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으로 대를 이어오고 있는 집안은 스위스의 세계적인 언어학자인 소쉬르 가문을 들 수 있다. 소쉬르 가문은 5대째 학자를 배출한 세계적인 학문의 명가이다. 소쉬르의 조부 니콜라스 데오도르는 즈네브 대학의 지리학과 광물학 교수를 지냈고, 부친 앙리는 지질학자로 미국과 멕시코를 탐험하기도 했다. 소쉬르는 세계적인 언어학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산 윤선도 가문이 실용적인 학문을 연구하는 가풍을 대대로 이어왔다. 양반가문이지만 공재 윤두서(1668~1715)에서 시작해 그 아들 윤덕희 - 윤용에 이르는 3대 화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양반들은 책을 읽고 벼슬을 해야 성공하는 시대에 이와 거리가 먼 그림에 몰두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 아들이 3대에 걸쳐 화가가 된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진화론 처음 제기한 다윈의 祖父
할아버지가 연구했던 학문을 손자가 물려받아 연구하고 또 그 손자의 후손들이 그 연구를 완성했다면 그 가문은 세상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 집안이 인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규명한 ‘진화론’을 내놓은 찰스 다윈(1809~1882)의 가문이다.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은 진화론에 대해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인물이다. 그 손자인 찰스가 할아버지를 이어 본격적으로 연구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진화론을 내놓았다. 이는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기독교의 창조론을 뒤엎는 획기적인 가설이었다.
찰스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1731~1802)은 과학자이자 의사, 발명가, 시인이었다. 그는 18세기 중엽 당시 영국에서 매우 유명한 의사였다. 1756년부터 영국 리치필드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불치병 환자를 구해 일약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 생태에 대한 방대한 내용을 담아 진화론을 제기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에라스무스가 처음으로 진화에 관한 관념을 피력했을 때는 1770년이다. 그는 그가 타고 다니던 마차에 라틴어로 ‘E Conchis omnia’를 붙이고 다녔다. ‘모든 것은 조개로부터 왔다’는 뜻이다. 즉, 만물이 조개로부터 탄생했다는 의미로 진화론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이지만, 그는 진화론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어 마차에 살짝 그려 넣고 다녔다. 그러다 혹시 부자들이 이를 알아챌까봐 이를 지우고 책의 표지에다 새겨 넣었다. 부자들은 대부분 기독교도들이어서 창조주인 하느님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조개에서 만물이 탄생했다고 한다면 경악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의사인 그에게 치명적이다. 하느님을 불신하는 사람에게 아무도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가 유명한 명의였듯이 아들인 로버트 역시 의사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 역시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진료를 해주었다. 찰스는 아버지와 동행하면서 가난한 환자들을 접하며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배려하는지,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하면서 진료를 어떻게 하는지를 보며 철이 들어갔다.
조부의 책 통해 자연학자 꿈 키워
어린 시절 다윈의 관심은 자연사에 쏠려 있었다. 아버지가 틈틈이 가르쳐준 동식물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주된 관심으로 변해간 것이다. 찰스는 당시 화제가 된 길버트 화이트의 〈셀본의 자연사〉를 읽으면서 자연에 대한 관심에 점점 빠져들었다.
찰스는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의학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당시에는 마취제 없이 수술을 했고 찰스는 아버지를 따라 왕진을 갔다 수술하는 광경을 보고 너무 끔찍해 의사에 대한 매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한다. 반면 여행과 자연학에 대한 독서를 열심히 했다. 특히 독서로 자연사에 대한 관심을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고민은 깊어갔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에게 의학을 포기하고 목사가 될 것을 권유했다. 아버지의 생각으로는 당시 곤충 수집을 하는 목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사에 관심이 많은 찰스의 적성을 살리면서 직업인으로 살기에는 목사가 안성맞춤이었다. 자연학자로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목사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관심분야인 자연사도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찰스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19살에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과로 옮겼다.
찰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이 대학의 교수로 식물학자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와 지질학자인 애덤 세지윅이라는 두 신부 과학자를 알게 되었다. 이들에게서 동·식물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우면서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이들과의 만남으로 그는 신부 과학자라는 인생의 목표에서 자연학자로서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잡았다.
다윈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의외로 쉽게 다가왔다. 헨슬로가 찰스에게 세계를 항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것이다. 당시 영국 군함 비글호가 해안조사를 위해 태평양과 인도양을 항해하는데, 여기에 승선해 자연관찰을 하라는 제안이었다. 찰스는 5년 동안 항해하면서 진화론을 규명할 역사적인 단서를 얻게 된다. 빌 게이츠가 폴 앨런과 스티브 발머를 만난 경우처럼 찰스 다윈도 친구와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도약하게 했다. 아들을 목사로 만들어야겠다는 아버지는 처음에 아들의 여행을 반대했지만 아들이 여행을 통해 과학적인 발견을 접목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허락했다.
찰스는 18살 때에 할아버지가 쓴 〈주노미아〉를 읽고 크게 감탄했다. 28살 때에는 노트에 자기 생각들을 기록하면서 자기가 할아버지를 이어 진화론을 연구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할아버지 에라스무스가 1794년에 출간한 〈주노미아〉는 그의 손자가 1859년에 출판한 〈종의 기원〉보다 65년 앞서 진화가설을 제기한 것이다.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출판되었고 독일어, 프랑스어, 이태리어로 번역됐다. 에라스무스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식물과 동물들은 원시의 바다에서 자연적인 생명력에 의해 발생한 극도로 미세한 현미경적인 존재들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아버지의 후원으로 연구 완성
다윈이 5년 동안의 항해에서 돌아온 것은 28살인 1837년이다. 다윈은 이때부터 〈종의 기원〉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미뤄야 했다. 결혼을 하면 장기간 여행을 할 수 없을뿐더러 생계비를 벌기 위해 대학교수 같은 직업을 구하든지 근검절약하며 근근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혼이 부담스러웠던 그는 고민 끝에 아버지에게 결혼문제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매년 수입이 1만 파운드이고 재산이 10만 파운드가 된다면서 전폭적으로 후원해주겠다고 말한다. 재력가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는 평생 돈 걱정 없이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결국 연구를 시작한 지 20년만인 50세 때에 세계사를 뒤흔든 연구 성과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찰스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교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돈에 대한 활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돈을 모으지만 그 돈을 쓸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모으는 데 열중한다. 그래서 나중에 죽음에 임박해서는 가족끼리 돈에 대한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는 돈을 왜 모으는지에 대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녀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돈은 가문의 악의 화신으로 변한다.
찰스와 아버지 로버트는 돈 문제로 부자 간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아버지는 모아둔 돈을 아들이 연구에 전념하게끔 전폭적으로 후원해주었다. 아버지는 의사와 재테크를 통해 모아둔 재산을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고 가문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뒤흔든 진화론 연구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로버트는 재력가인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 어떻게 돈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부자아빠들이 다윈의 아버지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을 쌓아놓고도 자녀들에 게 무관심한 부모들은 얼마든지 많다. 발명왕으로 갑부가 된 에디슨은 자녀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아 세 자녀들이 모두 가난뱅이로 살아야 했다. 또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억만장자였던 피카소는 화가인 아버지가 그를 위대한 화가로 만드는 데 헌신했지만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피카소)을 따르면서 아버지를 ‘배신’한다. 더욱이 여성편력(7명의 여성과 동거)이 심했던 그는 아들과 손자들을 방치해 결국 장남은 알코올 중독으로 자살하고 손자도 자살하는 비운의 가정으로 만들었다.
손녀에 의해 빛을 본 〈종의 기원〉
다윈 가문이 진화론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대를 거듭하면서 진화론 연구를 진행해왔다는 점이다. 할아버지가 진화론 연구에 첫 깃발을 들었다. 할아버지는 무엇보다 후손들에게 자연과학에 매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찰스의 아버지 또한 평생 아들이 진화론을 규명할 수 있도록 연구를 뒷받침하는 등 인생 스승으로서 멘토 역할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찰스의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공동으로 연구를 했다. 찰스의 손녀는 할아버지가 쓴 자서전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애썼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독교에서는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150년 전에는 자칫 진화론을 주장했다가 가문이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찰스는 이와 관련된 민감한 내용은 빼고 자서전을 출간했었는데, 그의 손녀가 온전한 자서전을 내 할아버지의 연구업적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진화론은 당시 서구사회에서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지동설처럼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경우도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갈릴레이가 천문학자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에서 그를 전속학자로 모셔와 연구를 후원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세계적 대문호인 괴테도 바이마르 영주인 아우구스트 공작이 평생 후원자가 되었기에 마음 놓고 일생을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학자나 예술가들이 자신의 후원자를 만난다는 것은 생업에 신경 쓰지 않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찰스 다윈은 다름 아닌 부자아빠가 평생 후원자였기 때문에 진화론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찰스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을 출간했다.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는 진화론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진화론을 주장한 그의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진화론은 다윈 가문이 할아버지와 손자, 손자의 손자까지 5대가 매달려 연구해온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절묘한 가학과 가업의 가문 결합
그런데 다윈 가문이 진화론을 통해 가학을 대물림했다면 다윈의 처가는 가업을 대물림한 집안이다. 다윈의 처가는 지금도 도자기회사로 유명한 웨지우드 가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다윈의 처가가 다름 아닌 그의 외가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처갓집을 둔 것이다.
이는 다윈의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인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에라스무스는 1776년경에 당대의 과학자와 자연주의 철학자들의 사교 클럽을 만들었다. 이 모임에는 18세기 영국에서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다 모였다. 회원으로는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왓트, 산소를 발견한 조셉 프리스틀리, 위대한 도예가 조시아 웨지우드 등이 있었다. 미국 사람으로서는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된 토마스 제퍼슨과 벤자민 플랭크린 등도 포함돼 있다.
웨지우드 가문은 25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다. 조시아 웨지우드는 에라스무스 다윈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다. 에리스무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에든버러 대학에서 고전문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반면 조시아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고 열다섯 살에 형에게 도제교육을 받아 도기장이 되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처럼 조시아도 과학과 발명에 푹 빠져 있었고 정치적 견해와 사상에서도 서로 통했다. 조시아는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한 덕분에 사업을 크게 번성시켜 한때 유럽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를 둔 도자기공장이 됐다. 또 영국여왕이 찻잔세트를 주문하면서 웨지우드는 ‘황실도공’의 직위에 올랐다.
이들의 우정은 결국 양가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인연으로 웨지우드 가문은 두 번에 걸쳐 다윈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게 된다. 찰스 다윈의 어머니가 웨지우드 가문이고 아내 역시 이 가문의 딸로 다윈은 외사촌과 결혼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다윈 가문과 웨지우드 가문은 절묘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윈 가문은 정신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가학(진화론)으로 명가를 이루었고, 웨지우드 가문은 먹고사는 가업(도자기)을 통해 세계적인 명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대졸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등 갈수록 먹고살기가 힘들어지고 있어 우리나라도 ‘가업’ 문화가 이미 불기 시작했다. 음식점에 가도 2대가 일하는 광경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가업만들기가 유행처럼 붐을 이룰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가업과 함께 대대로 내려오는 가학(家學)이 있다면 더 격이 높아질 것이다. 같은 학문을 가족들이 공유하고 또 대를 이으면서 연구할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좋은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밥’만으로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밥과 함께 정신적인 양식이 필요한 것이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이 가업이라면, 정신적인 양식은 가학이라고 할 수 있다. <끝>
- 이번호를 끝으로 세계 명문가의 교육철학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