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실크로드를 따라서-중국 실크로드 문화 체험

2006.12.21 11:48:00

여행계획은 6개월 전부터 이신성교수, 정현량 총무의 주도하에 계획되었고, 3개월전 2개월전 1개월전 보름전 1주일전 해야할 일들이 순서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답사지 사전정보수집, 여행자 확정, 여행코스 추가 및 삭제, 여권 비자 발급, 환전, 사전 준비물 챙기기 등을 “인생은 여행이다”라는 카페를 통해 정보 교환을 했다. 출발 보름전(7월11일)에는 연제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금오갈비 집에 모여 최종 점검과 단합대회를 가졌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사람은 모두 12명, 중국 현지에서 합류하는 사람2명 총 14명이었다. 구성원은 교수2명(이신성,서성) 교감1명(석강영) 교사8명(박계숙,이정신,김경희,오성기,박영희,정현량,김영옥,강주석), 일반인1명(박현숙) 학생2명(서진영,이은영)이고 연령 대는 50대 7명, 40대 5명, 20대 2명이며 남자 5명 여자 9명이었다.

여러 차례 중국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이 대부분이고 4명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유럽여행 등 외국여행의 경험이 많은 분들이라 서로의 의사소통이 쉬웠다. 여행의 고통을 다 잘 알고 있는 지라 사전에 체력 증진을 위해서 각자 부단히 노력했다. 한두 달 전부터 달리기, 걷기, 등산하기, 보약먹기, 점심시간 땡볕에 운동장 돌기 등을 통하여 현지 적응 능력을 키웠다.

항상 우리 집단의 여행코스는 편안하게 즐기는 것보다 중국 소수민족의 생활상, 변방지역의 역사 문화 체득에 있기 때문에, 단순한 여행의 즐거움보다는 뭔가 많이 배우려는 학구열에 불탄다. 시간상 강행군이라 체력상 약간의 두려움도 있다.

나는 1997년 여름에 29일 동안 중국 상해, 항주, 소흥, 복주, 황산, 무이산, 운남성, 곤명, 쓰쌍판나, 경홍, 미얀마 관람 , 2002년 겨울에는 12일 동안 계림, 장강삼협, 장가계, 중경, 성도를 다녀왔고 이번 여행은 20일 동안 대서부 실크로드길을 가게 되었다. 일정별로 목적지별로 편의에 따라 여행기를 기록해 보고자 한다.

2004. 07. 27. 화요일. 맑음.
(가자! 실크로드로, 상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행 출발일이다.
06:00 기상하여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08:30 3일 동안 필요한 물건을 잘 챙겨 넣은 배낭을 메고 집을 나가, 함께 공항으로 가기로 한 강주석선생님의 차를 주공아파트 농협 앞에서 기다렸다. 정해진 시간에 빨간 승용차가 멈춰섰다. 서울에서 어제 저녁 비행기로 부산에 도착하여 강선생님 댁에서 주무신 서성교수님도 함께 타고 있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우리들은 공항으로 달렸다. 우리 일행은 김해국제공항 약국 앞에서 10:00에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09:50 공항 약국에 도착하니 전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권을 거두고 공항세납부 출국신고서 작성, 짐 탁송하고 비행기표 체킹하고 재미있게 수속을 밟았다. 핸드폰도 중국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이동통신센터에 가서 국제로밍했다. 전화요금은 분당 국제통화 1800원 중국내에서의 상호전화통화 500원정도 나온다고 직원이 일러주었다. 만약의 위험한 사태를 대비하여 핸드폰을 중국에서도 계속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여행의 시작이라 행동이 민첩했다. 여행 하반기에 가면 힘이 쭉 빠져 굉장히 느릴텐데......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상기된 얼굴로 서로 여행이야기를 즐겁게 나누고 있었지만 앞으로 다가올 각종 일들에 대해 약간의 불안감도 엿보였다.

12:00 비행기 탑승이 시작되었다. 중국 민항기였는데 지난번 여행 때보다 훨씬 크고 좋았다. 마침 좌석이 창가에 배정되어 밖이 잘 보였다.

12:35 드디어 김해공항을 이륙했다. 비행기 창문 밖의 띄엄띄엄 구름과 저 아래에 펼쳐진 푸른색 바다가 인상적이었다. 비행기 내에서 기내식으로 점심을 먹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벌써 중국 상해 푸동 홍교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부산에서 상해 푸동공항까지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되었다. 푸동 홍교공항은 2001년 새로 축조했는데 규모가 웅장했다. 우리 인천 공항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13:45 푸동 홍교공항에 도착하여 즉시 시차관계를 적용하여 내 시계를 1시간 뒤로 돌렸다. 우리 일행은 다음 이동지로 가기위해 기차를 타야한다. 그 시간에 늦을까봐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황급히 짐을 찾으러 나오니 벌써 화물이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어? 예상보다는 뭐가 잘 풀리는데... 아무 이상 없이 전부 짐을 다 찾았다. 전에는 일행 중에서 짐이 하나 없고, 가방 끈이 떨어져 변상 조치 받고 해서 시간이 너무나 지체되었었는데 이번에는 그냥 술. 술.술이라 기분이 좋았다.

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이교수님과 사모님을 반갑게 만났다. 1년만의 상봉이라 반가웠다. 상해 근처 항주에서 1년 동안 연구교수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우리들과 함께 여행을 한 후 귀국하게 된다. 다음 일정은 짐을 전세미니버스에 옮겨 싣고 푸동공항에서 상해 기차역으로 가는 것이다. 공항을 출발하여 1시간30분 가량 이동하는 도중에 상해 푸동지구의 웅장한 건축 모습과 새로 짓고 있는 주택, 빌딩들을 바라보니 방송으로만 접했던 것보다 훨씬 변화가 크다는 것이 느껴졌다.

15:00 상해역에 도착하여 난주행 기차표를 인수받고 대합실에서 기다렸다. 우리 일행은 상해에서 16:43분발 난주행 열차를 반드시 타야하고, 가다가 천수역에서 내려야 한다. 중국 여행에서 정해진 열차표를 구하기가 어렵고 열차를 놓치면 다음여행은 영 엉망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열차 출발 시각에 민감하다. 상해역 대합실은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다. 의자에 길게 늘어져 자는 여자분, 웃통을 벗고 덥다고 헉헉대는 남자분, 사람은 벅적 와글, 에어콘은 틀었는지 말았는지? 더운 기운에 우리들은 창문 밖만 바라볼 뿐이다. 무척 덥다.

16:20 드디어 개찰이 시작되었다. 짐 검색대에 배낭을 올리고 검색을 받아야 통과한다. 공항이 아니고 기차역인데도 불구하고 중국 기차역은 짐을 검색 받는다. 열차의 상황은 잉워 3층 침대칸, 한 칸에 66명 정원, 특쾌차이다. 14명이 역 선방에 짐을 올리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약간 휴식을 취했다.

19:00 가져간 김밥으로 저녁을 먹었는데 참 맛있었다. 중국은 열차 안에 항상 뜨거운 물이 있기 때문에 식사관계를 해결하기가 좋다. 라면, 죽, 커피, 등 뜨거운 물이 필요하면 항시 가져오면 된다.

22:00 전부 실내등이 소등되었다. 갑자기 불을 끄니까 깜깜하였지만 피곤끼도 있고 해서 침대에 누워 곤한 잠에 빠졌다.

** 잠을 자는 동안 기차는 계속 달려 중간에 남경역을 지나고 정주역을 통과 하였다.
서안역을 향해 기차는 외롭게 쓸쓸하게 홀로 밤길을 칙칙 폭폭, 폭폭 칙칙 .......

2004. 07. 28. 수요일. 구름 약간.
(천수, 복희묘, 남곽사)

08:00 잠결에 열차가 멈춰 서는 느낌이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서안역에 도착하였다. 얼른 카메라를 들고 내려서는 서안역사 사진을 찍었다. 방문 기념으로 어디에 가나 그곳 지명이 있는 표시판을 등지고 증거를 남겨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사진을 보고 어디인지 알 수가 있지 아니면 헷갈려서 구별을 할 수 없다.

해가 떴나 했더니 화장실 쪽이 부산하다. 화장실과 세면실이 거의 붙어 있어 이 부근은 항상 법석통이다. 아침에는 누구나 한번은 화장실을 가고 세수하거나 이를 닦고 심지어 식사준비나 설거지도 이곳에서 해결해야 하니까.....

기차안은 상하 한 줄 3명이 3층 칸에 각각 나뉘어 잘 수 있고 기차 한 량에는 총 66명이 정원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하(下)칸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을 수도 있고 서로 얘기하거나 간식을 먹고 생활을 하도록 낮에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해가 지면 저마다 자리 주인들이 누울 수 있는데 중이나 상(上)칸은 앉기에는 좀 힘들어 구부려 있거나 누워서 아래쪽을 보며 얘기하는데 상은 아무래도 힘이 드는 자리인지라 요금 또한 다르다. 하칸이 가장 비싸고 그 다음이 중, 상은 가장 싸다. 비용은 총 금액의 5%정도 차이가 나는 셈이다. 말 안해도 연장자가 하칸을, 그리고 남자이거나 젊은 쪽이 상칸을 차지하게 되었다. 중칸은 엎드려서 밖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이점이 있고 낮이나 밤이나 누워 있기에는 좋다.

아침은 한국에서 가져간 라면으로 간단히 대신 했다. 교수님 내외분이 항주에서 준비한 죽은 즉석죽이고 이름은 가화(嘉禾)죽인데 나중에 먹으려고 아꼈다. 일행이 가져간 라면, 죽, 고추장, 된장, 멸치볶음, 김치조림, 마늘, 과자 등은 되도록 열차 안에서 계획적으로 먹어야 한다. 부피 나가는 것부터 먹어치워야 가지고 다니기에 불편함이 감소된다.

다음 도착지인 천수(天水)라는 도시가 무지 기다려졌다. 바깥 풍경은 아직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옥수수랑 여러 야채가 심겨져 있는 들판, 벽돌과 흙으로 지은 집, 철길 옆의 약간은 꾀죄죄하게 보이는 살림살이들은 우리네 시골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보이는 벌판이 아주 널찍하다는 것 빼고......

상해에서 천수까지는 약 21시간 기차를 타고가야 한다. 처음에는 차창 밖을 내다보고 신기해하기도 하고 준비된 자료집을 읽기도 하고 열심히 연구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약간 무료하게 펼쳐지는 풍경이라 또 다른 재미거리를 찾게된다. 이정신, 나, 중국여자 3명의 화투놀이가 1층 침대에서 시작되었다. 화투는 필수적으로 2모 이상 가져간다. 중국에는 그림엽서(화투) 안 판다. 중국 여자분을 가르쳐 가면서 못하는 중국어 섞어가면서 1시간 정도 놀았다. 포카를 하자고 중국인이 제의했고, 막상 해보니 규칙상 약간의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그만 두었다.

그동안, 교수님은 이번에 같이 여행을 하기로 했다가 얼마 전에 부친상을 당하여 참가 못한 북경거주 교포 2세 장문천 사장과 계속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장사장은 북경에서 큰 음식점을 9개 운영하고 상해에도 1개 소유하고 있고, 또 작은 여행사도 운영하는 모범적인 한국인 2세다. 연령은 40대 초반. 같이 못 간다는 통보가 왔을 때 나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없으면 불편한데........

* 중국의 성급(省級) 직할시는 북경, 상해, 천진, 중경 4군데로 이들 4도시는 성(省)과 같은 등급의 행정구역이다. 천수는 감숙성 안에 있는데,, 감숙성은 '직접 관할하는 도시'라는 뜻으로 '성직할시'이다. 또 감숙성의 성도는(省都) 난주이다.
중국에서는 산동성, 감숙성 등 '성'으로 끝나는 성급 행정구역의 중심도시는 '성회'(省會)라 하고, 신강위구르자치구, 내몽골자치구 등 자치구로 끝나는 성급 행정구역의 중심도시는 '수부'(首府)라고 구별하여 부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들을 모두 '성도'라고 부르면 된다.

우리가 내리려는 첫 고장인 천수(天水)는 감숙성(甘肅省)의 성직할시다. 우리 나라로 말하면 부산광역시쯤 되는 셈이다. 감숙성 자체도 처음으로 와보는 고장이거니와 천수라는 도시는 이번 여행 전에는 몰랐던 곳이다. 중국하면 북경이나 상해, 아름다운 항주나 소주, 더워서 끓는다는 남경과 중경, 무석 그리고 계림과 장가계, 백두산 주변 조선족이 사는 동북 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그리고 장강 주변의 의창이나 성도 정도가 떠올랐는데 천수는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천수는 다섯가지 문화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94년 중국 국가 역사문화도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진(秦)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고, 삼국시대의 문화, 복희(伏羲)와 여와의 문화, 석굴문화 그리고 신석기문화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들 중 신석기문화는 보지 못하지만 다른 문화들은 서로 약간씩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기에 두루 살펴보게 된다.

12:30 천수역에 닿았다. 21시간 동안 열차는 쉼 없이 달려왔다. 천수역 바로 옆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기차역 안에서 가벼운 식사를 한 관계로 배가 많이 고팠다. 오후에 약간의 여유시간이 있다. 여러 선생님들은 오후 시간을 값있게 쓰자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고 복희묘(伏犧墓)와 남곽사(南郭寺), 도교사원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3황(皇) 5제(帝) 시대의 주인공 복희씨는 서성 교수의 알찬 설명으로 자세히 알게 되었고 전설이나 신화 속에만 존재하는 줄만 알았는데 사당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복희와 여와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몸은 뱀의 그것을 닮아 둘이 서로 꼬여 있는 형상으로 많이 보았는데, 복희는 우주 만물의 8괘를, 여와는 인간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고우영의 만화속에는 여와가 인간을 만들 때 진흙으로 사람 비슷하게 만들다가 나중에 지겨워져서 아예 새끼를 진흙 속에 담그고 돌려 공중으로 튀는 물방울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인간의 대량 생산이 시작됐다나 뭐라나....서양 사람들이 죽어라고 믿는 성경에도 인간은 흙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일맥 상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14:00 복희묘 도착, 복희묘에는 복희의 채색 소상이 만들어져 있고 그가 처음 만들었다는 8괘가 천장 가득 붙어 있었으며 바둑판처럼 생긴 돌판 위에 바둑돌처럼 생긴 둥근 알을 그려 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8괘를 나타낸 것이라 한다. 제일 재미있는 것은 마당에 있는 큰 나무에 붉은 색으로 뭔가를 잔뜩 붙여 놓은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형상을 한 종이였다. 이곳에 자기처럼 생긴 붉은 종이 인형을 붙이고 향을 피우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중국 사람들은 꼭 그렇게 한다고 한다.

15:30 남곽사 도착, 남곽사는 천수시의 남쪽 성곽에 있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언덕 꼭대기에 있어 천수 시내가 훤히 보이고 전망이 좋았는데 이곳에는 무려 2500년이 된 측백나무가 있어 사람들이 그 나무를 보러 온다고 한다. 나무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비석 위를 지나 허공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나무의 생명에 돌비석도 손을 들었는지 나무 살 속에 박혀 처연히 기둥 역할을 하는 게 안쓰러울 정도다.

뜰 저편으로 가니 그리운 조각상이 있었다. 시성(詩聖) 두보였다. 성도에서 두보초당을 둘러보며 성도에 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다시 두보를 만나게 되었다.
17:30 도교사원에 도착. 입구에 까지 갔으나 진입로 포장공사로 800m 앞에서 방향을 돌려 호텔로 향하였다. 너무 많이 관람했다.

19:30 호텔에서 각 방을 배정 받고 좀 쉬다가 호텔 이층에 마련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매뉴는 밥, 탕, 버섯, 야채볶음, 돼지고기조림, 콩볶음 등,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먹는 정찬인 셈이다.

20:30 호텔에서 총무가 천수유람 소요경비 1인당 1000원씩 갹출,
우리 가이드(초급) 㺬曉燕(13109376714- 地址(집): 蘭舟市 東崗西路 449号 : 地址(회사)中國 甘肅中信旅行社有限公司, 郵便730000)은 날씬하고 눈이 큰아가씨로 귀엽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눈치 빠른 면도 있어 서교수님의 통역과 호흡이 척척 맞았다. 숙소는 깨끗하고 조용했다. 천수에서의 밤을 그냥 보내기에는 아깝고, 낯선 도시 밤거리를 활보해 보겠다는 뻐기는 기분으로 일행 모두 밤거리로 나섰다.
먼저 호텔 뒤를 돌아 야시장을 찾아갔다. 큰 거리 하나가 차도 다니지 않는 쇼핑구역으로 정해져 있었고 벽에는 중국어린이들의 벽화로 가득했다. 갑작스런 정전으로 왼쪽 거리가 깜깜해졌다. 중국은 요새 전력 난을 겪고 있다더니 정말 그랬다. 불이 켜졌다 꺼졌다 몇 번 반복하고 나서는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오른쪽 상점들은 또 괜찮았다. 아마 다른 전신주를 쓰나보다.
야시장은 입구부터 끝까지 먹는 장사였다. 양고기꼬치구이와 빵 속에 끼워먹는 돼지고기, 만두피에 싸 먹는 각종 야채들, 게다가 즉석 국수 같은 면류....하여간 먹는 것 또 먹는 요리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불빛은 희미하고 요리하는 사람은 추하고 도저히 위생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쪽에는 포켓볼이랑 간이 당구대가 몇 십대 연달아 있었다. 이게 왠 일? 길거리 엉성한 당구대에 나이도 관계없이 작은 소년부터 할아버지까지 당구대를 들고 엎드려 있다. 자세히 보니 간이 당구대에는 수레바퀴가 달려 언제고 끌고 갈 수 있게 만들어졌다. 수평을 잡으려고 해도 힘들고 당구대 건사하기도 어려울 텐데......중국 사람들은 참 당구를 좋아하는 것 같다.

시장 끄트머리에 과일가게가 여러 개 있었다. 내일은 종일 버스를 타니 복숭아(칼이 없어도 껍질이 잘 벗겨지며 말랑 말랑함)와 여지(양귀비가 매우 좋아했다고 함- 여지 구입 방법은 만져봐서 단단하고 색깔이 선명해야함), 청포도(나중에 트루판 가면 굉장히 맛있고 싸다), 사과(천수 사과는 맛있음)를 샀다. 일행이 먹을 것을 모두 사도 우리돈 10000원이면 해결! 참으로 과일 하나는 먹을 만한 곳이다. 향기 좋은 복숭아를 바라보고 있으니 입에 침이 절로 고여 든다.

24:00 시끌벅적한 야시장을 뒤로하고 호텔로 돌아와 기름끼, 먼지 묻은 몸을 깨끗이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즐거운 하루였다.



2004. 07. 29. 목요일. 흐림.
(천수, 맥적산석굴)

06:00 모닝콜은 안하고 이교수님이 직접 일어나라고 호텔 방마다 두드렸다. 일어나 세수를 하고 가져간 스프레이를 다리에 뿌리며 문질러 주었다. 탈나기 전에 미리 미리 자신의 몸 관리를 해야 한다. 어느 부분이 아프기 시작하면 이미 치료는 늦다.

07:00 아침식사가 시작되었다. 꽈꽈요리(천수의 특산물), 면파오, 좁쌀죽, 검은쌀죽 과일 등 뷔페식이다.

07:40 천수를 출발하여 맥적산을 향한다. 오늘 주요 코스는 맥적산 석굴이다. 현지발음으로 '마이지산 스쿠'인데 맥(麥)은 바로 보리이고 적(積)은 쌓는다는 것이니 보릿단을 쌓아놓은 듯한 산이라는 뜻이 된다. 천수시내에서 40여㎞ 떨어져 있다고 하니 한시간이 더 걸릴 예정이다. 길은 좁고 사람도 많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중국 변두리의 도로 사정은 그다지 좋지 않아 2차선이 대부분이고 중앙선이 없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도 차들은 제 갈 길을 알아서 간다.

길가에는 중국 시골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우리 시골과 별반 다르지 않아 마당에는 농기계가 있고 옥수수대 사이로 살그머니 꽃들도 피어 있다. 근데 한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일하는 농부들이 양복 비슷한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다. 난 외출이나 형식이 필요한 자리에만 양복을 입는 걸로 생각했는데 이곳 주민들은 도시나 시골이나 할 것 없이 일할 때 허름하지만 양복을 입고 일하고 있었다. 남색과 회색의 중간 정도로 빛 바랜 양복을 걸치고 있는 가냘픈 어깨, 주름진 까만 얼굴에 흐르는 고달픔이 스며있다.

08:00 가는 도중에 미니버스 안 텔레비전에서는 감숙성의 문화소개, 안내양의 유창한 중국말 안내, 서교수의 알아듣기 좋은 통역은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다.
누군가 화장실에 가야 한다며 차를 세웠는데 마침 그곳에 중학교가 있었다. 얼른 차에서 내려 중국인 중학교를 둘러보았다. 여기도 방학이고 관리당번 선생님이 탁구를 치고 있었다. 이놈이 그냥 넘길 수 있으랴... 탁구한번 치고, 서로 소개하고, 자기는 미술교사라며 작품을 보여준다기에 같이 가서 그림감상을 하였다. 물론 기념촬영은 필수....차에 남아있는 몇 몇 사람들은 빨리 안 온다고 아우성이었다.

버스는 가파른 골짜기 사이를 지나 절벽 속으로 길이 사라지는 듯 하더니 고개 마루에 우리가 서 있다. 고개를 내려서니 이상하게 생긴 언덕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땅에서 갑자기 솟아올라 정말 짚단 쌓아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한 산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아하! 바로 저런 산에 석굴이 있구나. 난 석굴이라면 경주의 석굴암과 군위 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정도는 보아서 알고 있는데 이번 것은 어떨래나?

09:00 맥적산 도착.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짧은 바지와 상의를 입었는데 작은 모기들이 나의 다리를 몇 군데 물었다. 아차, 산으로 오르면 긴 바지와 긴소매 옷을 입어야 하는데 나의 불찰이구나! 싶었는데 때는 이미 늦었다. 내 체력을 뽐내며 오르막을 올라갔다. 가까이 갈수록 '어휴'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산 하나가 전부 석굴들의 아파트였다. 산 중턱에 턱하니 서 있는 삼존불은 아래에서 보아도 그 크기가 위압적이고 또 수직 절벽에 서 있는 것만으로 나를 압도했다. 저기를 어떻게 올라가지? 말 그대로 아이스크림의 꼭지처럼 수직인 이 산의 절벽면에는 부처님이 들어앉았을 석굴들이 빠끔빠끔 벌집 구멍 마냥 수도 없이 뚫여 있었고 하나같이 절벽인지라 인간이 다닐 수 있는 길은 아예 없었다.

미리 준비해간 작은 망원경을 꺼내 눈을 맞춰보기도 하고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하나 하나 관찰하였다. 정작 맥적산 석굴을 기어오를 때는 바로 잔도(棧道)를 이용하였다. 잔도는 장강삼협(長江三峽)에서 보았듯이 절벽에 구멍을 뚫어 나무 버팀목을 박고 그 위로 널빤지를 덮어 만드는 길이다. 멀리서 볼 때 거미줄 같이 보였던 무늬가 바로 잔도였다. 이 석굴을 만든 1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이 잔도를 사람들이 왕래하는 것이다. 참으로 절묘하다.

맥적산 석굴이 처음 만들어진 때는 후진(後秦)시대로 기원 후 380년 정도부터라고 하는데 그 후로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나라 등을 거쳐 사리탑은 청(淸)대에 완공된 것이라 하니 거의 1600여 년간이나 석굴이 만들어져 온 것이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아들 두사람이 만들기 시작하여 그후 계속 축조되었다.

여러 시대를 통하는 동안 바뀌었을 왕조에 따라 부처들의 모습도 모두 조금씩 다르고 기법의 차이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설명이 있었다. 가파른 철 계단을 올라가니 각 석굴 앞에는 조잡하지만 철문이 달려 있고 쇠그물을 통해 보도록 해 놓았다. 석굴이라기 보다는 토굴에 가까운 마제산의 부처님들은 대개가 진흙을 뭉쳐 만들었는데 잘 붙고 튼튼한 소상을 만들기 위해 진흙에 찹쌀과 계란을 섞어 반죽했다고 한다.

큰부처님은 빌딩 높이로, 작은 부처는 손바닥만한 정도로 크기와 모양 위치도 제각각이지만 그 하나하나의 정교한 채색과 표정, 손모양들을 볼 때 저 소상을 만들며 불경을 외고 득도했을 옛 고승들이 생각나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자신의 부처를 직접 만들고 감실에 모시며 바라보고 열반에 들었을 그들.... 또 그들을 통해 현재와 사후의 행복을 빌었을 여러 왕족들의 운명이 이 석굴 속에 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석굴을 둘러보니 부처님보다 보살들이 훨씬 아름답고 장식도 많이 붙어 있으며 채색이 정교하고 화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개 부처님은 가사자락이 치장의 전부고 화려하고 큰 광배로 위엄을 자랑하는데 보살은 너무 사치스러울 정도로 몸치장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오성기선생님이 해답을 알려주신다. 대중을 교화하고 가까이하며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보살은 득도한 스님들이 아니라 부처님과 일반 대중을 연결하는 끈이다. 비단 옷자락에 수놓아진 작은 무늬, 가슴까지 드리운 아름답고 정교한 목걸이, 형형색색의 크고 작은 귀걸이, 눈이 부시도록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 하나까지도 계산된 것이며, 모두 일반 대중과 부처님을 가까이 연결하는 고리였다고 생각하니 놀랍고도 지능적이란 생각이 든다.

맥적산 석굴은 그 옛날 강도6도의 지진이 발생하여 동애(東崖)와 서애(西崖)로 나누어져 있다. 석굴은 모두190여 개다. 관람을 마치고 돌아 나오며 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다. 참 오랜만의 일인 것 같다. 우리 팀은 목적지에 들어서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어디로 어떻게 알고 가는지는 모르겠으나 머나먼 이국 땅에 들리는 말이라곤 중국어밖에 없어도 다들 알아서 사라졌다가 알아서 돌아오곤 한다. 이런 형편을 모르는 중국 가이드 아가씨는 한사람이라도 잃을까 너무나 걱정스런 얼굴이다. 다른 단체관광객은 깃발을 따라 조용히 무리지어 움직이는데 우리는 완전히 '니 맘대로 하세요'이니.......... 하지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꼭 말해주고 싶었다. 여기 모인 이 사람들은 사막 복판에서도 물 찾는 낙타처럼 씩씩하게 종착지에 돌아올 것이라고.......

12:00 맥적산 석굴을 나와 다시 천수로 되돌아 간다.
천수에서 점심을 먹고(돼지고기, 야채, 토마토탕, 물고기 등) 다음 여행지인 난주(蘭州)로 길을 떠난다. 천수에서 난주로 갈 때는 버스를 이용하게 되어 있다. 천수에서 4시간 버스를 타고 달려야 한다.
다음 여행지인 난주는 감숙성의 성도(省都)이고 황하 줄기에서는 큰 도시다. 느긋이 창 밖을 보고 있노라니 차창 풍경이 말 그대로 예술이다. 감숙성은 남쪽으로는 기련산맥과 티벳-청해고원으로 북쪽으로는 북산산맥과 내몽골고원으로 둘러싸여 동서로 길쭉하게 생겼다. 차창 밖으로 내내 기련산맥이 휘달아 따라온다. 몇 시간을 가도 벗은 몸을 자랑하듯 연달아 나타나는 기련산맥은 길이가 400여㎞이고 폭이 40㎞정도 된다고 한다. 인문지리 시간에 배운 산맥의 의미를 확실히 보여주는 지형이다. 울창한 삼림으로 덮여있고 완만한 고생대의 지형을 한 우리나라의 산맥과는 달리, 드넓은 벌판 아스라히 저쪽으로 나무 한 그루 없고 맨몸으로 떡 하니 버티고 길게 누워있는 기련산맥의 모습은 내게 충분히 압도적이고 위협적이었다. 두세 시간을 달려도 계속 그 자리인 것 같은 착각.....너무 넓은 평원에서는 가시거리가 불분명하다고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저기 저 산맥 기슭까지 거리가 얼마나 될지 나로서는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저 길게 길게 버티고 있는 산맥만 눈에 가득할 뿐이었다. 이곳을 긴 복도 즉 회랑지형이라고 일컫는 데는 다 이런 지형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남북이 다 고원이고, 동서로 뻗어갈 수 밖에 없는 산맥, '하서회랑' 이제 그 의미를 충분히 알았다.

난주시에 가까이 갈수록 점차 산에 나무가 없이 민둥산으로 변한다. 점점 사막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황하가 누런 물이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건 누런 게 아니라 붉은 색에 가까웠다. 황하라기보다는 적하가 맞을 것이다. 미싯가루를 진하게 개어 놓은 듯한 물....물고기가 살 것 같지도 않고, 조약돌이나 고운 모래톱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고약한 강의 모습이었다. 물살은 빠르고 세차 흘러가는 폼이 저돌적으로 보였다.

19:00 난주 시내에 들어섰다.
건물이 많아지고 매캐한 석탄 냄새와 사람의 모습이 더 자주 나타났다. 그리고 차량의 속도도 늦어지고 있었다. 난주 시내가 보이고 황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섰을 때 석양이 붉게 하늘을 물들였다.


19:30 난주 시내로 이동하여 저녁식사를 하였다.
식당은 이슬람교도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황하에서 잡은 잉어(리위)는 난주 지역의 특산물로 고기가 상당히 맛이 있었다. 탕이 여러개 나와서 다 먹지 못하고 많이 남겼다. 주인 아저씨의 친절한 말솜씨와 민첩한 행동 써비스는 손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유 냉장고 위에 있는 팻말에 槪不浿帳(개불패장)이라 씌여 있기에 나는 저것이 도대체 뭐냐?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안에 들은 우유, 과자, 빵 등을 내 먹지 말라는 소리는 아니겠고... 판매 가격이 적혀있으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외상을 하지 말라는 글귀였다. 그럼 계산대 위에 두든지 왜 냉장고위에 두어서 사람 속을 썩이지?///////

난주 시내에는 전차버스가 있었다. 거미줄처럼 빽빽한 전기줄이 허공을 가르는 이유는 바로 전차버스. 옛날 우리나라 종로를 재현한 세트장에서 튀어나왔을 법한 전차들이 시내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었다. 코너를 도는 곳에는 전깃줄도 타원형으로 이어져 있었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큰 사거리에 전기줄에 매달려 달리는 전차버스는 현대와 근대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20:30 난주역 옆에 있는 신세기주점 숙소로 이동하여 짐을 풀었다.
이교수님과 총무님, 여행사 직원은 경비를 계산하느라 2시간을 소비했다. 처음에는 좀 쉬었다가 모두 야시장에 가기로 했는데 여행자 수표 처리관계와 지불경비계산관계로 아무도 못 나갔다.

23:00 연락이 없어서 아쉬움은 남지만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2004. 07. 30. 금요일. 맑음.
(난주, 유가협저수지, 병영사석굴, 백탑사)

04:00 찍 눈이 뜨였다. 약간 미지근한 물에 몸을 담가 피로를 풀고,
05:00 기행문 자료정리를 하였다.

06:00 모닝콜이 있었고, 호텔 19층에서 앞쪽에 있는 역 광장을 내려다보니, 노란색 버스, 녹색택시들이 색깔대비를 이루며 역 앞 광장을 점령하고 있었다. 열차 손님을 기다리는 차다.

06:30 동쪽하늘에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니 오늘도 낮 기온이 무척이나 올라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지금까지 하늘이 우중충했는데 오늘 아침의 하늘은 아주 푸르며 구름 한 점 없이 둥글고 크다. 19층에서 시내를 굽어보니 난주 시내의 건물들이 우뚝 우뚝 솟아있고 웅장한 모습이 감숙성의 수도다운 면모를 보였다.

07:00 배낭을 챙겨서 1층 식당에 갖다두고 아침식사를 하였다. 아침을 먹고 바로 목적지로 출발하려면 시간을 아껴야 한다.

07:50 체크아웃을 하고 버스에 타려고 하는데 손에 들고 다니던 나의 물병이 안 보인다. 다시 방으로 찾아갔으나 문이 잠겨 있어 카운터에 다시 내려와서, 아가씨께 얘기 하니 복무원이 방금 올라갔으니 다시 가보란다. 그럭저럭 20분이 흘렀다.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행을 생각하여 물병을 포기하고 그냥 버스에 올랐다. 물통을 일부러 좋은 것 비싼 것으로 샀는데 아깝다.... 사막에 가면 나의 목을 촉촉이 적셔줄 생명줄인데........여행을 하다보면 이렇게 자기 것을 버려야 할 경우가 종종 있다.

08:10 일행을 실은 미니버스는 병영사를 향해 달린다. 버스 소요시간은 2시간, 다시 보트로 1시간 30분을 가야한다.
하늘은 아주 푸르고 오천산(五泉山)에 드는 아침 햇살은 정다웠다. 오늘 난주의 기온이 33도라고 하는데 햇볕이 무서워 일부러 긴 옷을 입었다. 이곳 감숙성은 내륙이고 여름에 더운 편이라지만, 부산이나 상하이처럼 무덥고 습한 기후는 아니라서 그늘은 도리어 시원하였다.

오늘은 병령사(炳靈寺)석굴이 주요 관람 포인트다. 그곳은 유가협(劉家峽) 저수지 안쪽에 있다. 맥적산 석굴의 감동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또 석굴을 본다. 중국의 5대 석굴은 돈황석굴(막고굴), 용문석굴, 운강석굴, 맥적산석굴, 그리고 병령사석굴이라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이 중 3개를 보게되니 가히 석굴여행이라고 할 만하다.

매캐한 석탄 냄새로 창문을 열 생각은 아예 못했다. 난주는 내륙공업 중심지역으로 지정되어 중공업과 경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도시인지라 곳곳에 공장이 있고 공장 곁에는 어김없이 매연이 하늘을 덮었다. 시내를 벗어나니 시골 풍경이 다시 보인다. 약간은 거칠고 황량한 벌판이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사막이 나타날 차례인가보다.

10:30 유가협 수력발전소 앞에 차를 세우고 쾌속정인 작은 배를 탔다. 우리일행 14명, 보트 선장과 가이드 모두 16명이 탔는데 빈자리는 하나도 없었다. 유가협 저수지(황하를 막아서 발전소를 만들고 그물을 다시 황하로 내보냄, 물깊이50m)를 가로질러 가면 병령사 석굴이 있는데 배를 타지 않고 멀리 돌아가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빠르고 편안한 것은 배를 타는 것이라 한다. 보트 선장은 얼굴이 검고 아주 우직하게 생겼다. 깊게 패인 주름으로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지만 보트 운전만큼은 베터랑급이다. 저수지 위를 달리다 우리들과의 이야기에 심취하여 핸들을 놓고 손으로 제스츄어를 하곤 하는 바람에 스릴이 더 있었다.

한참을 달리는데 모두들 디카로 풍경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보트로 출발한지 1시간이 될까말까할 때 우리 일행은 모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병풍같이 늘어선 바위 사이로 솟아 있는 작은 나무들, 깎아지른 절벽 사이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 저 만치 달려가는 모타보트의 물결, 어떤 이는 그랜드캐년과 비슷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장가계와 같다고들 야단이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수력발전소 가까이 있는 물은 푸른 청색을 띄었지만 황하의 물이 유입되는 곳에 이르니 황하 특유의 누런 황토물이다.

11:00 드디어 상륙이다. 그런데 배가 미처 육지에 닿기도 전에 아이들이 마구 뛰어온다. 기념품을 사라고 졸라대는 아이들이다. 나이는 일곱 여덟살부터 열 서너살까지 여자아이 남자아이 모두 떼로 달려들어 혼을 속 뺀다. 손에 들고 있는 건 알록달록 무늬가 들어 있는 유리구슬 종류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게 너무도 뻔한데도 산에서 캔 것이라 주장하며 살 때까지 떨어지지 않고 조른다. 나는 파는 돌은 받지도 않고 여자아이에게 돈을 쥐어주며 가라고 했다. 다른 관광객에게도 그럴 것이라 참아야 하는데 그냥 내마음 내키는 대로 했다. 매표소를 지나니 아이들이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골짜기 안의 병령사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기본 관람료는 30위안이다. 前秦 建元 2년(366년)에 낙존화상이 이곳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명사산에서 금빛이 번쩍여 보니 千佛의 형상 같아 이때부터 이곳에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는 글을 <중국고대회화>책에서 본 적이 있고, 현재 남아 있는 것만도 석굴 492개, 소상 2,000여존이나 된다고 하니, 그것을 보는데 만도 몇년이 걸린다고 상해에 유학하고 있는 동원선생님이 후에 일러 주었다.

그 곳 안내판에 적힌 내용을 보면 ‘169호, 172호 굴은 300위안, 126호굴은 80위안, 보통석굴은 30위안, 128호굴은 60위안’ 등등인데 작은 석굴들과 병령사를 상징하는 큰 부처님은 기본요금으로 볼 수 있어도, 가장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169호와 172호 굴은 300위안이라는 거금을 내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300위안이면 우리 돈으로 45000원이고 이미 30위안을 내었기에 거의 50000원에 육박하는 관람료를 내야 할 판이다. 다들 생각은 다르겠지만 선뜻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들인 차비가 아까워서 보고 가자고.... 그래서 맘속으로 탐탁치않게 생각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모두가 330위안짜리 석굴을 감상하게 되었다.

좁고 가파르고 아슬아슬한 나무 계단을 몇 번이고 돌아 오른 끝에 169호굴을 보게 되었다. 벽은 사암의 침식과 풍화로 인해 표범 무늬가 새겨졌고 부처님의 벽화는 채색이 벗겨지기는 했어도 그 당시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맥적산 석굴을 관람한 뒤라서 부처님을 보는 데도 여러 가지가 고려되었다. 얼굴의 표정, 손의 위치, 몸통과 머리부분의 비례, 옷차림, 광배와 크기와 색감 등 이만하면 불교 미술에 전혀 문외한이던 내 눈이 살짝 떠진 것은 아닐까? 하지만 결국은 아름다움이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조화라기보다는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게 아닐까 싶다. 불교미술에 문외한인 나나 잘 알고 계시는 교수님이나 서로 아름답다고 지칭한 부처님이 동일할 때가 대부분이므로.....

병령사석굴 조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현재 밝혀진 바로는 169굴에서 ‘서진건홍원년(西秦建弘元年)’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최소한 420년경부터는 석굴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전반인 이 시기는 중국에서 5호 16국이 발호하여 북중국을 장악하고 있었던 때로 이들은 중국의 문화대신 서역의 문화를 통해 자국의 독창적인 정신문화를 삼고자 했다고 한다. 특별굴의 관람료는 가장 오래되고 만들어진 때가 명확하며 잘 보존 된 것 때문에 비쌌던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무기로 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역사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기에 관람료에 비례한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병령사가 위치한 유가협 저수지의 풍경만큼은 천금의 관람료를 주어도 아깝지 않을 감동 그 자체였다.

13:30 병영사를 출발하여 돌아오는 뱃길에 보트 선장은 우리랑 면을 트고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46세이며 아들과 딸이 대학생이고 자기 집은 유가협 저수지 안의 협곡에 있으며 자기 배를 직접 운전하여 돈을 벌고 있다는 얘기부터 현재 중국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강하게 비판하며 중국의 공무원들이 부패하여 인민이 살기 힘들다는 얘기를 할 때는 목에 울대를 세우기도 했다. 한국은 잘 사는 나라이고 중국보다 부패하지 않으며 국민이 잘 사는 나라라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부끄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나 거기나 백성들은 살기가 편치 않은 모양이다. 부패 없는 중국이 되지 않으면 인민은 더욱 힘들고 몇 몇 도시의 비약적인 발전이 중국 전체의 발전을 대신하지는 않는다고 힘주어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원한 같은 것이 배어 있는 듯하여 가슴이 아팠다.

14:50 배에서 내려 선착장 가까이 있는 식당에서 주린 배를 채웠다.
15:30 또 갈 길을 재촉한다. 이제 다시 난주로 되돌아 가야한다. 오늘 저녁은 난주에서 저녁을 먹은 뒤 밤 기차를 타고 장액(張掖)으로 가야한다. 기차는 22시 17분에 출발하는 것이다. 난주 시내로 돌아가면 이른 저녁인데 기차시간까지 좀 여유가 있으니 난주 시내 구경을 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황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백탑과 황하모친상을 보기로 했다.

난주 시내에 들어서는 도중에 가이드가 계속 전화를 받고 교수님과 의논을 한다. 뭐 별일이야 있겠냐만 그래도 분위기가 심상찮다.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그러더니 그예 일이 터졌다. 교수님이 여행자수표로 지불한 1000달러 짜리가 계산이 안 된다고 중국 인민폐로 바꾸어 달라고 하는 모양이다.

17:30 난주역 가까이에 있는 여행사앞 도착, 계속 여행사 경리와 흥정....
여행사 경리(중국에서는 사장:총경리, 부사장:경리라 부름)말은 중국은행 규정상 1000달러짜리 여행자수표의 경우 복잡한 확인작업을 거쳐야 한다고 여행사 사장은 설명한다. 이 교수님은 상해에서 통했는데 왜 여기서는 안되냐고 목소리를 높이셨다. 결국 사장과 교수님이 함께 은행으로 가시고 우리는 여행사 앞 골목에 차를 세우고 계속 기다리게 되었다. 이 교수님은 우리가 시간을 허비하여 황하 관람을 놓치게 될까봐 우리끼리라도 가라고 하셨지만 가이드와 운전기사는 사장의 지시가 있었는지 요지부동이다. 결국 우리는 교수님이 돌아올 때까지 골목만 바라보는 인질 신세가 되었다. 날은 덥고, 짜증이 났다. 융통성 없고 빡빡한 중국 자체에 대한 여러 가지 복합된 생각을 갖게 된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도로에서 잡담하고 있는 중국 청년 5명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난주가 최고라나.........

이 교수님이 돌아오신 건 여행사 앞마당에 차를 대고 난 뒤 한시간도 더 지났을 때다. 어떻게 마무리를 했는지는 몰라도 서둘러 황하를 찾아갔다.

18:00 황하 건너 언덕 위에 백탑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백탑사로 가는 방법은 황하철교를 지나는 길, 배를 타고 건너는 길, 케이블카를 타는 등의 방법이 있었는데 우리 일행은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케이블카는 왕복 30위안으로 황하를 건너 언덕 위까지 간다고 한다. 정원은 6명으로 3대에 나누어 타고 출발했다. 벌건 황하의 세찬 흐름과 황하철교의 구름같은 그림자가 멋있었다. 도착하여 10분 정도 걸으니 백탑사가 있었는데 지금 있는 것은 자취만 남은 일부 부속 건물이고 흙벽돌로 쌓은 티벳 양식의 백탑이 저녁 햇살에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전탑 양식으로 원나라의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백탑산에서 바라보는 황하철교는 동쪽으로 길게 그림자를 뉘이며 반원 아치를 멋있게 드리운다. 맑은 물이 아니라고 아까워하던 황하는 탁한 대신 그림자 하나 만큼은 선명하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내려가는 길은 활강 코스를 택하려고 했으나 일부 담력이 약하신 회원들의 반대로 다시 케이블카를 탔다. 유격훈련 코스같은 활강을 정말 해보고 싶었는데 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22:00 저녁을 먹고 난주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장액을 생각한다. 우리 앞에는 어떤 새로운 풍경과 이국문화가 펼쳐질 것인지 기대된다. 지금 이 기차는 22시 17분 출발이고 장액에는 내일 새벽 05시 53분에 도착할 것이다. 약 8시간 기차를 타야한다. 이제 기차 타는 일은 이력이 나서 10시간 정도는 쉽고 24시간도 두렵지 않다. 하지만 서역 끝 카스카르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루무치에서 상해까지의 2박 3일(48시간을 열차 타야함)은 좀 길다. 하기야 1997년도 운남성 곤명에서 상해까지 58시간도 열차 안에서 보낸 적이 있는데 뭐...... 8시간은 고장 수리하는데 소요됨.

22:17 드디어 난주를 출발하여 장액으로 열차는 달리기 시작한다.

열차안에서 胜利油田 직원들이 같은 칸에 탔는데 그 중 한명이 서교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해서 불이 꺼지는 11:00까지 열심히 한국어의 모음 자음 받침을 지도하고 계셨다. 나도 그들과 간단한 중국말을 주고 받았는데 서로 알아들을 수 있다는데 매우 기뻤다.
중국인을 만나기만 하면 몇 마디 해보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현지에서 하는 어학연수는 효과가 대단하니까? 맞지도 않는 문장구조를 막 갖다 댄다. 중국인이 못 알아들어도 나 혼자 막 하고 싶은 말 다해 버린다. 틀려도 어쩔건데.....

11:00 소등 안내방송이 있은 후 열차 안의 불이 꺼졌다.
또 캄캄한 밤 공기를 가르며 기차는 장액을 향해 홀로 홀로 칙칙폭폭..... 달린다.............


2004. 07. 31. 토요일. 맑음.
(장액, 숙남 마제사석굴, 금탑사, 유고족, 장액대불사, 주천공원)

05:50 장액(張掖)에 도착했다. 가이드가 마중 나와 있었는데 20대 후반의 총각이었다. 자신을 소개하는데 인상이 좀 떨떠름했다. 나이는 이십대 초반인 것 같은데 숫기가 없는 건지 화가 난 건지 말을 매우 아끼며 사무적이다. 가이드치고는 너무 권위적이랄까? 장액빈관(식당)으로 직행하니 아직 아침 준비가 안되어 휑하니 비어 있었다.

07:20 아침식사를 마치고 숙남마제사석굴(肅南馬蹄寺石窟)를 향해 출발했다.
전세 버스로 이동하면서 안내남은 계속 장액에 대해서 중국어로 말하고 서교수는 열심히 통역한다. 물론 서교수 자신도 공부가 되겠지만 저렇게 열심히 통역해 준다는 것도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지식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도 보시중 하나(재물보시, 지식보시, 몸보시) 라고 했던가?
장액도시의 뜻은 '중원의 비액을 뻗쳐 흉노의 오른 팔을 자르고 서역과 통교한다.'는 말에서 취했다고 하는데 기원전 2세기 곽거병이 흉노의 휴도왕, 혼야왕을 이기고 이곳을 빼앗아 장액군을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곽거병 전에는 흉노들의 땅이었던 이 곳이 곽거병이라는 장수의 힘으로 중국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게 지금부터 2200년 전의 일이다. 그 이후로 서역인, 서위, 티벳 등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징기스칸의 토벌로 중국 땅이 되었고 명, 청 시대를 지나 오늘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필쟁지였다.

첫번째 목적지는 장액의 도시에 위치한 숙남마제사석굴이다. 유고족(裕固族) 자치현(소수민족)내에 있는 이 석굴은 북위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당대의 유물이 가장 많다고 한다. 마제사로 가는 길은 회색 땅을 따라 가는 길이었다. 설산의 눈 녹은 물이 강을 이루어 회색 돌바닥을 때려 길은 온통 도랑이 되고 버스는 그 도랑이 된 길을 따라 간다. 동네 어귀의 아스팔트 위에는 밀과 보리를 수북히 널어놓은 곡식 낟가리가 볼거리였다. 동네 사람들은 노동량을 줄이기 위해 자동차 바퀴가 지나갈 때를 기다려 새로 곡식을 널고 그때 저절로 타작이 되는 것이다. 아직 기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농촌에서는 이런 식으로 타작을 많이 한다고 한다. 옛날 내가 자란 동네도 이랬다.

보리밭 밀밭을 지나 버스는 계속 허허 벌판을 달리고 있다. 도로에 깔려 있는 보리 밀은 나의 고향 가는 감정을 더해주고.... 추억이 되살아난다. 주민들의 이동 수단은 자동차를 개조하여 만든 듯한 경운기를 이용하고 있었다.

10:00 드디어 마제사 석굴에 도착하였다. 마제사석굴은 이미 쇠락한 영광을 겨우 이어가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석굴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무너져도 보수하지 않았고 석굴 속에 부처님은 머리가 떨어지고 손도 떨어져 온전한 모습이 하나도 없었다. 이 곳 장액은 뺏고 뺏기는 필사의 전쟁터였던 만큼 역사의 발자취도 흐트러져 있나보다. 문화재를 남기는 훌륭한 조상보다 지키고 보존하는 후손이 절실히 필요하며 전쟁이 남긴 상처는 당대만이 아니라 두고두고 우리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웠다.

석굴 앞의 금탑사(金塔寺)는 티벳 불교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절이었다. 알록달록 큰 천이 휘날리는 대웅전이랑 지붕, 금빛으로 된 마니차도 신기하고, 앉아서 불경을 외우는 스님의 모습은 더욱 흥미로웠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절이 주는 엄숙함과 청결함, 경건함은 덜하고 스님들도 왠지 아직 도에 이르기에는 멀어 보이는 너무나 대중적인 모습이었다. 붉은 가사가 주는 느낌은 세속적이고 능동적이며 아직은 득도의 길에 다가서지 못하는 중생을 더욱 닮아 있었다.

대웅전 둘레에 만들어둔 마니차를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는 것으로 친다기에 절의 대웅전을 한바퀴 돌면서 마니차를 오른쪽으로 열심히 돌렸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면서.... 이렇게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한 주위의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보냈다.

금탑사를 뒤로하고 젊은 일행은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시멘트 계단이 하늘까지 끝을 보이지 않고 솟아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기하고 중간허리 동상이 있는 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주위를 살피고 아래를 굽어보니 평원이 무엇이고 초원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줄 요량인지 발 아래는 온통 초지다. 저기 설산 아래 U자 계곡은 빙하자국 이라는 강주석선생님의 설명이다. 강선생님은 지질학에 관심이 많아 땅모양, 절벽, 암석에 관심이 많다. 하늘은 미치도록 푸르고 공기는 청명하며 유고족 아가씨의 높은 노래 소리가 사방으로 들리는 것 같다. 아스라히 끝도 보이지 않는 초원에는 빠오가 드문드문 서 있고 양떼인지 염소떼인지 모를 하얀 점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이런 광경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목가적'이다.

중원지방(서안과 낙양일대)과 달리 이런 초원지대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풍요의 지대가 아니라 사막화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이 빈곤하다.

산 아래에 살고 있는 이곳 유고족은 위구르족의 후예와 몽고족의 혼혈로 티벳식 불교(홍교-밀교형식-개인대 개인이 은밀하게 전달하는 방법)를 신봉하며 고깔모자를 쓰고 볼이 유난히도 빨간, 그리고 아주 청아하고 높은 옥타브의 음성을 지닌 민족이다. 얼굴모습은 순진한 우리 시골처녀를 닮았는데 그녀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는 도저히 따라하지 못할 정도로 높고 청아하며 가끔 꺾어지는 꾸밈음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조금 후에 저들의 식당(유고식 빠오-특징은 삼각형이고 위가 뾰족한 밀짚형태의 모양)에 들러 점심을 먹기로 되어있다.
유고족은 주로 양고기를 먹고 소 말 개고기 생선은 안 먹었다. 또 유고족은 기련산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을 이용하여 여름 한철 방목을 하고 겨울에는 또 옮겨간다고 했다.

11:30 유고족 빠오에 양고기를 먹으러 들어가는 순간부터 난 이국 문화를 체험하는 문화전사가 되었다. 빨강, 파랑, 노랑, 분홍 보기만 해도 눈이 시려울 정도로 찬란한 빛깔의 민속의상을 입은 아가씨가 노란 스카프를 목에 걸어준다. 환영의 의미다. 그리고 대문 앞에서 은술잔에 술을 권한다. 이 곳 풍습은 손님께 술을 세 번 권하고 그 술을 세 번 다 받아야 좋은 손님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50도나 되는 빼갈을...... 진정한 손님이 되기가 어렵군.

좋은 손님이 되려면 눈 딱 감고 마셔야 하는데....이런 결심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유고족 처녀들의 권주가다. 강한 자외선의 영향으로 사과보다 빨간 볼을 한 아가씨의 힘있고 강한 권주가 앞에 내 결심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죽기 아니면 좋은 손님 되기다. 자, 한잔 받고! 두잔 먹고! 세잔 마시고! 연산동 왕제비가 여기서 굴할 수는 없지...쭉---역시 독하다. 쩔쩔매는 여자 일행 모습에 마시는 시늉만 하라고 가이드가 귀띔을 했다.

일단 빠오식당에 무사히 입성했다. 미싯가루 같은 것이 접시에 나오고 꽈배기 닮은 빵, 한천국수 같은 것이 연이어 나왔다. 다른 분들은 야쿠르트를 제일 좋아하셨다. 진짜 양젖으로 만든 야쿠르트란다. 설탕이 듬뿍 쳐져 달콤새콤한 야쿠르트를 박계숙선생님은 무려 3그릇이나 드셨다. 덕분에 양고기는 하나도 안 드셨지만.... 기대하던 양고기는 양고기 수육 형식으로 나왔다. 뼈도 발라서 맛있게 뜯고 있는데 다른 여자 일행은 모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별로 드시지 않는다. 고기가 생각보다 질기고 냄새도 약간 달랐다. 남자들은 평소에도 육식을 즐겨서인지 별 거슬림 없이 맛있게 양고기를 해치울 수 있었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도 권주가와 술, 노래, 춤을 선사하는 아가씨들의 써비스에 왕제비는 약간 맛이 가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같이 춤을 추자고 하기에 무대에 나가 지루박으로 끝내 주었다. 다른 일행들의 박수가 대단하였다. 약간의 팁도 술잔 옆에 놓아주었다.

12:30 식당을 나와 유고족 전통공연예술을 보기로 했으나 공연시간이 12시, 오후3시라고 해서 못보고 다시 장액 시내로 돌아와 대불사(大佛寺)(장액시내에 있음)를 보기로 했다.

14:00 장액 대불사 도착. 대불사는 대불이 절에 있기에 이름 붙여졌는데 안에 모셔진 불상은 중국 최대의 소조 와불이다. 길이가 무려 35m이고 열반 부처님 뒤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가 서 있고 각양의 18나한이 둘러 서 있다. 또 부처님 발바닥에는 법륜이 있었다.

대불사 뒷편에는 토탑(土塔)이 있었는데 밖에 전각을 둘러 탑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꼭대기만 허공에 솟아 있는 것이 어색했다. 탑을 구경하려고 그 더위를 헤치고 절을 몇 바퀴 돌았는데 들어가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경전을 보관해둔 건물도 있었다. 화장실 곁에 핀 양귀비 꽃이 형형색색 어찌나 이쁜지 더위도 싹 잊혀졌다. 근데 양귀비는 마약을 채취하는 꽃이 아닌가? 이런 공식적인 장소에 저렇게 집단적으로 키워도 되는 것인가?

15:30 장액 대불사를 출발하며 주천(酒泉)으로 길을 잡았다. 버스로 4시간을 달려야 한다.

16:40 끝없이 펼쳐지는 황야의 들판을 계속 달린다. 황무지, 키낮은 옥수수밭이 가끔 눈앞을 스친다. 황야의 무법자 노래가 쓱 흐르면서 총 싸움하는 장면이다.
10분쯤 더가니 흑하(黑河)의 긴 강물이 보이고 설산의 눈 녹은 물이 흘렀다. ......또 계속 버스는 달린다.

17:00 집들이 약간 보이고 길거리에 과일 파는 상점들이 보였다. 올커니 차를 세우고 수박을 3덩어리 사서 그 자리에서 전부 둘러서 작살을 냈다. 시원하고 꿀맛이었다. 오는 도중에 목들이 말랐던 모양이었다.

17:20 이제는 꺼비탄(몽고어로 번역된 말)(戈壁灘-한자어) 사막벌판으로 이어졌다. 꺼비탄이란 진흙이 창과 같이 솟아 있고 “초목이 자라지 않는 땅”이라는 어원을 가진다. 즉 아직사막은 아니지만 황무지를 뜻한다.(진흙+모래), 과벽탄은 그럼 어떻게 만들어 졌나? 몇 천년 바다 였던 곳이 육지로 올라와서 생겼으며, 꺼비탄이 모여 황토땅이 되는데 중국 섬서성이 황토로 되어있다. 이곳은 물이 적고 강수량도 적다. 초목도 살지 못한다. 이 꺼비탄은 나중에 가기로 되어있는 우루무치에서 카스카르 가는 길에 많다고 하였다.
꺼비탄 지역에서의 3개의 보물은 1.말 2.지지초 3.홍유(식물)이라고 알려줬다. 아울러 우루무치의 3대 보물은 1.마분(말똥), 2.우분(소똥), 3.지지초(원주민들이 방석을 만드는 재료)라 한다.

중국사람들은 실크로드길을 사주(沙柱)길이라 하고, 서안을 출발하여-천수-난주-장액-가욕관-돈황-(a.양관남쪽-타클라크사막아래쪽-인도), (b.옥문관북쪽-하미-트루판-유럽-인도)로 이어지는 것을 말하며, 실크로드 길이 갈라지는 곳은 바로 돈황이다. 삼장법사는 불경을 가지고 이 길을 걸어 서안으로 돌아와 잠시 쉬었다가 황제의 환대를 받으며 북경으로 가서 그 많은 불경을 번역하였다.. 이 길을 말 타는 길이라 하여 안마로라고 칭하기도 한다.

감숙성을 와보지 못하면 중국을 길다고 말할 수 없으며, 감숙성의 꺼비탄, 계단식 밭, 교통의 불편함(철도외는 곤란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중국 왕유의 “대막고연직 장하낙양원”도 이 꺼비탄을 노래한 시다. 현재 중국 정부에서는 이지역을 개발하기 위해서 서부대개발사업 청사진을 발표하였고 각성의 대학생을 선발하여 여러 가지 특전을 부여하고 이 사업에 투입하고 있었다.

18:00 책에서만 공부하였던 신기루 현상이 나타났다. 참 신기하였다. 저 멀리 사막 끝에 정말 바다, 풀, 눈산, 늪지대가 있고 초목이 있는 착각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였다. 우리 일행 전부는 탄성을 질렀다 와!!!!! 저게 바로 신기루구나...

18:10 꺼비탄이 있는 곳에서 골재를 채취하는 차량들이 발견됨. 또 골재 채취로도 유명하다.
계속 버스로 이동하면서 화장실이 없어서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사막에는 화장실이 별도로 없고 밖에 나가 차의 오른편은 여자, 왼편은 남자가 용변을 보는데 바람을 등지고 하란다. 그래야 옷을 안 버린다나? 전부 한바탕 웃음이 벌어졌고 직접 한번 해 보자는 의견에 전부 실습을 하였다. 우리가 한 자락 물을 흘린 곳이 상해에서부터 꼭 2,893km 달려온 지점이란다.

20:00 주천시내 진입, 주천 시내에 도착하니 바람이 많이 분다. 주천에는 평상시에도 바람이 이렇게 많이 분다고 하였다. 길거리에는 꽃가루가 날리고 길을 쓸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 처량하다.

20:10 주천공원 관람
곽거병이 최대 숙적 흉노를 토벌하고 서역을 평정한 후 곽거병의 공을 기리어 황제가 술을 내리자 곽거병은 모든 병사와 함께 공을 나눈다는 뜻으로 어사주를 우물에 부었다고 한다. 어사주를 부은 우물물로 몇 천의 병사가 함께 마셨다는 전설의 주천! 이 전설을 잘 알고 계시는 교수님 이하 여러분들은 주천에 가는 것을 아주 감격스러워 하셨다.

언제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주천은 공사중이고 쓸쓸한 황혼에 모래 바람도 드세게 불어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2000년 전의 우물이 마르지 않고 지금도 쉼 없이 새물을 솟아 올린다는 것이다. 이 물이 정말 곽거병이 술을 부어 군사들을 위로했던 그 우물일까? 2000년이란 긴 세월동안 같은 자리에서 물을 토하고 있는 주천이 한 도시의 이름으로 명명된 이유도 이 같은 끈질긴 생명력 때문이리라.....

20:20 주천공원 출발--- 가욕관을 향해 또 달린다. 강행군이다. 조금씩 맥이 빠진다.
해는 완전히 지지않고 서산에 걸려있다.

21:40 주천에서 40분 정도 달리니 가욕관 시내로 들어섰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였다. 인민공원 옆의 호텔에 짐을 풀고 하늘을 보니 달이 어찌나 선명한지 눈이 시럽다.

21:40 진대주점(秦大酒店)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저녁시간이 늦은 관계로 도착하니까 벌써 식탁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점심때 유고족에서 가져온 양고기 갈비와 양고기탕, 닭고기, 돼지고기비계수육, 이교수 사모님의 비빔밥을 먹었다.

22:00 오늘은, 주천은 장액에서 가욕관으로 오는데 그냥 거쳐왔는데 무슨 도로비(20원), 공원관람료(25원)를 달라고 하느냐며 여행사 직원과 다투었다. 그 녀석들도 지지 않으려고 그럼 내일부터 원칙대로 할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우리 일행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차량이 안 좋으면 어쩌지? 음식은 ? 등등

이때 필요한 사람이 북경에 있는 장문천 사장이다. 이교수는 계속 그 장사장과 연락을 취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장사장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 하루는 끝이 나고 지금부터 또 휴식과 잠을 푹 자 두어야 한다. 호텔에서의 잠은 편한 잠자리다. 쿨쿨쿨...........

*** 원래 긴 여행은 이때쯤 되면 체력도 달리고 기호도 틀리고 구경하는 관심도 각자 틀리기 때문에 내분, 외
석강영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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