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김00 기자가 인터넷 ‘다음’에 발표한 “난 이렇게 아들의 ‘스펙 조작’에 가담했다”를 읽고 입학사정관에 대한 허와 실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듬어야 할지 곰곰하게 생각하게 됐다. 초창기라 시시비비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입학사정관제의 자기소개서 쓰는 자격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렇다고 검증을 거쳐서 제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엄연히 학생생활기록부가 학교에 있지만 학교에서 검증을 거쳐야만 제출할 수 있다는 조건은 없다. 학생이 쓴 자기소개서를 본인 외는 어느 누구도 검증을 할 수 없을뿐더러 증빙서를 제출해야 할 의무도 없다. 입학사정관 전형에 기록되어야 할 사항이 검증없이 제출되고, 근거도 없이 평가를 받게 됨으로써 제출자의 신뢰성에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고 대학에서도 기록된 내용만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시스템 자체에 한계를 지니고 있기에 스펙 조작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소리로 조작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문제는 더욱 오묘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성적이냐? 스펙이냐? 어느 것에 비중을 두고 학생을 선발할 것이냐도 문제인 것이다. 마땅히 대학에서는 스펙도 성적도 대학에 다 적절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각 대학 입학사정관제 전형에서 면접 점수는 어느 정도인가? 교과성적보다 면접점수가 더 높게 책정되고 있는 대학전형요강이 한 두 곳이 아니다. 성적이 좋지 않아도 스펙이 좋으면 선발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스펙이 좋아도 교과성적이 좋지 않으면 선발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참으로 알송달송한 전형요강을 읽고 있으면 높고도 높은 가을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꼴이 되고 만다. 오로지 기준점은 대학에 있기 때문이다. 선발 후에 학생이 떨어진 이유를 밝히는 경우가 없다. 그렇다고 선발된 학생이 선발된 이유를 밝히는 경우도 없다. 심지어 출석 점수도 없는 전문대학의 전형요강은 학생들의 탈법을 조장하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실기만 제일로 여기고 성적반영도 오묘하게 만들어 놓아 학생이 학교까지 공공연히 결석을 한다든가 병을 핑계삼아 조퇴를 하는 등의 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학원으로 개인 교습소로 달려가는 오늘의 입시제도를 어느 누가 바로잡아 만족을 줄 것인지도 요원하기만 하다.
입학사정관제 제출서류는 엄격하게 학교의 검증을 거쳐서 내야만 한다. 학생을 책임지고 있는 학교에서 학생이 공식적으로 제출하게 되는 자기소개서에 대한 최소한 객관적인 자료에 대한 검증도 없이 학생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 입학사정관제에 원서를 제출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생각의 여지가 있다. 학교에서 학생의 허위 사실을 고의적으로 묵인하여 학교의 명예를 더럽히거나 개인의 목표달성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오늘의 입시 작태에 대해서는 새로운 방어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학교에서는 학생을 더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하고 부모는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 부정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세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 사회의 계급서열주의가 만들어 내는 불평등사회의 본보기가 실은 학교에서부터 고쳐지지 않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학교는 학생이 사회에 나가서 잘 적응하기를 바라는 사회적응 예비교육기관이다. 지방대를 살리자는 슬로건이 나오면서 지방대생에게는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길도 터놓았다. 또 지방대생만을 위한 취업문도 열려 있다. 그렇지만 이것에 호응이 되어 지방대로 가겠다는 큰 움직임은 한강에 돌을 던지는 격에 지나지 않고 있다. 의식의 변화는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된다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정작 실업계고등학교를 지원하는 학생이 늘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왜 대학에 더 가기를 원하고 취업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결국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대학, 우수한 대학, 취업 잘 되는 학과 등을 찾아 헤매는 우리 사회의 입시품평회는 숨겨진 보물찾기 게임과 같아 보인다. 보물만 찾으면 다 된다는 사고의 틀은 마치 물활론적 사고의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가 아닌지 의심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