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오솔길-17> 논리적 순서와 역사적 순서

2003.11.12 10:12:00


어린이가 수학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수 헤아리기이다. 조그만 손을 펼쳐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가며 "하나, 둘, 셋, …, 열"까지 센다. 그런 후 연필을 쥐고 숫자 쓰기를 익힌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수 헤아리기와 본질적으로 다른 현상 한 가지를 만나게 된다.

1부터 9까지는 헤아리기나 쓰기나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10에 들어서는 '열'이란 수가 '1'과 '0'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어린아이들은 이른바 '영'(零)이란 개념과 이렇게 해서 처음 마주친다.

이 과정은 생물학의 중요한 명제 가운데 하나인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이 수의 개념을 처음 떠올리면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은 0이 아니라 1이었다. 0이 수학에 들어선 때는 놀랍게도 7세기 무렵이다. 고도로 발달한 논리학과 기하학을 세운 그리스 문명이 0의 개념을 전혀 몰랐다는 것은 신비롭다고 할 정도다.

'만물은 수'라고 말한 피타고라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는 간판을 자기가 세운 학교 정문에 내건 플라톤, '기하학 원론'을 쓴 유클리드처럼 위대한 선현들이 0을 모르고서도 수학을 그토록 진지하게 탐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처럼 어떤 이론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논리적 순서가 앞서야 하는 것들이 역사적으로는 나중에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0 이외에 대표적인 예로는 열역학의 근본 토대가 되는 4가지 법칙을 들 수 있다. 열역학에는 열평형법칙, 에너지보존법칙, 엔트로피증대법칙, 절대엔트로피법칙의 4대 법칙이 있으며 각각 열역학 제0, 제1, 제2, 제3법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는 제1 제2 제0 제3법칙의 순서로 정립되었다. 문제는 제0법칙인데, 제1 및 제2법칙보다 나중에 정립되었지만 논리적으로는 이들보다 앞선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미 오래도록 사용해온 제1, 제2법칙이란 용어를 제2법칙과 제3법칙으로 바꿔 부르자니 큰 혼란이 초래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좀 어색하지만 제0법칙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교육과정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수학을 가르치는 데에 '(1)논리적 체계와 (2)역사적 과정 중 어느 것을 앞세워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물론 각각 장단점이 있다. (1)의 경우 논리적 토대는 굳건해지는 반면 현실감이 떨어지고 메마른 느낌을 많이 받을
수 있다. (2)의 경우 역사적 및 현실적 필요성과 위대한 선현들의 탐구 과정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는 반면 논리 체계가 산만해질 수 있다. 따라서 위 두 방법을 적절히 혼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실제로 주요 교육과정은 그렇게 편성되어야 한다.

교육과정의 배경에 담을 이런 생각들을 학생들도 잘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교육과정이란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학습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도 이런 사실을 미리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선교사와 학생들의 상호 협력 아래 위 두 가지 방법을 조화롭게 병행해 갈 때 가장 높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고중숙 순천대 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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