 일컫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병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권이나 차별 같은 개념이 없던 옛날이라면 몰라도, 바보나 병신이란 말을 원래의 뜻으로 입에 담는 일은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비유적인 의미라면 상황이 사뭇 다르다. “널 믿었던 내가 바보였어”, “이 바보야, 정신 차려”에서처럼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책망하는 진지한 쓰임새도 있는 한편, “울긴 왜 우니? 바보같이…”, “난 너 같은 바보가 좋아”에서처럼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긴 유쾌하고 귀여운 쓰임새도 친근하다. 나아가 ‘바보들의 행진’, ‘바보 선언’, ‘병신과 머저리’ 등 예술작품의 제목으로 쓰일 때는 사회적 환경이나 시대의 흐름에 닳거나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순박함, 혹은 상처나 아픔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기도 한다.

밥이라는 뿌리에서 가지를 친 낱말 가운데 밥만 축내는 한심한 족속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밥통’이나 ‘밥벌레’를 들 수 있다. 밥통이나 밥벌레도 바보와 뜻은 별다르지 않지만, ‘통’이나 ‘벌레’에 비하면 사람을 가리키는 ‘보’의 존재는 하늘과 땅만큼 차원이 다르다. 아마도 바보에서 인간미가 흠뻑 느껴지는 까닭은 ‘보’의 위력에 있지 않은가 한다.

바보와 영웅은 종이 한 장 차이
한반도에서 배출한 바보 가운데 가장 전형적이고 고전적이며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 역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전하는 온달이 아닐까 한다. 온달은 신분이 낮고 얼굴이 못생겼으며 눈먼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있는 가난한 청년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의 평가 기준은 똑같은 모양인지 별 볼일 없는 사내라는 이유로 고구려 사람들은 온달을 바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남들은 바보라고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평강공주는 온달이 착하고 성실하며 힘과 지략을 갖춘 남자라고 평가했다. 곁에서 아버지 평원왕이 갖은 말로 뜯어말리는데도 온달의 잠재 능력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고 기어이 온달에게 제 발로 시집을 갔다. 온달이 왜 하필이면 남들이 바보라고 부르는 내게 시집을 오려고 하느냐고 묻자 평강공주는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서방님이 왜 바보입니까? 바보라고 부르는 사람이 바보이지요. 늙으신 어머님 봉양 잘하고, 맡은 일 열심히 하고, 남 해롭게 하지 않는 착한 분이 왜 바보입니까?” 남들의 시선을 한칼에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평강공주의 심지가 굳었기에 온달은 바보에서 영웅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온달과 평강공주 부부의 꿋꿋한 모습에서 지능이 모자라고 어리석은 바보의 이미지를 발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이들 부부는 바보야말로 영웅의 또 다른 모습임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는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바보라고 놀려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남이야 뭐라 하든 말든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해 내는 온달과 평강공주야말로 바보와 영웅은 실로 종이 한 장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약에, 이런 바보들만 산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김경원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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