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 아픈 손가락

2022.07.18 09:20:49

너에게 신의 선물이 닿기를

<아이야, 너는 꽃이란다>

 

신은 당신에게 선물을 줄 때마다 그 선물을 문제라는 포장지에 싸서 보낸다. 선물이 클수록 문제도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자연히 당신에게 평화, 즐거움, 행복을 안겨주려면 그 이상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제 당신은 달라져야 한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 어려움 속에 감추어진 선뮬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선물이 없는 고난은 없다.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내 인생을 바꾼 스무살 여행>중에서

 

위의 글은 메모 수첩에서 자주 꺼내 보는 문장이다. 교직에 있을 때에도 아이들에게 즐겨 들려주던 문장이다. 순수하고 착한 아이들은 자신이 거치는 어려운 순간에 힘들어 할 때 위의 글을 들려주면 눈빛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곤 했다. 가정적으로 어려운 아이들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가난하고 힘든 자신의 불행 뒤에는 좋은 일이 기다릴 거라는 희망을 주는 언어는 위로가 된다는 걸 느낄만큼 순수했던 아이들.

 

시골 학교의 아픔은 바로 슬픔을 안고 사는 아이들의 가정환경이었다. 양쪽 부모가 다 있는 아이들은 절반도 채 되지 않았고 이혼가정이나 조손가정, 한부모가정이 더 많았다. 조부모를 찾아 도시에서 쫓기듯 밀려온 아이들이 학생수 감소로 위기에 몰린 시골 학교의 부족한 학생수를 채워주는 고마운 학생들이기도 했다.

 

원만하지 못한 가정에서 부모에게 버림 받고 할머니와 살던 그 아이의 눈빛은 늘 어둡고 슬펐다. 아침밥은 굶고 오고 점심에는 폭식을 했다. 그나마 학교에 오면 무료로 먹는 우유가 있고 무료급식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학교만큼 좋은 곳이 없던 아이들. 거기다 예체능 학원은 꿈도 꾸지 못할 아이들에게 다양한 방과후학교 프로그램까지 제공되니 학습환경은 도시에서 다닐 때보다 더 좋다며 좋아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우고 영어 회화나 컴퓨터 프로그램을 비롯해서 저녁돌봄까지 제공되니 학부모의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늘 배고프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아이는 공부보다는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그 아이 때문에 날마다 간식거리를 챙겼다. 수학 문제를 풀다가도 잘 생각이 나지 않으면, "선생님, 배가 고파서 그런지 생각이 안 나요. 왕사탕 하나만 주시면 안 돼요?" 사탕이든 빵이든 대기 상태였다. 때로는 농담처럼 "내가 니 엄마냐?" 그러면서도 가여운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배가 고프면 생각이 나지 않는 건 당연하다. 우리의 뇌는 탄수화물을 먹어야 돌아가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밥을 먹을 수 없다면 사탕이라도 먹어야 한다. 내 사물함에는 언제나 큼지막한 왕사탕 봉지가 있었다. 문제는 사탕을 먹은 후 양치질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 아이에게 사탕은 단순한 알사탕이 아니었다. 배고픔보다 더 고픈 사랑을 대신하는 언어였다.

 

1년에 한 번 볼까말까한 아버지를 만나는 명절, 소식조차 없는 어머니. 허리가 꺾인 백발의 할머니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해줄 리 없었다. 그런 아이에게 저 문장을 들먹이는 것은 말장난에 가까웠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헤쳐나가야 할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고난일 것이니.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주며 다독이고 전진하게 하는 일이 선생의 사명이었으니. 빈 젖꼭지라도 물리는 어미 심정이지만 희망의 언어를 포기하지 못했다.

 

이제는 어엿한 청년으로 자랐을 그 아이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은 계절 탓인가 보다. 제대로 세탁해 입지도 못한 겨울 옷은 늘 무겁고 칙칙하던 아이. 그런데 여름이 되어 옷이 짧아지면 다른 친구들보다 하얀 피부를 자랑할만큼 살결이 고왔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작았던 키에 뽀얀 살갗 덕분에 여자 아이들이 예쁘다고 놀리곤 했던 그해 여름. 장엄하고 듬직한 월출산이 구름모자를 둘러쓴 아침 풍경을 보며 아침독서를 시작하던 교실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아이에게만 옷을 선물할 수 없어서 우리 반 아이들 모두 단체복을 사서 입혔다. 학교에 오면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옷 때문에 기죽지 않고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노란 후드티를 입고 몰려다니던 우리 반 아이들은 어디서나 잘 보였다. 그런 다음 그 아이가 집에서 입고 온 옷을 다른 아이들 몰래 세탁기에 빨아서 말리곤 했다. 부모의 빈 자리는 컸지만 밝게 자라는 아이가 대견하고 고마웠다. 

 

학교가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아이는 그 여름을 다 보내기도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의지할 곳 없는 아이이니 동네에서 나서서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아침밥은 잘 먹고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어린 마음이 얼마나 헛헛했을까. 그나마 형이 있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그 형은 오락게임에 빠져서 피시방을 전전했다. 사춘기에 이른 형이 힘든 현실을 잊기에는 피시방 만한 곳이 없었으리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형제가 차분하고 착한 심성을 지녔다는 점에 안도했다.

 

이제는 건장한 청년이 되었을 그 아이가 멋진 삶의 주인공이 되었길! 방학이 제일 싫다던 아이, 밥 먹는 게 제일 좋다던 아이, 친구들과 노는 게 천국이라던 아이, 영리해서 말뜻을 잘 알아듣고 자신을 일으키려고 애쓰던 아이. 영리한 눈빛으로 다른 아이들보다 악기를 잘 다루던 아이가 불던 리코더 소리가 아련하다. 작고 다부진 몸으로 운동도 잘하던 그 아인 친구들 속에서 늘 씩씩하고 당당해서 보기 좋았는데. 아픈 손가락이어서 그런지 더 생각나곤 한다.

 

지금쯤 그 아이가 신의 선물을 받아든 상자를 열고 깊은 숨을 내쉬며 인생의 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있었으면 참 좋겠다. 군대를 갔거나 대학생이 되어 젊음의 순간을 소중히 하고 있기를! 가까운 기억은 잊혀가는데 오래 전 아이들의 모습은 그대로 생각나는 요즘. 기억에 선명한 아이들은 대부분 눈물을 머금고 살던 아이들이었다. 슬픔은 오래 가는 추억인가 보다. 요즘 유난히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 아픈 손가락이 더 생각나는 걸 보니 늙어가는 모양이다. 내 추억의 사진 속에서는 여전히 2학년 꼬맹이로 남은 그 아이에게 신의 가호를 빈다. 

장옥순 작가, 전 초등 교사 jos22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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