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희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을 마주한 날은 유난히 추웠다. 마산의 구도심 창동의 곰탕집에 하얀 연기가 오르고 갈치를 굽는 냄새가 났다. 처음 본 시집에는 그녀가 직접 그렸다는 붉은 양귀비꽃 한 송이가 처연히 웃고 있다. 양귀비는 잠, 망각, 죽음 뒤의 안식이라는 원형적 의미를 지닌다.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딸 페르세포네를 납치당한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는 깊은 시름에 빠져 대지를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잠의 신 히프노스가 고통을 잊게 해주는 양귀비꽃을 주었고, 그녀는 그 꽃의 향기를 맡고 잠시나마 슬픔을 잊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표지에 고독하게 핀 한 송이 양귀비는 세상의 소란 속에서 내면의 정원을 지키려는 고립된 자아의 원형으로 읽힌다. 그녀의 시는 아프고 슬프고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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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울림은 삶을 바꿔 놓을 수 있다. 즉, 시의 주된 기능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가스통 바슐라르는 <몽상의 시학>에서 말한다. 문학은 존재를 생성케 하는 힘을 포함하고 있다. 자신의 언어가 새로운 존재가 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표현인 동시에 존재의 생성이기도 하다. 박숙희의 시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생성하는 과정 있다. 시에 등장하는 섬, 시, 기억, 물의 이미지를 통해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절절한 삶의 언어가 생성된다. 느낄 수는 있지만 잡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자신을 따뜻한 섬으로 치환하고, 손 내밀면 지나가는 바람과 악수하고, 긴 아픔을 짧은 기억으로 만들고자 한다. 마치 자신을 묶고 있는 무거운 사랑의 굴레를 아프고 슬프게 지우고 빛을 향해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는 같은 시들이다.
1. 섬이 된 그녀
'어떤 장소를 알게 되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는가?'라는 질문에 이-푸-투안은 <공간과 장소>에서 "한 장소의 느낌을 획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매일 매일 수년에 걸쳐 반복되는 대부분의 찰나적이고 강렬하지 않은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시각과 청각과 후각의 특별한 조합으로 일몰과 일출시간, 일과 휴식의 시간처럼 자연적이거나 인공적인 리듬의 독특한 조화인 것이라고 말한다. 장소에 대한 감정은 사람의 뼈와 근육에 새겨진다. 박숙희의 시집에서 눈길이 머무는 것은 그녀의 피부와 호흡과 머릿결에 새겨진 그녀의 다른 이름인 ‘섬’이다. 「매물도」, 「모래 위의 잠」, 「오래된 섬」, 「걸어온 섬」, 「섬, 외도·2」, 「매물도 끝사랑」 등의 시편들은 그녀의 세계관이 ‘섬’과 ‘물’, 그리고 ‘기억’이라는 매질(媒質)을 통해 어떻게 변모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가슴에 소매물도가 떠다녀서 죽것소
누구 그 매물도 가져갈 사람 없소
바닷가, 물빛 여울목에 자라는
나만의 섬
매
물
도 / 「매물도」 전문
들뢰즈에게 사건은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들이닥치는 ‘마주침’이다. 시인에게 섬은 고립된 장소가 아니라, 가슴 속에서 떠다니는 역동적인 사건이다. “가슴에 소매물도가 떠다녀서 죽것소”라는 표현은 객관적 지명인 매물도가 시인의 섬세한 심상 안으로 들어와 내밀한 통증이자 사랑의 ‘사건’이 되었음을 뜻한다. 누구에게 줄 수도 없는 ‘나만의 섬’은 주체의 내면과 대상이 하나로 겹쳐지는 현장이다. 곧 그녀는 섬이고 그녀가 견디는 슬픔의 무게이다.
「모래 위의 잠」에서 시인은 모래라는 부드럽고 가변적인 질료 위에 ‘잠’과 ‘시간’을 불러들인다. 기억의 기둥은 새의 발자국을 따라 우주 밖까지 나아가는 상상력으로 비상을 꿈꾸며, 다시 “모래를 기둥으로 세워 기억을 덮는” 행위를 통해 흩어지기 쉬운 슬픔을 물질화하여 갈무리하려는 섬세한 의지이다. 별을 올려다보며 모래의 집에 눕는 행위는 우주와 자아가 합일되는 안식이다. 섬은 곧 그녀이고 우주이고 나아가 사랑의 아픔을 심어두고 우주를 향해 팔을 벌려 돌아올 수 없는 마음의 거리에서 그를 보내고 온전한 나로 서려하는 슬프고 힘찬 표상이 보인다.
별이 몸을 푸는 밤
어둠 속을 걷다가 발등 푸르러진 여자가
섬 그림자 속에 들어
캐시밀론 이불 한 채 만든다
접힌 사랑 앞에서 몸으로
바다의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그 섬이 한낮을 내려놓을 때쯤
내 몸에서 포말 냄새를 풍긴다
섬 하나가 산달이 되자
몸속의 강물 소리 들으며
그 여자 몸을 푼다 / 「오래된 섬」 부분
「오래된 섬」과 「걸어온 섬」에서 섬은 시인과 함께 나이 들고, 함께 아파하며, 마침내 함께 ‘몸을 푸는’ 존재가 된다. 섬 하나가 산달이 되어 여자가 몸을 푸는 장면으로 시각화하여, 여자는 섬이 되고, 섬은 여자가 된다. 포말을 이불처럼 덮고 바다의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섬세한 심성은, 고통을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전환하는 배치를 보여준다.
파도 소리로 돌아오는 그대, 그대의 긴 늪에
소매물도 만나기 위하여 든 나는
발목이 단단히도 잡혔던 것
등대는 높이 날아가는 갈매기 부리에
단단한 단추를 달아 두었다
꼭꼭 감추어둔 그 집 서랍대문 앞에서
가슴에서 흘러내릴 갈매기 날갯짓
단단히 묶어두기로 한다 / 「매물도 끝사랑」 부분
「매물도 끝사랑」에서 시인은 상처 입은 세계를 치유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한다. 갈매기의 부리를 바늘 삼아 갈라진 바다를 꿰매는 이미지는 분리된 것(이별, 질병, 상처)을 다시 삶의 의지와 연결하려는 섬세한 복원이다. 슬픔의 영토에서 벗어나 파도 소리와 등대, 갈매기의 날갯짓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치유의 몸짓으로 볼 수 있다. 외과수술을 하듯 천천히 기워진 마음은 너덜너덜하지만, 그곳에 단추를 하나 달아 여미어 보고 단단히 묶어두고자 한다. 슬픈 사랑도 갈매기 부리를 바늘삼아 천천히 수를 놓으면 떠난 사람에 대한 집착과 갈망이 천천히 정화의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본다.
2. 고통을 먹고 발아하는 시의 씨앗들
내 몸의 일부분이었던 갑상선 암이었던
나비와 이별을 하고 보았더니, 폐암 그 후
시월 첫날 내리는 비는 바다를 그리워한다
나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바다였을까
<중략>
오늘 이후 바다로 반성문을 들고 갈
무게가 작아지도록 노력해야겠다
한참을 울고 난 후, 눈물을 두 손으로
닦아 보니
눈물이
반성문이 되었다 / 「일기 2」 부분
「일기 2」에서 암과의 조우는 육체적 영토를 침범한 거대한 현실이다. 하지만 시인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바다로 반성문을 들고 갈 무게"를 고민하며 죽음의 공포를 깊은 성찰로 승화시킨다. 그녀는 병마와 싸우며 꿈에서도 시를 썼다고 한다. 깊은 어둠이 빛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길이 되듯이 자기 안에 숨 쉬는 시의 씨앗이 고통을 거름으로 조금씩 발아하는 것이다. 「병동에 걸린 초상화」는 병마로 인해 육체는 고통스럽게 균열하지만, 오히려 "비워둔 하늘을 향해 가는" 넋의 파편들이 솟구친다. 시인은 고립된 병실 안에서 심연의 강을 묵묵히 응시하며 영혼의 항해를 지속할 때 빛의 스펙트럼 같은 시가 그녀의 곁으로 온다고 이야기한다. 자기 속에서 넘쳐나는 시들이 병동에 걸린 초상화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문자메세지7」에 등장하는 '남천'과 '봉암 갯벌'은 새로운 공간의 변용을 보여준다. 강의 공간인 남천은 "너랑 나랑 만나서" 봄날의 갯벌로 나아가는 장소다. 갯벌은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경계의 섬'이며, 이곳에서 가슴 깊이 쌓여있는 슬픔은 비로소 구체적인 위로와 재회의 서사를 얻게 된다. 이 시집에서 인상적인 문자메세지 연작은 주절주절 누군가와 통화하는 듯하다. SNS가 일반화 돼버린 현재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사소한 이야기를 들판의 풀처럼, 하늘의 별처럼 그냥 자동기술법처럼 펼친다. 봄비가 적시듯 그렇게 시인의 입을 통해 나온다.
「약속」에서 "내 안의 우물이 되어 고인다"라는 부분은 시인이 그리워하는 띠뜻한 안식처이다. 시적 자아의 내밀한 섬(우물) 속에 머물게 함으로써, 상처받고 상실한 사랑을 치키는 작은 장소로 치환하는 모습이다.
3. 기억의 진정한 이름은 배웅하는 따뜻한 손길
실비아
슬픈 기억
지쳐있던 아스팔트에 가뭄의 혼적을 지우는
가을비가 내렸다
발이 시리다, 이 몸
詩는 창가에 매미껍질로 떠 있다
밤마다 발이 시리다, 비린 시는 살갗 냄새
촉각을 흔든다
<중략>
희게 피어날 구름의 시어詩語는
설명할 수 없는 부호를 남기고
용지리 387번지 기적소리 스며들면
거북등같은 마당에
나 실비아로 서서
왔다가 가는, 누군가를 배웅할 것이냐 / 「실비아」 부분
바슐라르는 물을 ‘완전한 슬픔’의 물질이라고 하였다. 박숙희의 시에서 기억은 물의 이미지(가을비, 이슬, 눈물, 강물)에 동반한다. 「실비아」에서 가을비는 아스팔트의 가뭄을 지우지만, 화자에게는 "발이 시리다"는 촉각적 통증으로 전이된다. 이는 그리운 이에게 닿지 못한 결핍이 기억이라는 액체가 되어 시인의 심층(발)으로 흘러들었음을 의미한다. 추억은 기억 속에서 박제된 것이 아니라 비로, 눈물로 이슬 등으로 치환되어 현재의 감각을 뒤흔들고 있다.
사랑은 짧은 기억에 머문다
평행선
아랫목 공간 속 자리 잡는 기침병명 커턴 사이로 비스듬히 누운 바퀴발자국
야인의 기억이라며 이탈하지 않는 헐렁한 유혹이다
사랑은 짧은 기억에 머문다
평행선
그 경이로움에 다가가 본다고 해서 뼈마디의 찬바람은
사랑을 담아내지 않는다
사랑은 짧은 기억에 머문다
평행선
동상 걸린 손금을 따라나선 사랑의 온기 젖은 신발을 말린다
알맞게 익은 짧은 울음 기억 평행이론술의 빛깔이다
사랑은 짧은 기억에 머문다 / 「사랑은 짧은 기억에 머문다」 전문
기억이 물의 형태를 띠다가도 다가가지 못하는 좌절의 순간에는 차가운 얼음으로 변모한다. 「사랑은 짧은 기억에 머문다」에서 반복되는 ‘평행선’은 결코 만날 수 없는 나와 그의 거리를 상징한다. 다가가려 노력할수록 돌아오는 것은 "뼈마디의 찬바람"과 "동상"이다. 이는 ‘물의 응고’이며, 유동적이었던 사랑의 기억이 상처로 굳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시인의 심층 기저에는 ‘닿을 수 없음’에 대한 근원적 공포가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얼어 있다. 시인에게 긴 아픔이었던 사랑을 짧은 기억으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보인다. 그가 준 깊은 아픔이 아직도 그녀의 심장에 얼음으로 남아 삶의 갈피마다 다가선다. 하지만 이 차가운 기억 속에 침잠하지만은 않는다. 「그대에게」와 「슬픈 기억」에서 등장하는 불(촛불, 노을, 태양)로 스스로 정화하고 있다. "젖은 신발을 말린다"라는 행위는 물(슬픔)과 불(온기)이 만나는 지점이다. 시인은 슬픈 기억을 불의 온기로 말리며, 고통을 "알맞게 익은 짧은 울음"으로 승화시킨다.
시인이 생각하는 기억의 진정한 이름은 ‘배웅하는 손길’이다. 시인은 용지리 387번지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강물로 흘러가는 기억들을 향해 손을 흔듭다. 그 손은 "섬섬옥수"처럼 곱지만, 동시에 "동상 걸린"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운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한 기억의 소산들은 강기슭의 물줄기가 되어 흘러가지만, 시인은 그 흐름을 막지 않고 온전히 몸으로 겪어낸다. 결국 실비아에게 기억이란 상실의 고통을 물질화하여(물과 불), 자신의 영혼을 닦아내는 가장 고독하고도 아름다운 수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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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스펙트럼으로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
박숙희 시학의 중심에는 육체의 고통을 우주적 빛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헌신이 있다. 섬이 산달을 맞이하고 몸속에서 강물 소리를 듣는 그 경이로운 순간은, 아픔의 임계점을 넘어 새로운 생명을 밀어 올리는 시인의 환희를 보여준다. “몸살하는 봄을 끓였다”라는 고백은 자신의 생을 뜨겁게 달구어 낸 사랑의 증거이다. 육체의 고열(高熱)을 통과하며 슬픔의 찌꺼기는 증발하고, 그 자리에는 무지개색 빛의 정동(Affect)만이 찬란한 무늬로 남았다.
그녀의 가슴 안에서 묵묵히 발효된 시의 씨앗들은 이제 민들레 홀씨가 되어 경계를 허물고 도약한다. 시인의 방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낯선 풍경 속으로 흩어지는 그 여린 입자들은, 시인이 세상에 보내는 가장 따뜻한 초대장이다. 자신의 상처를 보편적인 빛으로 환원시켜 우리 모두를 위로하겠다는 다정한 약속이다. 바람과 악수할 수 없던 옛 안타까움은 이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환한 빛의 스펙트럼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문다. 이제 시인은 “아무 이유 없이 바람이 되어 웃는” 자유롭고 맑은 영혼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침묵하는 신의 곁에서 시인은 묵묵히 ‘시 밥’을 짓는다. 누구도 정답을 일러주지 않는 고독한 삶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끓여 따뜻하고 향기로운 시의 양식으로 내어놓는 것이다. 살아가는 이유가 곧 시 밥을 짓는 일이라 말하는 시인의 뒷모습은, 지극한 평범함 속에 감춰진 거룩한 성자의 그것과 닮아있다.
시 밥을 짓는 세상의 한복판에 서 있는 박숙희 시인의 앞날에 눈부신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고통의 갯벌을 딛고 일어선 그녀의 발걸음이 앞으로 더 넓은 빛의 지도를 그려내며, 한국 시단의 귀한 밀알로 발아하기를 기대하고 기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