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교원문학상> 단편소설 가작 - 괴질

2002.02.04 00:00:00

꿔거꺼엉, 다복솔이 우거진 학교 뒷산에서 꿩 울음소리가 골짜기를 들썩거리며 내려왔다. 박 선생과 공 선생은 코를 박고 열중하던 바둑돌을 쓸어 담고 숙직실을 빠져나왔다. 교문을 지나자 언덕길 너머로 부풀어오른 바다는 저녁 노을에 물들어 불그스름하게 빛났다.

언제 보아도 눈이 시리도록 곱고 황홀한 바다였다. 그 오색 찬란한 바다에 둘러싸인 섬 여자중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은 행복한 표정을 지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공 선생은 심기가 매우 불편한 얼굴이었다. 입이 석 자나 불거져서 툴툴거렸다.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냔 말이여? 나 참 기가 막혀서......."

가까운 학부모한테서 귀띔을 받았단다. 학교에 변고가 생긴 것이 모두 공 선생 탓이라고 원망한단다. 공 선생 꿩 잡아먹고 구렁이 잡아먹은 일 때문에 동티가 났다고 수군대더란다. 도대체 이 개명 천지에 꿩 잡아먹고 구렁이 잡아먹은 일하고 학생들 아픈 일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냐고, 무지몽매한 섬 학부모들이 생사람 잡게 생겼다고 공 선생은 펄쩍 뛰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공 선생을 힐끗 훔쳐보면서 박 선생은 가만히 입술에 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박 선생도 공 선생 꿩 구렁이 잡아먹은 일하고 학생들 아픈 일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걸핏하면 용왕님의 진노로 바다에 나간 선원들이 떼죽음을 당하기 일쑤인 섬사람들로서는 매사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니까 그들의 원망을 꼭 미신이라고 가볍게 웃어넘길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도 멀쩡한 꿩을 잡아먹었더라면 그토록 험한 구설수에 휘말리지는 않았을는지 모른다. 유리창을 빈 허공인 줄로 오인한 장끼가 한껏 매력적인 몸매를 뽐내며 유유히 날다가 그만 와장창, 유리를 박살내며 펑, 복도로 나동그라지자 뒤늦게 나타난 공 선생이 북적거리는 여학생들을 비집고 들어가 아직도 날갯죽지를 실룩거리는 그 훌륭한 술안주감을 슬그머니 들어올렸던 것이다. 그 뒷일은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선생님, 그 꿩 어찌하셨어요?"

학생들이 궁금해하자.

"응, 선생님들하고 볶아먹었지."

공 선생은 씩 웃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꿩을 볶아먹는 자리에는 박 선생도 한 자리 끼게 되었다. 어쩐지 좀 께름칙하기는 했지만 다들 맛나게 먹는데다가 공 선생이 하도 권해서 억지로 몇 점 먹기는 먹었다.

참새 한 마리만 교실로 날아들어도 함성을 지르는 여학생들이 그 희한한 사건을 그냥 지나칠 리 만무였다. 집에 가자마자 식구들에게 어쩌고저쩌고 쫑알거렸을 것이 분명했다. 아침 햇살에 힘이 뻗쳐 뛰어오르다가 잘못하여 뱃전으로 떨어진 장작만큼 굵은 숭어도 먹으면 재수에 옴 붙는다고 다시 바다로 살려 보내는 섬사람들이 정식으로 총을 쏘아 떨어뜨린 꿩도 아니고 실수로 유리에 부딪혀 떨어진 꿩을 얼씨구나 볶아먹은 공 선생을 곱게 보았을 리 있겠는가.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렁이까지 말썽이었다. 학교 뒤 언덕에 서 있는 소나무로 기어오르던 구렁이를 발견한 여학생들이, "선생님, 저기, 저기, 구렁이가......"

쪼르르 교무실로 달려와 숨 넘어가는 소리로 호들갑을 떨자 주섬주섬 노끈을 챙긴 공 선생이 잽싼 걸음으로 현장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공 선생은 한참 동안 작대기로 구렁이 몸뚱이를 여기저기 들쑤신 끝에 나무 밑으로 떨어뜨리는 데에 성공했다. 목에 올가미를 씌워 묶은 다음 잡아당기자 시커먼 먹구렁이는 몸을 비비꼬고 혀를 날름거리며 끌려왔다. 꺄악, 엽기적인 광경에 질린 여학생들이 소름끼치는 비명을 질러대도 공 선생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자루에 넣어서 음침한 곳에 숨겨 두었다가 학생들이 하교하자 공 선생은 숙직실 연탄불에 솥을 걸고 구렁이를 푹 고았다. 기름이 둥둥 떠올랐다.

몸보신에 그만이란마시. 공 선생이 한사코 함께 먹자고 권했지만 박 선생은 소름이 돋아 줄행랑을 놓았다. 그래도 몇몇 선생들은 기어코 밤이 이슥하도록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끝장을 봤다는 후문이었다. 물론 그 소문 역시 학생들 입을 통하여 학부모들에게 전해졌을 터였다. 학부모들이 공 선생의 잇따른 만행에 낯을 찌푸렸을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러던 차에 학교에 괴질이 나돌았으니 공 선생이 입살에 오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허무맹랑한 미신이라고 섬사람들만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그랬다. 그건 참으로 괴상한 질병, '괴질'이었다.
며칠 전, 쉬는 시간에 교무실 문이 드르륵 거칠게 열리며 뛰어든 학생이,

"선생님! 순미가 죽어가요!"

째진 목소리로 날카롭게 외쳤다. 순미의 담임을 맡은 처녀 선생이 놀라서 허둥지둥 이층으로 뛰어올라 갔을 때, 이층 복도에서는 전대미문의 해괴한 동작이 연출되고 있었다. 마룻바닥에 주저앉은 순미는 신이 내린 무당처럼 두 팔을 허공으로 치켜올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비명을 질렀다. 손가락은 덜덜 떨리고, 이빨은 덜그럭덜그럭 마주치고, 눈알은 희번득 돌아갔다. 으으으으, 괴성을 터뜨리고 경련을 일으키는 순미를 지켜보며 공포에 질린 여학생 구경꾼들은 엉엉 울었고, 난생 처음 보는 무서운 광경에 놀란 처녀 선생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학생들과 함께 발을 동동 굴리며 울었다.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무섭게 경련을 일으키던 순미는 급기야 넋을 잃고 쓰러졌다가 몇 분 후에 천만다행으로 정신을 되찾았지만, 놀라운 소식은 순식간에 복도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달려갔다. 그 소문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날 오후가 되자 여기저기 몸이 아프다는 학생이 스무 명을 넘어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사들은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보리를 벨 시기였다. 학교에서는 늘 그래왔듯이 예년과 비슷한 날짜에 교복을 동복에서 하복으로 갈아 입혔다. 그런데 뜻밖에도 기온이 뚝 떨어졌다.

긴소매를 반소매로 갈아입은 연약한 여학생들은 아침저녁으로 읍내에서 뚝 떨어진 학교까지 얇은 옷을 입고 먼 거리를 오가는 탓으로 팔에 소름이 돋고 으슬으슬 한기를 느꼈을 터였다. 콧물이 흐르는 학생도 있고 오한이 드는 학생도 있을 수 있었다. 아프다는 학생이 불어난 것은 다 그런 감기 기운 때문이겠거니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순미가 한바탕 소란을 피운 다음날에는 첫째 시간부터 몸이 아프다는 학생이 속출했다. 누구는 배가 아프다고 했고, 누구는 머리가 아프다 했다. 더러는 목이 꽉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했고, 더러는 손가락이 오그라져서 잘 펴지지 않는다 했다. 누군가는 골치가 깨지도록 지끈거리고, 누군가는 눈알이 빙빙 돌 정도로 어지럽다 했다. 또 누군가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쏙 빠진다고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여중학교에는 양호 교사도 양호실도 없었다. 어지간히 아픈 학생은 뜨끈한 숙직실에 가서 잠시 누워 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기묘한 일은 아프다는 친구를 숙직실까지 부축하여 눕혀 놓고 돌아온 학생이 자기도 어지럽다며 맥없이 복도에 쓰러져 버린 사건이었다. 그 소문이 나돌자 학교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소란해졌다.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에는 아프다는 학생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담임 선생 앞에는 어김없이 서너 명의 학생들이 진을 치고 우는소리를 했다. 박 선생도 학생들과 입씨름을 벌이느라 진땀을 뺐다.

"야, 이슬이! 너 방금 내가 수업 들어갔을 때까지도 멀쩡했잖아?"

학생들은 꽉 짜인 학교 생활에 지쳐 있었다. 학생들에게 학교는 늘 빡빡하고 딱딱하고 팍팍한 곳이었다. 더군다나 공부는 '공' 자만 들어도 골치가 아팠다. 아무리 재미있게 가르쳐 주어도 수업 시간은 지루하고 답답하고 갑갑하기 마련이었다. 박 선생은 학생들의 짜증을 덜어줄 요량으로 수업 도중에 우스운 이야기를 곧잘 해주었다. 방금 전 국어 시간에도 이야기 주머니를 끌렀다.

예전에 박 선생이 초등학교 근무할 때의 이야기였다. 한 번은 일학년을 맡았는데 여학생 한 명이 신발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찾아 봐도 신발이 보이지 않자 하는 수 없이 박 선생은 그 꼬마숙녀를 집에까지 업어다주기로 작정했다. 아무리 꼬마라지만 숙녀는 숙녀였다. 업혀 가지 않겠노라고 심하게 앙탈을 부렸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등에 업혔지만 뒤늦게 사태의 진상을 깨달은 꼬마숙녀는 교문을 나설 무렵부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당장 내려놓으라고 보채기 시작했다. 그래도 못 들은 척 계속 업고 달리자 약이 오른 꼬마숙녀는 박 선생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꼬집어 뜯었다.

그래도 모른 척하자 이번에는 박 선생 등짝을 고사리주먹으로 쿵쿵 두들겼다. 그래도 모른 척하자 이번에는 약이 잔뜩 올라 욕설을 퍼부어 댔다.

"놔야, 놔, 이 새끼야! 안 놀래?"

세상에! 선생이 제자한테 욕을 얻어먹은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학생들은 꼬마숙녀가 선생 옆구리를 꼬집어 뜯는 장면부터 입이 슬그머니 벌어지다가 욕설을 퍼붓는 장면에서는 깔깔 까르르르 신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슬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내숭을 떠느라 입을 살짝 가리고 호호, 점잖게 웃기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거의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쿡쿡 웃어댔다. 그렇게 웃던 아이가 뒤돌아서는 길로 금방 또 아프다고 찾아왔으니 박 선생으로서는 어안이 벙벙했다.

"너 아까 꼬마숙녀 이야기 들으면서 막 웃고 즐거워했잖아? 네가 나라면 아프다는 말 믿을 수 있겠어?"
"맞아요, 아까까지 멀쩡했는데 갑자기 창자가 꼬이는 것처럼 아파요. 교실에 있는 소화제 먹었어도 소용없어요."
"다 큰 처녀 배를 만져줄 수도 없고 어쩌겠냐? 병원에라도 가 보아라."

이슬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다음 순서는 경심이었다. 덩치가 크고 볼딱지에 뒤룩뒤룩 군살이 엉겨붙은 경심이는 꼬마 숙녀가 선생에게 욕설을 퍼붓는 대목에서 얼마나 신이 났던지 꺄악, 쇳소리를 지르며 금방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는데, 이제는 풀이 폭삭 죽어 울상을 지으며 뭐라고 뭐라고 못 알아들을 소리로 중얼거렸다.

"허허,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뛰더라고 이제는 아플 사람이 없어서 너까지 아프단 말이지?"

옛날 소년들은 유난히 방귀를 뽕뽕 갈겨대면서 '방귀 잘 뀌는 사람 신체 건강해'라고 억지를 썼는데, 경심이도 신체가 건강한 탓인지 뽕뽕 방귀를 잘 뀌어댔다. 다른 여학생들은 부끄러워서 설령 방귀가 마렵더라도 참으려고 애쓰거나 살그머니 해결하기 마련이지만 경심이는 전혀 조심하거나 꺼리는 법이 없었다. 선생에게 들리거나 말거나, 친구들이 찡그리거나 말거나 끙, 힘을 주어서 뿌우우웅, 시원스럽게 내갈겨 버리고는 개운한 표정을 짓기
일쑤였다.

"어휴, 냄새."

그럴 때마다 학생들은 코를 쥐고 손사래를 쳤다.

"선생님, 경심이 좀 복도로 내보내세요."
"니 빤쓰는 다 삭았겄다."

그러면 또 박 선생은 경심이의 무안을 덜어줄 속셈으로 점잖게 달랬다.

"나 어렸을 적에는 말야, 방귀 잘 뀌는 사람은 신체 건강하다고 했지."

박 선생은 방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박 선생이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전쟁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나라 살림 집안 살림이 모두 어려웠을 때, 못 먹고 굶주린 아이들은 별의별 것을 다 먹고 온갖 희한한 소리와 냄새가 나는 방귀를 뀌어댔다.

"여러분, 삼대 방귀라고 들어봤어요?"
"아니요."

학생들은 일제히 합창하듯 외치며 박 선생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쏟아질지 벌써부터 호기심이 가득 어린 눈초리로 키들거리기 시작했다. 박 선생은 칠판에 커다랗게 '삼대 방귀'의 명칭을 썼다.

--보리 방귀
--무시 방귀
--다마네기 방귀

'보리 방귀'는 보리밥을 먹으면 나오는 방귀였다.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이 쌀밥이지만 그 시절에는 쌀밥은커녕 보리밥이라도 끼니를 거르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집은 잘 사는 축에 들었다. 보리밥을 먹으면 쌀밥보다 방귀가 훨씬 자주 나왔다. 너나없이 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걸핏하면 여기에서 뿡, 저기에서 뿡, 방귀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보리 방귀는 엄청나게 큰 소리에 비하여 냄새는 그리 독하지 않아 견딜 만했다. 우렁찬 방귀 소리가 교실에서 울리면 아이 들은 그것이 보리방귀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물론 범인도 쉽사리 찾아낼 수 있었고.

"무 알지요? '무시'는 무의 사투립니다. '여시'는 여우의 사투리고."

곯은 배를 불리고 입도 즐겁게 해 줄 간식거리가 턱없이 모자랐던 소년들은 밭을 지나갈 때면 '무시'를 뽑아 먹는 일이 흔했다. 흙을 털만큼 털고 손톱이나 이빨로 껍질을 도려낸 다음 아그작아그작 베어먹는데 초록빛이 도는 대강이 쪽은 시원 달콤 맛이 괜찮지만 하얀 꼬리 쪽으로 내려갈수록 싱겁고 지리고 매캐했다. 그런다고 꼬리 쪽을 던져버리는 일은 드물었다. 대개는 그것도 아까워서 간당간당 뿌리만 남을 때까지 끝장을 보기 마련이었다. 물론 방귀에서도 어김없이 '무시' 냄새가 났다. '무시' 방귀는 보리 방귀에 비하여 뽀오옹, 소리는 길고 가늘지만 냄새는 훨씬 더 매캐하고 독해서, 이웃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면 방귀를 뀐 학생은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푹 수그렸다.

"다음은 '다마네기' 방귀인데, 그 시절은 일제 시대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른들이 양파를 일본말로 '다마네기'라고 부르니까 아이들도 '다마네기'라고 한 겁니다. 이게 얼마나 냄새가 지독하던지 코가 썩을 지경이랍니다."

입이 궁금한 아이들은 무처럼 양파도 날로 잘 먹어댔다. 한번 입에 댔다 하면 마지막 속알맹이가 사라질 때까지 매워서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면서도 결코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 '다마네기'를 자주 먹으니 '다마네기 방귀'도 자주 나올 수밖에. '다마네기' 방귀는 '피잇' 소리가 나다 말아서 '피시 방귀'라고도 불렀는데 소리가 거의 없는 대신 맵고 썩은 냄새가 천지를 진동해서 한번 터졌다 하면 원자탄이 터진 것처럼 교실에 난리가 났다.
"어떤 새끼가 '다마네기 방구' 뀌었냐?"

매캐하고 썩은 냄새가 교실에 퍼지면 아이들은 저마다 코를 싸매 쥐고 욕설을 퍼부었다. '다마네기' 방귀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으므로 범인을 찾아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귀 이야기를 마치자 학생들은 배를 쥐고 깔깔거렸지만 오직 방귀를 잘 뀌는 경심이만은 성난 눈초리로 박 선생을 흘겨보았다. 박 선생으로서는 위로한답시고 꺼낸 이야기였지만 경심이로서는 자기를 놀리는 이야기로만 들렸던가 보았다.

이번에도 경심이는 왜 건강한 너마저 아프다고 나서느냐는 힐책에 앙칼진 눈매로 박 선생을 노려보며 더운 눈물을 좌르르 쏟아냈다.

"억울해요, 억울하당게요."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저라고 아프지 말란 법 있당가요?"
"어디가 아픈데?"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잘 모르겠당게라우. 정신이 하나도 없고 몸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랑게라우."
"야, 거 참 부럽구나, 부러워. 비행기 표도 안 끊고 공중에 둥둥 떠다닌다니 얼마나 신통한 일이냐. 너 혹시 공부하기 싫어서 꾀병 부리는 것 아니지?"
"그럼 미진이는 왜 왔다요?"

경심이 뒤에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 미진이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심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하는 수 없다는 듯 미진이는 죄인처럼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미적미적 박 선생 앞으로 다가섰다.

"너도 아프냐?"
"네에, 배하고 머리가......."
"허허 참, 잠깐 기다려 봐라."

미진이를 세워 둔 채 박 선생은 평소에 친형처럼 따르는 대선배 공 선생한테 갔다. 바둑도 함께 두고 낚시도 함께 다니고 술도 함께 마시는 터라 언제나 답답한 일이 생기면 박 선생은 허물없고 만만한 공 선생을 찾아갔다. 공 선생 앞에도 역시 세 명의 학생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 선생님,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어째 좀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요."
"선생질 이십 년에 나도 처음일세. 전무후무한 일이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글쎄, 거짓말인 것도 같고, 아주 거짓말은 아닌 것도 같고...... 집단적으로 미리 짜고 벌이는 일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데..... 어디 한 군데가 아픈 것도 아니고, 증상을 종잡을 수 없으니...... 전염병도 아닌 것 같고....... 좀더 두고 보더라고.......나도 지금 요술에 놀아나는 기분이네."
"지금 당장 저렇게 아우성들이니 어떡합니까?"
"할 수 없지 어쩌겠는가. 꼬치꼬치 따지지 말고 대강 처리해 버리게. 눕고 싶다면 숙직실로 보내고, 병원에 가고 싶다면 조퇴시켜 주게나. 직원회의라도 열어야 할 것 같아."

그때였다. 아까부터 교무실 이곳저곳을 잔뜩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보던 학생주임 최 선생이 발딱 일어나더니 버럭 고함을 질렀다.

"요것들이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뻔한 꾀병 가지고 엄살을 피워? 조퇴라니, 어림없는 소리 말어. 아직 덜 맞아서 그러지? 꾀병 부리는 놈들한테는 그저 몽둥이 찜질이 최고야. 몽둥이 맞고 싶은 놈들 있으면 이리 나와! 빨리 안 나와? 한 대씩 맞으면 정신이 번쩍 들 거다. 선생님들, 안 되겠어요. 모두 교실로 돌려보내세요. 아파도 책상에 엎드려 있고, 울어도 교실에서 울엇! 지금부터 셋 셀 때까지 교실로 돌아가지 않는 놈은 각오한다. 하나, 둘, 셋!"

그러자 마치 공습 경보라도 울린 듯 학생들이 우르르 달아났다.

학생주임 최 선생은 호랑이 선생으로 악명이 높았다. 무슨 일이든지 일단 트집이 잡혔다 하면 인정사정 없이 조져댔다. 한번 화가 났다 하면 뺨이고 종아리고 남아나지 않는지라 학생들은 복도 끝에 최 선생의 그림자만 얼씬거려도 오금을 펴지 못하고 벌벌 떨 지경이었다. 그 최 선생이 오기가 잔뜩 실린 깐깐한 목소리로 셋을 세고 나자 교무실은 텅 비었다. 학생들은 한 명도 남지 않고 깡그리 교실로 달아나 버렸다. 담임 선생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최 선생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그렇지, 제깐 놈들이 별 수 있을랍디여? 다 엄살이라니까요. 벗 따라 강남 가더라고 괜히 공부하기 싫으니까 연극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최 선생은 자기의 엄포가 먹혔다고 얼굴 가득 득의의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최 선생도 오후에는 꿀 먹은 벙어리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최 선생의 으름장 정도는 씨알이 먹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병원에 간 학생이 겁에 질려 주사도 맞기 전에 내뺐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조퇴를 하고 교문을 나선 학생이 길 옆 비탈로 굴러 떨어졌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여중학교에 원인을 알 수 없는 괴질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돌자 학교에서 이 킬로쯤 떨어진 읍내는 벌집을 쑤신 듯 소란해졌다. 그처럼 흉흉한 소문이 읍내를 한 바퀴 도는 데에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자기 딸이 정체불명의 질병에 걸렸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학부모들은 일감을 내팽개치고 허둥지둥 학교로 몰려들었다. 어떤 학부모는 택시를 타고 쫓아왔고, 어떤 학부모는 다급한 나머지 지게를 지고 달려오기도 했다. 딸이 아프다면 지게에다 지고 갈 심산인가 보았다. 교무실과 교실은 당황한 학부모들이 미덕아, 영미야, 딸의 이름을 외치며 수선을 피우는 바람에 마치 부상당한 군인들이 쓰러져 신음하는 야전 병원처럼 어지러웠다.

소문을 들은 보건소 직원 역시 헐레벌떡 출동하여 수업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 교실 저 교실 책상과 걸상, 그리고 쓰레기통까지 구석구석 들쑤시고 다녔지만 의심할 만한 증거는 아무 데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미덥지 않았던지 그는 마스크를 쓰고 약통을 걸머진 다음 교실마다 철커덕 철커덕 쉬익 쉬이익, 크레졸 소독약을 뿌옇게 뿌리고 돌아갔다.

학부모한테서, 교육청에서, 주재 기자한테서 전화가 빗발쳤다. 어찌 된 노릇인가? 도대체 무슨 병인가? 왜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 병이란 말인가? 증세는 어떠한가? 머리가 아프면 머리만 아프고 배가 아프면 배만 아파야지 왜 황당하게 여기도 아팠다 저기도 아팠다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인가? 몇 명이나 아픈가? 우리 딸은 괜찮은가? 아픈지 안 아픈지 모르면 빨리 교실에 가서 확인해 알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사태의 진상을 명쾌하게 설명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꿎은 교감만이 전화통을 붙잡고 예, 예, 그게 아니고,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너무 염려 마세요, 무슨 병인지 아직 모릅니다, 그게 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쩔쩔 맬 따름이었다.

박 선생은,

"갈수록 태산이군요. 어째 좀 요상한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또 공 선생에게 물어보았지만,

"모르겠어, 나도 이런 이상한 일은 처음이라니까."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따름이었다.

예년보다 기온이 내려가 비교적 쌀쌀하게 느껴지는 날씨에 하복 반소매를 입고 다니다가 감기 증상을 보이는 학생도 몇 명 나올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전교생 600여 명 가운데 100여 명 이상이 조퇴를 한 현상을 감기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염병도 아니었다. 전염병이라면 고열이나 반점, 설사 등 나름대로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야 하는데, 아프다는 학생들에게는 공통된 증상이 없었다. 물론 식중독도 아닌 것 같고, 꾀병도 아니었다. 꾀병이라고 호통을 치던 학생주임 최 선생이 오후 들어 벙어리가 되었다시피 그 괴질의 증상에는 꾀병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심리적인 것일까. 알 수 없는 공포나 두려움이 확산되는 것일까. 그럴 것도 같기는 한데 꼭 집어서 심리적인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웠다. 아리송했다. 무언가 석연치 않으면서도 교사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 더 이상 괴질의 원인을 명확하게 끄집어낼 수 없었다.

오후 수업은 군데군데 빈 책상이 수두룩하여 분위기가 엉망으로 흐트러진 가운데 지나갔다. 엄벙덤벙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이 돌아간 다음 교무실에서는 긴급 회의가 열렸다. 급히 교육청에서 파견된 장학사가 입을 떼었다.

"이번 괴질에 대해서는 저보다 선생님들께서 더 잘 아실 테니까 그 원인이나 대책에 관하여 좋은 의견들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학사님! 괴질 괴질 하시는데 그 명칭이 괴상하고 흉측한 느낌이 듭니다.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으면 합니다만."
"무슨 좋은 이름이 있습니까?"
"글쎄요, '원인 미상의 질병'이라든지, '알 수 없는 현상'이라든지......."
"저도 괴질이라는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만 지금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대책 부터 강구해 보도록 하지요."

교사들은 머리를 맞대고 향후 대책을 논의한 결과 급한 대로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사흘 후에 실시할 예정이었던 농번기 보리 베기 가사 조력을 앞당겨 내일부터 실시한다. 이 사실은 비상 연락망을 통해 부락별로 학생들에게 전달한다.
--학급별로 환자 명단을 작성하여 이를 다시 부락별로 분류해서 내일 오전에 교사들이 부락을 나누어 맡아 방문해서 환자 학생들의 경과를 살핀다.
--내일 정오에 다시 학교에 모여 추후 대책을 논의한다.

다음 날 아침 박 선생은 망석리 열두 명의 환자 명단을 받아들었다. 거기에는 경심이와 미진이의 이름도 끼여 있었다.

망석리는 삼사십 호가 모여 사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박 선생이 털털거리는 구닥다리 완행 버스에서 내렸을 때 마을 앞 초록빛 바다는 무수한 물비늘에 휩싸여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산비탈에는 노랗게 익은 보리 이삭이 물결치고, 간간이 보리를 베는 농부들도 눈에 띄었다. 어디선가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가 왱왱 쏴아 쏴아 정적을 깨뜨렸다.

돌담길을 돌아서자 골목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경심이도 끼여 있었다. 경심이는 포대기로 동여맨 아이를 업고 고무줄을 넘다가 박 선생을 발견하자 깜짝 놀라 얼굴이 빨개졌다.

"다 나았니?"
"예."
"언제부터 괜찮았니?"
"엊저녁이요."
"거 참 요상스럽다, 잉? 어째서 학교에서는 아프다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낫는다냐? 혹시 꾀병 아니다냐?"
"아니랑게라우, 선생님. 그때는 정말로 정신없이 아팠당게라우."
"허허, 내가 도깨비한테 홀렸는갑다."

경심이도 쑥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등에 아이를 업은 채로 경심이를 앞장세우고 박 선생은 열두 명의 환자 학생 집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러나 감기 기운으로 몸져누운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집에 붙어 있지 않았다. 밭에 나가거나 개펄에 나가거나 아니면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모두들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말짱한 눈으로 배시시 겸연쩍은 웃음만 흘릴 따름이었다.

밭일을 나간 미진이는 박 선생이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었던지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씩씩하게 달려왔다. 교복을 벗고 아주머니 옷을 입으니 영락없는 농부 아낙네 형상이었다.

"선생님 오셨어요?"
"응, 왜 누워 있지 않고 찬바람 쐬고 다니느냐?"
"이제는 괜찮아요.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너는 왜 아팠는지 짐작 가는 데라도 있냐?"
"모르겠어요."
"허허, 거 참, 요상도 하지. 아무튼 다들 나았다니 됐다. 이제 가 볼란다."
"안 돼요. 아버지께서 곧 오신다 했어요. 점심 잡숫고 가시라고요. 모처럼 오셨으니 막걸리라도 한 잔 대접하시겠다고 했어요."
"고맙지만 지금 바쁘다. 학교에 가서 회의를 해야 하거든. 아버님께는 죄송스럽다고 전해 드려라."
"그냥 가시면 안 되는데......"

출장을 나갔던 선생들이 차근차근 돌아왔다. 어느 부락이나 사정은 엇비슷했다. 몇 명을 빼고는 한결같이 멀쩡하더라는 보고였다. 대책회의고 뭐고 머리를 맞댈 필요조차 없어져 버렸다. 무슨 전무후무한 선물이라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는지 방방 떠서 결전을 앞둔 야전군 사령관처럼 교장실로 교무실로 부산나게 들락거리던 장학사는 교사들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허탈하고 맥풀린 얼굴로 학교를 떠났다. 별 탈 없이 괴질이 사라졌다니까 안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찜찜한 얼굴이었다.

찜찜하기는 선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다 나았다니까 학생들이 계속 아프다는 것보다는 다행이라고 만세라도 불러야 옳을 일이었지만 호되게 시달리던 사건치고는 너무나도 뒤끝이 허망하고 감쪽같아서 아이들의 집단 요술에 놀아난 느낌이었다.

"내가 뭐랍디여? 그래 봤자 모조리 꾀병 아니랍디여? 그저 몽둥이가 약인디 선생님들이 너무 부드럽게 대해 주니까 이놈들이 어른 상투를 잡고 뒤흔든 거 아닙니까?"

학생주임 최 선생은 화풀이라도 하듯 밥그릇에 난폭하게 수저를 꽂고 소주잔을 쭈욱 들이켰다. 점심을 마치자 선생들은 우르르 숙직실로 몰려가 바둑을 두고 한 쪽에서는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학생들의 괴질이 꼬리를 감추자 이번에는 공 선생이 새삼 부아가 치미는지 붉으락푸르락 성깔을 부렸다. 바둑을 끝내고 교문을 빠져 나오자 갑자기 시부렁시부렁 투덜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다 끝났다니까 하는 말인데, 나 참 더러워서, 글쎄 학생들 아픈 것이 내 탓이라고 수군거렸다더라니까. 구렁이 잡아먹은 것하고 아이들 아픈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

복도로 날아든 꿩을 잡아먹어서, 학교 뒷산 소나무로 기어오르던 구렁이를 잡아먹어서 학생들이 아팠다더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아프다고 소동을 벌이던 때에는 이렇다 저렇다 변명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느라 마음 고생이 심했던가 보았다. 얼굴이 벌개진 공 선생을 박 선생은 좋은 말로 위로했다.

"못 되면 조상 탓이더라고 무슨 말인들 못 할랍디여. 이제 그만 잊어버리고 어디 가서 소주나 한 잔 꺾으입시다."
"그러세, 잡것! 술이나 실컷 마셔 버려야 분이 풀릴랑가."

바다는 점점 암청색으로 어두워가고 있었다.

그날 밤, 공 선생과 박 선생은 접대부까지 등장한 술집에서 거나하게 한 잔 꺾었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공 선생은 취기가 오르자 바락바락 악을 쓰며 노래를 불렀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가듯 그렇게 괴질은 원인도 밝혀지기 전에 흐지부지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공 선생의 분노도 잿불 사그라지듯 차츰 희미해졌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괴질의 진상이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반년쯤 지난 뒤였다.

"박 선생, 여기 봤소? 아이들 아픈 것 말이요. 몽둥이가 특효약이라지 않소?"

학생주임 최 선생이 의기양양하게 신문을 디밀었다.

"예, 저도 아침에 집에서 봤습니다."

박 선생은 잠자리에서 배를 깔고 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박 선생이 근무하는 여중학교에서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해 봄 제주도에서 강원도까지 열 개가 넘는 학교에서 똑같은 현상이 벌어졌단다. 그것도 거의 여자중학교에서만. 내노라하는 의사, 교육학자, 심리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원인을 찾아본 결과 중세 유럽에서도 똑같은 증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문헌에서 찾아냈다는 보도였다.

괴질의 명칭은 '집단 전환 반응'.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증상인데 의도적인 꾀병은 아니지만 한 사람이 아프면 다른 사람도 무의식적으로 아프고 싶다는 반응을 일으켜 결국 통증이 집단적으로 옮아가는 현상이란다. 그 문헌에는 치료법도 적혀 있었는데, 환자의 등뒤에서 갑자기 공포탄을 장전한 권총을 발사하거나 몽둥이로 등짝을 세차게 후려치면 깜짝 놀라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되돌아온다는 설명이었다.

박 선생은 무릎을 쳤다.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막연하게나마 그가 짐작했던 바와 거의 일치하는 진단이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아침에 읽어봤다 했는데도 최 선생은 신문을 억지로 떠맡기다시피 들이밀고는 당당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아마 자기가 치료법을 적중시킨 것이 자랑스러워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봉사 문고리 잡기로 등짝을 몽둥이로 후려치는 처방을 알아맞혔다지만 곰곰 따져보면 최 선생은 도리어 학생들에게 괴질을 유발시키는 원인을 제공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랬다. 곰곰 생각해 보면 '집단 전환 반응'뿐만 아니라 학교의 상공에 맴도는 온갖 괴질은 늘 학교라는 제도나 교사들이 학생들을 억압하고 찍어누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집단 발작이나 다름없었다. 어찌 보면 학교는 학생들에게 빡빡하고 딱딱하고 팍팍하고 지루하고 갑갑하고 답답한 강제수용소나 다름없었다. 숙제 안 해 온다고 조지고, 깜지 안 썼다고 조지고, 성적 떨어졌다고 조졌다. 늦게 온다고, 떠들었다고, 유리창 깼다고, 싸웠다고, 복장이 불량하다고, 말 안 듣는다고, 삐딱하다고,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걸리기만 하면 꾸중이요 벌이요 매질이니 억울하고 분통 터져서 심사가 뒤틀리고 배배꼬이지 않을 학생이 몇이나 되겠는가. 짜증나고 지치고 피곤하고 수고롭지 않은 학생이 몇이나 되겠는가. 차라리 아파서 덜컥 드러눕고라도 싶지 않은 학생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한 학교도 아니고 열 학교가 넘게, 제주도에서 강원도까지 방방곡곡에서 연약한 여학생들에게 괴질이 창궐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온갖 괴질을 예방하자면 학교를 자유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학문의 전당, 기쁘고 즐거운 삶의 도량, 살 맛 나는 삶의 터전, 아침에 눈만 비비고 일어나면 달려오고 싶은 곳, 다정한 삶의 공동체로 만들어야 바람직할 텐데 과연 그런 학교로 바꿀 비결은 무엇인가.

최 선생이 던지고 간 신문을 저만큼 밀어놓으며 박 선생은 깊은 고뇌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꿔거꺼엉, 다복솔이 우거진 학교 뒷산에서 꿩 울음소리가 골짜기를 들썩거리며 내려왔다.
조명준 전남 목포 청호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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