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실화, 치명적인 사랑. <블랙북>

2007.08.04 14:57:00

- <영화평> 폴 버호벤의 블랙북을 보고

'블랙'이란 말은 군사 정보 계통에서 자주 쓰는 말 중의 하나이다. 블랙박스는 항공기의 모든 비행 정보를 담은 상자를 말한다. 비행기가 추락할 시 가장 먼저 회수하는 것이 블랙박스다.

그리고 미국을 위시한 핵 강대국의 정상 옆에는 핵미사일 발사에 필요한 암호를 담은 검은 가방이 항상 따라다닌다. 이른바 '핵 가방'이다. 또 국가의 1급 정보를 담고 있는 책자를 '블랙북'이라고 부른다. 블랙북에는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정보가 담겨 있다. 블랙북에는 음모와 거짓, 진실이 함께 담겨 있다. 그 내용이 공개되면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주는 판도라의 상자인 셈이다.

영화 <블랙 북>은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엄혹한 상황 하에서 벌어지는 공작과 거짓, 진실을 다룬 영화이다. 유대인 출신의 여자 스파이가 전쟁이라는 상황 하에서 가족과 조국, 사랑의 계곡을 위험스레 넘나드는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원초적 본능으로 유명한 폴 버호벤 감독의 원숙미와 예술적 감각, 기막힌 스토리 전개 등이 너무나 돋보이는 영화가 바로 <블랙북>이다.




<블랙북>에는 네 가지 이야기 구조가 거미줄처럼 완벽하게 짜여 있다. 영화의 퍼스트 시퀀스는 이스라엘에서 학생들을 가리키는 레이첼(캐리스 밴 허슨 분)이 로니를 우연히 만나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레이첼이 여전히 전쟁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샌드위치 회상기법으로 처리된 장면들이다. 네 가지 이야기 구조는 그녀의 회상 안에 중첩된 채로 하나씩 흘러나온다.

첫 번째 이야기는 그녀가 스파이로 나서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녀의 가족은 독일군의 탄압을 피해 이웃나라로 탈출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독일군에 의해 살해당한다. 바다로 뛰어들어 목숨을 유지하게 된 레이첼. 엄청난 비극을 목도한 레이첼은 생존을 위해 '앨리스'라는 제2의 인생을 살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는 SS장교 문츠와 그녀의 사랑 이야기이다. 레지스탕스와 접촉한 앨리스는 문츠의 사무실에 스파이로 잠입한다. 지도부의 지시로 도청장치를 설치한 앨리스. 그러나 그녀의 행각은 문츠에게 발각된다.

로맨티시스트자 유약한 심성의 문츠는 스파이인 그녀를 처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앨리스 역시 문츠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속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 곁에는 그들의 사랑을 질투하는 레지스탕스 한스가 있었다. 여자 스파이와 사랑에 빠진 독일군 장교! 그 엄청난 역설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게 된다.

세 번째 이야기는 음모에 휩싸여 엄청난 시련을 맞게 되는 레이첼의 이야기이다. 도청 장치를 역이용하여 구출작전을 펼치는 레지스탕스들을 소탕하는 독일군. 또 그 도청장치에 의해 모든 공작을 꾸민 이중 스파이로 낙인찍히게 된 레이첼. 레지스탕스 지도부는 그녀를 반드시 살해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네 번째 이야기는 음모의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출작전의 와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스는 어느새 전쟁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스야 말로 독일군 장교와 내통한 이중 스파이였다.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기막힌 반전! 유대인을 도와주었던 변호사가 실은 독일군 장교의 끄나풀이었으며, 그가 소지한 '블랙북'에는 한스와 독일군의 거래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블랙북의 존재를 연합군에게 알려 죽음을 모면한 레이첼. 여태껏 그녀를 옭아매던 모든 상황이 일거에 해소되기 시작했다. 한스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고, 그는 관 안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배신자에서 피해자로, 영웅에서 배신자로, 거짓투성이 상황에서 진실의 마당으로 상황이 완전히 변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대단한 스토리 전개였다. 더군다나 이 모든 것이 실화에 근거했다는 사실은 경외감과 신비감을 동시에 안겨줬다. 그리고 엄청난 재미도 선사했다. 역시 거장의 힘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영화 <블랙북>의 가장 큰 장점은 탄탄한 시나리오 전개였다. 원초적 본능에서 느낀 감동이 되살아나올 정도로 스토리텔링의 조화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한마디로 추리와 역사, 로맨스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어 무대에 올려진 퍼포먼스였다.

왜 이리도 잘 구성되었을까? 이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폴 버호벤은 40년 동안 작성된 700개의 자료를 샅샅이 조사했단다. 그리고 20년 동안이나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시나리오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단다. 결국 실화라는 역사성을 살리기 위한 그의 노력이 감동을 주는 가장 큰 힘이었던 것이다.




<블랙북>을 가치 있게 만든 또 하나의 인물은 단연 주연배우 캐리스 밴 허슨이었다. 그녀는 뭇 남성을 유혹하는 팜므파탈의 완벽성을 소화해 냈다. 또 문츠와의 사랑에선 매력적인 멜로 연기를 선보였고, 구출작전 장면에선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전사의 액션을 선보였다. 그리고 똥물을 뒤집어쓰는 처절한 수난 장면도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캐리스는 이 영화를 위해 댄스와 노래, 독일어를 완벽하게 연습했다고 한다. 폴 버호벤 감독은 그런 그녀를 샤론 스톤에 버금가는 여우라고 극찬했다. 캐리스는 <블랙북>을 재미있으면서도 볼 만한 영화로 만든 히로인인 것이다.

일견 <블랙북>은 비판받을 소지도 다분히 있다. 2차 세계 대전을 영화의 소재로 활용한 것은 다소 고답적인 측면도 준다. 게다가 적군의 스파이와 사랑에 빠진 남성 장교의 불우한 결말은 진부한 소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버호벤 감독은 진부하게 전개될 이야기를 완벽한 시나리오와 주연 배우의 적절한 캐스팅으로 가치 있는 영화로 만들었다.

뭔가 엉성한 듯한 이야기 구조가 흑백과 칼라 화면의 적절한 배치와 어울려 최대의 효율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다만, 영화의 주인공을 유대인으로 설정하여 그들이 수난받는 민족임을 은근히 암시한 것은 사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블랙북>은 시나리오의 높은 완성도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래서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안겨준 영화가 되었다.
김대갑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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