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변했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살아가는 방법도 변했고 가치척도도 변했다. 이런 판국에 교육만이, 교육에 대한 생각, 교사들에 대한 기존 관념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성직자로서의 교직을 사양한 것도 오래전 일이고,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식만을 전달하는 보따리장수라는 핀잔을 들은 지도 한참 됐다.
세상이 변했으므로 교육에 대한 생각도 변하고 교직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꿔야 함은 물론이리라. 근세 이전의 교육은 과거의 가치체계와 지식을 담습하는 데서 출발했다. 당연히 노인 중심의 문화와 가치관, 과거지향의 교육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세의 교육은 그렇지 않다. 미래의 세대들에게는 삶을 살게 하고 그들의 꿈을 실현하게 하기 위한 능력과 창의성을 조장하는 데에 가장 큰 무게 중심이 얹혀져야 한다. 따라서 청년중심의 문화와 가치관, 미래지향의 교육이 당연히 선호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사상은 어떤 모습이 제격일까. 무엇보다도 오늘의 교사는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과 진취성을 갖고 미래에 대한 적응력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교사는 자기 갱신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남을 가르치기에 앞서 스스로 배우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교사는 청년문화를 이해하려 애쓰고 어린 세대들의 창의력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교사는 어린 세대들에게 본을 보여주는 사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생각의 본보기, 행동의 본보기, 더 나아가 삶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다가온 큰 문제는 본보기가 사라진 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서로 어긋나는 데에 있었다.
해마다 5월이면 스승의 날이 찾아온다. 신록이 참으로 어여쁜 계절. 눈길 가는 곳마다 연초록 물감이 들고 숨결을 들이 쉴 때마다 초록빛 향기가 가슴 깊숙이 빨려 들어오는 5월의 한 복판.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앞서고 석탄일까지 이쪽저쪽에서 기웃대는 눈부신 계절에 스승의 날은 찾아온다.
교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과연 스승의 날은 무엇인가. 스승의 날은 무엇을 의미하는 날이어야 하는가. 스승의 날이 오면 나는 또 버릇처럼 또 한 송이의 붉은 카네이션을 아이들로부터 받을 것이다. 내가 참으로 저들의 부끄럼 없는 한 사람 스승인가. 과연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면구스러워 잠시 가슴에 품었다가 이내 책상 위에 내려놓는 붉은 꽃, 카네이션. 아이들의 본보기로, 더 나아가 세상의 본보기로 살지 못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아 결코 편안한 마음일 수만은 없다. 차라리 스승의 날에 나는 즐겁고 기쁘고 환한 마음이기보다는 조금은 쓸쓸하고 어둑한 마음이기 십상이다.
그래도 교직은 다른 직종보다는 가치가 있고 충분히 아름다운 직업이다. 한 사람의 농부가 땅을 일구어 하느님의 선물을 경작하는 사람이요, 한 사람의 시인이 모국어를 다듬어 인간의 정신과 모국의 정서를 가꾸는 사람이며 한 사람의 성직자가 신의 대리인으로서 인간의 영혼을 주관해주는 사람이라면 한 사람의 교직자 또한 어린 세대들을 가르치고 삶의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그들의 마음 밭에 등불을 달아주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직자는 농부나 시인이나 성직자와 함께 `인간의 사업'에 기꺼이 동참하는 사람이요 지구의 일에, 더 나아가 우주의 사업에 관여하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교직자들에겐 결코 물질의 큰 축복도 따르지 아니하고 명예의 큰 관도 주어지지 아니한다. 사회적 권력 또한 거리가 먼 자리이다. 다만 잔잔한 삶의 환희와 조용한 존경과 신뢰가 허락되는 것이 교직이다. 세상의 권력과 명예와 재력을 원한다면 처음부터 교직에 들어서지 말았어야 할 일이다. 진정 그것이 그러하다면 애당초 시장으로 가거나 고시촌으로 가거나 공장이나 정치판으로 갔었어야 할 일이다.
교직자들이야말로 그의 인생행로에서 어제나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철저히 내일을 사는 사람들이다. 오늘 내가 가르친 아이들에게 가르친 효과가 나타나기로는 10년, 20년은 착실히 기다려야 할 일이요, 나의 삶은 보다 더 많이 내일날의 사람들의 삶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치어로 놓아보낸 연어가 어른 고기로 자라, 그것도 울긋불긋 혼인색을 띄고 나에게로 힘찬 지느러미 질로 돌아올 것인가, 아니 돌아올 것인가. 좀은 답답하고 지루하고 허전한 대로 두고 보고 또 두고 보아야 할 일인 것이다.
`그대의 직업을 밥벌이로 삼지 말고 도락으로 삼으라' 지금부터 140년 전 미국에서 살았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이 말한 마디를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이제는 걸어가는 뒷모습이 허전해 보일 것이 분명한 나 자신에게 또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