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오솔길-18> 과학적 리얼리티

2003.11.26 13:30:00


어떤 배우가 연극의 중간에서 잠드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연극을 준비하고 다른 연기 연습도 하느라 아주 힘들게 일했던 탓에 막상 잠드는 연기를 하는 대목에서 그는 실제로 잠에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이를 눈치챈 다른 배우가 일어나야 할 때에 맞추어 그를 깨웠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그런데 다음날 이 연극에 대한 기사에서 한 평론가는 그 배우의 잠드는 연기가 아주 부자연스러웠다고 비평했다.

이 에피소드는 실제의 현상과 우리 머리 속에서 그려내는 현상과의 사이에 뭔가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지적해준다. 다시 말해서 현실의 리얼리티와 여러 예술 작품 속의 리얼리티는 같지 않다는 뜻이다. 미술과 문학사를 살펴보면 19세기 이후에 사실주의(리얼리즘)가 등장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처음에는 이전의 낭만주의가 그려내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경향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옮기는 데에 주력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미묘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도대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란 것 자체가 모호하다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똑같은 달이라도 시시각각 다르게 보인다. 날씨나 풍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뿐 아니라 보는 사람의 심리 상태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그 여러 모습들 가운데 어느 것이 달의 진짜 모습인가.

이런 점에서 사실주의는 이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연극에서 잠드는 역할을 맡은 배우는 아무리 잠이 오더라도 진짜로 잠들어서는 안 된다. 그는 잠을 연기해야 할 뿐 자신의 눈꺼풀을 짓누르는 잠 그 자체에 빠져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풀이해볼 때 평론가의 비평은 타당한 지적이다. 현실적 리얼리티가 아니라 작품 속의 리얼리티에 비춰볼 때 실제의 잠은 아주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미술이나 문학은 몰라도 과학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과학의 법칙들은 자연계의 리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묘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뉴턴의 운동법칙이 자연의 현실과 다르다면 아폴로 11호는 어떻게 달에 착륙할 수 있었을 것인가"라는 주장도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말하자면 미술, 문학, 과학 무엇이건 간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생각'을 묘사하는 작업이란 점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미술에서 쓰이는 색조와 형상, 문학에서 쓰이는 단어와 문장, 과학에서 쓰이는 여러 가지 수식들은 모두 인간의 '표현 수단'이다. 겉보기로는 다르게 보일망정 본질에 있어서는 모두 동일하다. 20세기에 들어 뉴턴의 운동법칙이나 만유인력법칙은 보다 정확한 상대성이론으로 대치되었다.

하지만 상대성이론도 완벽하다는 보장은 없다. 현대물리학의 또 다른 핵심인 양자역학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가상공간 속 가상현실이 꾸며져 진짜 현실을 추격하고 있다. 언젠가 두 현실이 서로 마주치게 될까 아니면 한없이 가까워지되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일까. 과학적 리얼리티를 계속 추구하면서 앞날의 발전에 기대를 걸어봐야겠다.
고중숙 순천대 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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