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억총참회’의 진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쇼와천황이 옥음(玉音)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고 일컬어지는 <대동아전쟁 종결에 관한 조서(大東亞戰爭終結ノ詔書)>는 간략하게 <종전의 조서>라 부르는데, 여기에서도 전쟁이 끝났다는 상황을 강조하는 ‘종결’과 ‘종전’이라는 말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일본에서는 일본 국민 모두가 전쟁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잘못을 빌어야 한다는 뜻의 ‘일억총참회’라는 말이 크게 유행했다. ‘일억총참회’는 그야말로 ‘참회’를 호소하는 구호이기에 진정 과오를 시인하고 머리 숙여 잘못을 비는 뜻이라고 넘겨듣기 쉽지만, 실은 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말이다. 전쟁 책임의 소재를 모호하게 만드는 ‘종전’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총참회’는 책임의 주체나 소재를 얼버무린다는 혐의가 짙다. 스스로의 책임을 명확하게 밝혀야 할 일본 제국의 최고 통치권자가 일본 국민이라는 집단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결국은 모두의 잘못’이라고 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더욱 꺼림칙한 것은 ‘1억’이라는 숫자다. 어째서 1억이란 말인가? 1억은 당시 일본의 인구 7천만에 식민지 조선 및 대만의 인구를 대략 합한 숫자였으며 제국 신민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용어였다. ‘패전’을 시인하고 제국의 해체를 선언하는 천황의 기념비적 발언에서 1억이란 숫자가 튀어나왔다는 정황은 어쩐지 아시아를 넘보던 침략주의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여전히 제국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일본의 모습을 내비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식민지의 해방이라는 현실을 철저히 의식했던들 1억이란 숫자가 절로 튀어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넓은 시야에서 역사를 되짚어볼 때 아시아에서 무력 침략을 자행한 일본만 참회를 해야 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들은 피해자일 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독단적인 발상이다. 그들 또한 복잡한 역사적 문제를 떠안고 있으며 개중에는 참회를 해야 할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일억총참회’는 성질이 다른 문제다. 일본의 천황이 자신이 침략한 나라들의 참회까지 운운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어불성설일 테니 말이다.
전쟁 책임과 천황제
일본의 어떤 학자가 한 페이지도 안 되는 <종전조서>를 한 권의 책으로 분석해 내놓은 적이 있다(<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天皇の玉音放送)>, <뿌리와 이파리>, 2004). 이 책에 따르면 천황이 읽어 내려간 <종전조서> 어디에서도 ‘패전’이나 ‘전쟁 책임’ 같은 말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불철저한 역사인식의 태도가 비판받거나 불식되기는커녕 오늘날까지 일본 사회를 지배하고 있게 된 것은 미국의 탓이 크다.
2차 대전 이후 세계가 냉전체제로 돌입하면서 미국이 일본을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방어하는 ‘장벽’으로서 삼으면서 일본에서는 전쟁 책임을 비롯한 민주화의 추진보다 경제부흥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일본이 미국의 파트너로 당첨되었기에 유럽에서는 패전국인 독일이 분단의 시련을 맞이한 반면,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아닌 한반도가 분단의 운명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의 천황제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전후 일본의 질서 회복과 안정을 위해 천황제 및 천황의 존속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미국은 일본의 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천황제의 성격을 바꾸어 온존시키기로 한다. 이로써 일본은 1946년 1월, 현인신(現人神)으로 신격화되었던 천황에 대해 ‘인간선언’을 하고 민주주의 체제의 출범을 서둘렀다. 결국 천황제를 온존시키면서 일본을 근대국가로서 새롭게 건설하고자 한 미국과 그에 동조한 일본의 지배층 덕분에 천황은 마치 식민지 침략전쟁에 책임이 없는 것처럼 꾸며졌다. 이렇게 하여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전후 처리가 미일합작에 의해 완성을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해마다 되풀이되는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둘러싼 소동을 비롯하여 평화헌법 제9조 개정 문제, 일본의 교과서 문제 등 일본이 마치 전쟁의 망령을 다시 불러들이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원인을 이러한 전후 처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천황제를 문제 삼는 일을 금기로 여기는 정치적 풍토와 사상적 배경은 여전히 일본의 지성을 속박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일본의 학자나 시민들 가운데는 지배계층에 의한 부조리한 전쟁 책임 및 과거 청산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이 적지 않다. 침략전쟁의 길을 막지 못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동안 총력전체제에 협력하면서 하루하루 목숨을 연장해 온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고백과 증언, 연구와 모색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아시아 나라들이 전쟁 책임 문제를 함께 풀어가기 위해서는 일본의 비판세력과 연대를 강화하는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천황제를 둘러싼 일본의 정신구조를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종식’, 그러나 끝나지 않은 전쟁
최근 한국의 소위 뉴라이트가 내놓은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교과서포럼 지음, 기파랑, 2008)가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과연 이 책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에 관해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까.
그런데 한국의 조기 독립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던 미국은 전쟁이 종식된 이후 한국에 대한 국제적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방침을 이미 내부적으로 결정해 놓고 있었다. (두 줄 중략) 이로써 8년간 지속된 중일·태평양전쟁이 종식되었을 뿐 아니라, 35년 가까이 일제 식민지였던 한국이 마침내 해방되었다.
위의 인용문에서 ‘종식’이라는 단어가 연거푸 쓰인 것이 눈에 띈다. 끝 또는 끝남/끝냄을 나타내는 말에는 ‘종결(終結)’, ‘종말(終末)’, ‘종언(終焉)’도 있고 ‘끝났다’는 무난한 동사도 있는데, 어째서 굳이 ‘종식’이란 말을 두 번이나 쓴 것일까. ‘종식’은 사전적으로 “(어떤 현상이나 일이) 끝나거나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종식’의 뉘앙스에 결정적인 요소는 ‘끝, 끝나다, 끝내다, 마치다, 마침내’의 의미를 담고 있는 ‘종(終)’보다는 ‘불이 꺼지다, 사라지다’를 뜻하는 ‘식(熄)’인 듯하다. 요컨대 그냥 끝난다기보다는 불씨마저 제거하여 ‘끝(장)을 낸다’는 느낌이 강하다.
민족주의적인 감정에 기대어 보자면 해방이란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민족의 ‘빛’을 다시 찾은(광복) 기쁜 사건이긴 하지만, ‘우리’ 손으로 쟁취한 해방은 못 된다는 점에서 마음이 개운하지 못하다. 여기서 좌파적이고 민족 중심적인 역사관의 극복을 내세우는 뉴라이트의 ‘중립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 민족’이 어떻게 생각하든 해방은 단지 전쟁의 ‘종식’이 가져다준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친일인명사전>을 둘러싼 소동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한국의 식민잔재 청산 역시 일본의 전후 처리와 마찬가지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해방 후 한국에서는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소위 친일파였던 관료나 경찰이 다시 기용되는가 하면 국회의 반민특위가 좌절되었다. 친일파라는 식민잔재의 청산이 이루어지기는커녕 그들이 대한민국 체제의 기득권자로 재등장한 역사를 돌이켜볼 때, 안타깝게도 ‘종식’이라는 말은 전쟁의 후유증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는 반어적인 뜻을 뿜어내는 듯하다.
‘패전’과 ‘종전’의 부단한 갈등은 단순한 말싸움도, 과거에만 얽매이는 태도도 아니다. 과거는 단순한 과거로 끝나지 않으며, 오히려 현재를 ‘살아 있는 과거’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바람직한 미래의 건설을 위해서는 과거를 올바르게 정리하는 일이 개인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종군위안부를 둘러싼 일본 정부의 자세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아시아를 침략한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결과는 오늘날 중국, 한국 등 이웃나라의 불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역사적 사실마저도 부인하는 일본의 극우 내셔널리즘이 목소리를 높이면 중국과 한국의 편협한 내셔널리즘이 맞불을 놓는다. 이러한 불행한 순환구조를 벗어나려면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지구사적 역사인식’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