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오솔길-19> 0의 3대 의미

2003.12.11 15:51:00


바빌로니아에서 0은 독자적 의의는 없고 다른 숫자의 자릿값을 정해주는 보조적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런 관습은 그후 그리스 시대에 이어지도록 변함이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기준으로서의 0'이란 관념은 17세기에야 생겨났다.

0의 개념이 가장 먼저 싹튼 곳은 바빌로니아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때 형성된 0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0을 '없음'의 개념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오직 '자릿수'를 표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예를 들어 1004란 숫자를 보자. 이것을 한자로 쓰면 '一千四'가 된다. 로마숫자는 한자의 표기법과 약간 다르며 이에 따르면 'MIV'로서 1000을 뜻하는 M과 4를 뜻하는 IV를 그냥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것을 IVM으로 쓰더라도 역시 1004가 된다. 어쨌든 한자나 로마숫자는 각 글자가 고유의 값을 가질 뿐 쓰인 위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에서는 숫자가 쓰인 위치에 따라 다른 값을 갖는 '자릿수법'을 최초로 개발했다. 그리고 이것은 수학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자릿수를 처음에 단순히 '띄어쓰기'로 해결했다. 즉 '십사'는 '14' '백사'는 '1 4' '천사'는 '1 4' 등으로 썼다.

하지만 이것은 혼동의 우려가 너무 많았으므로 마침내 빈자리를 나타내는 0을 발명하여 '천'을 '1004'로 쓰게 되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1004'에서의 0은 오직 1의 자릿수가 '천'이란 점을 가리키는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즉 이때의 0은 독자적 의의는 없고 다른 숫자의 자릿값을 정해주는 보조적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관습은 그후 그리스 시대에 이어지도록 변함이 없었다.

그리스 수학은 오늘날 모든 학문의 원류라고 간주될 정도로 발달했다. '만물은 수'라는 절대적 신념을 피력한 피타고라스, 불멸의 저서 '기하학원론'을 쓴 유클리드 등이 그 위대한 전통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이 '무로서의 0'의 관념을 모른 채 그토록 심오한 연구를 했다는 것은 오늘날 돌이켜보면 신비로울 정도다. 그러면서도 0보다 훨씬 난해한 개념으로 보이는 무리수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를 남겼다.

'무로서의 0'의 관념은 인도에서 비로소 형성되었다. 그것도 기원 후 7세기경이라는 늦은 시기였다. 하지만 한번 완성되자 그 편리성이 즉각 인식되어 동으로는 중국 서로는 유럽으로 순식간에 전파되었다. 인도는 '무로서의 0'이란 관념뿐 아니라 ?'의 기호를 이처럼 '동그라미'로 완성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인도-아라비아 숫자'는 전세계로 퍼져 적어도 숫자에 있어서는 전 인류가 하나로 통일되었다.

끝으로 '기준으로서의 0'이란 관념은 17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중세와 근세의 수학자들은 수식을 풀 때 자꾸만 등장하는 '음수'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무로서의 0'의 관념에 따르면 0의 크기는 없다. 그런데 음수는 그것보다 더 작은 크기를 가진다는 뜻이어서 불가사의와 같았다. 그러다가 0을 기준점으로 보고 이를 중심으로 음수와 양수가 대칭을 이루며 배열된다는 관념을 얻게 된 후 깨끗이 해결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0은 이러한 3대 의미를 가진다. 학생들로 하여금 이 역사적 과정을 잘 음미하게 하면 선현들의 노력과 0의 의미를 함께 깨우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고중숙 순천대 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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