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학교 교사로 이 학교, 저 학교를 돌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자신도 모르게 거쳐간 학교에 대한 야릇한 특성이 행동으로 말로 무심코 보여진다. 그래서 마음에 인상적으로 남는 학교는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향기가 있기 마련이다.
학생들의 인사성이 너무 밝아서 그 학교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경우도 있고, 교장 선생님의 독특한 학교 경영 때문에 인상에 남을 때도 있다. 지금까지 뒤돌아 보아도 학교가 독특하게 나에게 이미지를 형성하였다고 할 만한 그런 학교는 많았지만, 나에게 이모티콘을 만들 기억으로는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유독 인천초은고에서는 전입해 온 교사에게 작은 장미꽃 화분을 주었다. 나는 이 꽃을 받는 순간 놀랐다. 이런 학교도 있는가? 소중하게 받아서 교무실 나의 책상 위에 놓고서 자주 물을 주면서 길렀다. 잘 자라 줄기가 뻗어서 책상 위로 덩굴을 만들기에 종이 막대를 만들어 펜스를 쳐 주었다. 그랬더니 또 꽃봉우리를 맺어 두 번째 꽃을 피웠다. 첫 번째 꽃을 피울 때는 당연히 한 번은 꽃을 피우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잎사귀도 떨어지면서 뻗어 올라가는 가지에 더욱 애정이 갔다. 두 송이 꽃봉우리가 이제는 네 송이 꽃봉우리를 형성하면서 탐스런 붉은 색깔을 활짝 선보였다. 교무실을 방문하는 선생님도 자주 눈길을 보내면서 장미에 대한 사랑을 이심전심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장미는 더욱 수줍은 듯 봉우리를 살짝 숙이고 밤이면 몰래 얼굴을 들어 고운 얼굴로 단장하고 아침이면 나에게 붉게 웃고 있는 해맑은 모습이 지각을 하여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는 여학생과 같아 보인다.
360도로 허리를 구부리면서 사방으로 방향을 틀 수 있는 몸의 자태는 그 유연함이 매력적이다. 아름다운 꽃이기에 그 꽃의 미를 지키기 위해 가시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붉게 칠한 립스틱인 양, 진한 향기가 아니어서 탄성을 자아낼 만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잘 것 없어 외면할 대상도 아니다. 연약한 가지에 꽃을 피운 그 생명의 신비에 더욱 탄성을 내보이고 싶은 생각이 언뜻언뜻 솟아나는 것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라고픈 그 의지를 동경하기 때문이다.
꽃을 피워 자신을 빛내고 그러면서 남을 아름답게 만들어 내는 미장원 미용사처럼 언제나 그 고운 자태를 잃지 않으려고 자신을 가꾸고 자신을 바꾸는 모습은 관찰자인 나로서도 배워야 할 지혜의 줄기인 것 같았다. 가지를 뻗어 어디를 갈 것인지도 모르면서 그러면서 쑥쑥 뻗어 가느다란 다리를 미인의 다리인 양 자랑이라도 하기 위한 안간힘이라고 해야 할까?
아침에 와서 저녁 늦게까지 눈마춤을 쉼없이 계속하는 속에서 장미와 나는 같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있는 ‘저만치’ 라는 김소월의 ‘산유화’를 연상케 한다. 산에 들에 자유롭게 늘어져 지라고 있었다면 바람을 맞고 비를 거름삼고 벌과 새를 친구삼아 음풍농월을 즐기는 자연인으로서의 호연지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인데도 네모진 교무실 좁다란 틀에서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고 학생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귀동냥하면서 자라기에 세속에 오염되지 않고 맑은 물 깨끗한 음료수를 마시기에 피어나는 꽃봉우리 더욱 참신함을 준다.
새와 벌과 꽃친구 없이 고고함을 지켜가는 외로운 처지일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더욱 넓혀가려는 성장의 힘은 다른 어느 꽃보다 더 빨리 꽃을 피우고 더 빨리 줄기를 벌리어 친족의 울을 만들어 간다. 어린 장미를 보고 있기에 영욕을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작은 화분에서 자신의 본분을 지켜 가면서 아름다운 고운 꽃을 피워 향기 아닌 향기를 품어 내려는 것이 서투른 어린 광대의 묘기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데도 그 나름의 소박함이 나에게 매력으로 이끌리는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