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더위를 피해 뒷산 나무 밑에 앉아 인천공항 고속도로를 내려다 본다. 그리고 좁은 들녘도 시야에 펼쳐진다. 오가는 차량들을 바라보면서 어제와 오늘의 도로를 연상해 본다. 흙도로에서 아스팔트로 변하는 인간의 창조적인 경영철학이 달리는 자동차처럼 무서운 속도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들녘에 자라는 곡식도 마찬가지다. 자연에 의지해 자라던 작물도 이제는 온실에서 자라면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기에 예전에는 계절에 맞는 과일을 제철이 돼야 먹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계절에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나 과일을 먹는 창조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모색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교육이 그 중심에 있다. 그러기에 교육은 끝없는 창조의 상품을 만들기 위한 실험단계이자 인간 성숙도를 측정해 가는 바로미터인 것이다.
루소가 그의 저서 '에밀'에서 인간의 본질 교육을 강조했다. 인위적인 교육보다 자연 그대로 타고난 소질을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에 교육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스탈로치는 노작교육을 강조했다. 어느 학자의 견해가 오늘날 더 잘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두 학자의 의견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귀 기울려야 할 대목임에는 분명하다. 인간 교육의 두 가지 면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교육은 분명 두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자명하다. 현장을 지켜가는 교사 입장에서 보아도 우수한 학생에게는 루소의 이론이 더 잘 어울리고 학습이 부족한 학생에게는 페스탈로치의 이론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고교 현실의 틈새 교육을 엿들어 보자.
인문 교육이 추구하고 있는 방향은 어떠한가. 실업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인문과 실업 교육의 양면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끌어 가느냐가 국가 대계를 위해서는 바람직하겠으나 인문 교육이 실업 교육의 서자 노릇을 하고 있다면 인문교육은 바람직한 방향에서 새로운 인간형 창조는 어려운 것이다.
실업 교육의 대리 역할을 하면서 진정한 인문 교육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하는 면이 있겠지만, 실업 교육을 받아야 할 학생이 인문 교육의 터전에서 방황하고 학업에 회의를 느껴 친구와 교사와 자신에게 해를 가한다면 인문 교육의 틈새는 이미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지방 대학에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이 채워주지 못하면 대학 운영에 어려움이 올 정도라면 그것이 과연 바른 교육의 터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업 교육도 흔들리고 대학교육도 흔들리면 교육의 창조는 어디에서 만들어야 할까? 흔들리지 않는 일부 학교에서만 창조 교육을 만들어 가면 그만일까? 이는 약육강식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 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교육이 창조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은 교육을 받는 자의 터전이 안정화돼야 하고, 안정된 자기 기반 위에서 배움의 길을 추구할 때 가르치는 자 또한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창조교육을 외치면서 학교 기반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혼란의 가속도를 밟아 간다면 학교 교육은 갈등의 회오리 속에서 시간의 긴 장마를 맞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